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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8-13 (화) 15:21 4개월전 324  

본문) 행 21:39~22:16, 사42:14-16, 막10:46-52


오늘은 강림 후 열세 번째 주일이다. 입추는 물론 말복(末伏)까지 지냈으나, 무더위의 기승은 여전하다. 하지만 가을의 기운 역시 와있음은 분명하다. 들녘 벌레들의 화려한 춤과 울음소리가 그것을 반증해 준다. 매미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각종 잠자리들, 귀뚜라미, 메뚜기들을 비롯한 가을 곤충들이 길가는 우리의 시청각을 즐겁고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도 이웃 일본은 남부 난카이와 북부 홋카이도에 걸쳐 발생한 광범위한 대지진들과 홍수로 큰 우려를 하게 한다. 그들의 위험은 이웃인 우리에게도 우려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성령강림 절기를 보내면서, 계속 관심 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에게 오시는 성령은 무엇을 사람에게 안겨 주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체로 우리는 성령을 보혜사로 인식하고, 그의 도움과 능력에 힘입어 우리의 삶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 받고 싶어 한다. 즉 우리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성령이다는 데에 우리의 인식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된 건가? 아니다. 맞다.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셔서 오신 메시아 성령이시기에 인간이 자기 부족을 절감하며, 성령의 임재와 도움을 구하는 일은 결코 틀린 일일 수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있다. 그게 성령의 임재의 근본적인 원인일 수만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관계로 설명해 본다. 어린 자식들에게는 부모가 언제나 도우미인 것은 맞다. 하지만 큰 자식들에게는 부모는 도우미 차원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은 부모와 공존자이면서도 도리어 협력자이어야 당연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자식이 언제가 가장 큰 효자 때일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순간순간을 상대하고 대처할 줄 아는 자식으로 나타날 때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의 성령 이해에도, 아니 성령을 소개하며 전하는 강단 설교자들의 보혜사 성령의 이해에도,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헤아려서 전달하고 가르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우리들 대부분은 삼위 하나님의 명령이나 행위에 대하여 집중한다. 하지만 그런 말씀과 행위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성찰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곧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매우 취약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율법화시키고 은혜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크게 둔(鈍)해졌다. 


사실이 그렇다면, 말씀을 주신 우리 삼위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상대하실 때, 매우 답답해하실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의 대응하는 모습에서, 그래서 상종(相從)관계 차원의 수준을 면치 못한 데에서 나온, 보다 풍요로운 세계를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관계에서 가장 큰 취득은 어디서 얻을까?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에서 나올 것이다. 한두 가지 겉으로 얻어낸 것들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취하면, 그 다음엔 모든 것을 얻지 않겠는가! 


오늘의 세 본문은 모두 삼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됨을 알린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용만 살피려 하면, 우리는 곁다리 얻기에만 머물고 말 것이다. 언제 은혜를 받고, 언제 복음의 역사를 맛보게 될까? 마음과 마음이 통하게 될 때이다. 말씀을 주시는 이와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의 소통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때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런 영적 교류가 체현되기를 소망한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는 당신의 백성을 향해 그렇게밖에 오랫동안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가슴 아픈 속앓이(?)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헤아려야만 할 내용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였나?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여 그 포로 된 삶의 질곡을 70년 가까이 깊은 탄식 속에 감내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너무 무서운 범죄를 오랫동안 저지른 까닭이었다. 범죄 체질에 찌든 그들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런 그들을 변화시키려면 보다 강력한 제재 능력을 가진 세상 제국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도 이 엄청난 수모와 참혹한 무너짐의 댓가를 마치 복역(服役)하듯이 70년 정도는 치러야 한다는 판단을 여호와께서 내리셨기 때문이었다. 이는 가나안 입주를 위해 광야 40년의 하나님 백성의 훈련기간이 필요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산자요 보호자요 주관자이자 어버이와 목자 되신 처지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편치 못하셨다. 자식이 자기들 잘못으로 법정에 끌려가고 징역살이를 하는 데, 그 어떤 부모가 쾌재를 부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나님의 이 모든 역사의 판을 얼마든지 순식간에 뒤바꾸어 놓을 능력자이시다. 그런 초능력자가 자기 자식의 징역살이와 그에 따른 온갖 수치와 치욕을 외면하며 오랜 세월 보내시기에, 얼마나 불편하셨겠는가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고통하는 그의 백성들이 그런 자신들의 불행에 대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하고 외면하시는 여호와에 대하여, 각종 오해와 원망과 외면과 불편함을 토로하며 사는 모습들이었다. 이런 점은 여호와의 마음에는 가중(加重)된 통증(痛症)일 수밖에 없었다. 


아비로서의 여호와는 무엇을 하셨을까? 그날, 곧 새롭게 거듭난 당신 백성들의 재탄생을 참고 기다리시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날에 당신이 바라신 그 자식과 그 백성의 모습에 걸맞게 새출발할 수 있도록, 그들의 품에 고귀한 선물을 안겨 주실 준비를 착실히 하시는 일이었다. 그 필요한 내용들에 관하여서는 사40장 이하에서 자세히 참고하실 수 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은 바로 그 기다림과 고대하셨던 그때가 임박하자-, 여호와의 막혔던 속마음이 폭발하듯 표출되어 나온 외침이다. 마치 10개월 아기의 탄생을 준비했던 임산부의 해산 직전의 마음과 같았다. 그러면서 이 작업을 위해 당신이 친히 손보실 일들 두 가지를 밝히셨다. 그동안의 억압자들은 제압하시고(15절), 짓밟혀 살아온 무지몽매한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당신이 친히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 질곡을 빠져나오게 하시리라는 예고를 하신 것이다(16절). 


복음서는 어떤가? 선한 목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맹인처럼 자신의 죄악과 오류에 빠져 지내면서도, 그것에서 자유하고 해방되기를 마음으로 원하며 예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진심 어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밝혀준 내용이다. 그들은 누구나 구원을 선사 받게 되고, 눈도 밝아져서 건강한 인생살이를 누리게 됨을 알린다.


서신서는 어떤가? 강팎했던 율법주의자 사울이 빛 가운데 자기를 찾아온 나사렛 예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분의 참모습 곧 자기는 그토록 그를 증오하고 미워하였으나 그는 자기를 오히려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고 계셨다는 점과 그가 세계 만민을 사랑하신 마음을 확인하면서, 결국 자기를 포기하면서 그의 사람이 되고 그의 수족이 되어, 그분에게서 품어 나오는 모든 말씀과 능력을 온전히 전달하는 그의 종으로 새출발하게 된 연유를 온 세상에 간증했던 내용이다. 


1. 예언서 / 사42:14-16 / “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다 ”


본문은 매우 짧고 간결한 내용들이지만, 이제는 그의 백성들을 70년의 포로 생활을 끝내게 하시고 포로의 오랜 멍에에서 벗어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당신이 행하실 일들을 매우 포괄적으로 알리신 내용이다. 이런 일은 백성들이 아직 전혀 모르지만, 오직 여호와 자신이 스스로 마련하신 구원사의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이제는 비로소 당신이 앞장서서 친히 역사의 핵심 무대 전면에 등장하셔서 주도하실 그 시간인 ‘카이로스’로 보신 것이다. 


1) 그때를 여호와는 새 역사 공동체의 생산기로 보셨다. 패역하고 분열된 낡은 족속인 유대와 이스라엘의 시대를 끝내고, 당신 손에서 재디자인된 하나 된 새로운 공동체 유대인이 비로소 지구촌에 생산되는 때로 보셨다. 그 일의 임산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셨다. 개인은 10달이면 해산하였으나, 새 민족 생산은 7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다. 그 순간의 뜨거운 감정을 여호와는 숨지지 않으셨다. 해산하는 여인의 숨결처럼 차오르며 헐떡이는 마음을 고하셨다(14절). 


2) 이를 위해 당신이 주변 정리를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리셨다(15절). 그동안 지배국인 바벨론 제국을 허약하게 하시고 무너뜨리는 파괴적 작업을 하셨다(사33:1-4 참조). 산들과 언덕을 황폐하게 만들고, 번성했던 초목들을 마르게 하시며, 풍요로운 강들을 섬으로, 못들을 메마르게 하시면서 그들 힘의 기반들을 연달아 무너뜨림으로써, 당신 백성이 그곳에서 제2의 출애굽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국제적인 환경조성을 주도하셨다. 세계 역사의 주되심을 드러내셨다. 


3) 그러면서 이제는 당신이 직접 그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오셔서, 그동안 버림당한 상태로 지내온 무지몽매한 당신의 백성들(맹인)을 친히 이끌어서 데리고 나오실 모습을 전하셨다(16절). 이는 자기 양들을 인도하실 ‘선(善)한 목자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요10:14). 곧 그들을 더 이상 버려두지 않으시면서, 그들이 알지 못할 지름길로 데려가 암흑을 광명이 되게 하시고 굽은 데를 곧게 하시는 작업을 펼칠 것을 예고하셨다. 이 예고가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귀환 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선한 목자로 보내신 일로 완성하셨다. 


2. 복음서 / 막10:46-52 /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선한 목자의 활동을 하셨는지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내용이다. 앞 못 보는 맹인을 눈뜨게 하시는 일이었다. 여기서의 맹인 바디매오는 개인이면서도 동시에 당시 하나님과 진리에 눈이 먼 유대인과 유대교 총체를 대변한다. 그들 중에서도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알아보고, 자신의 불구된 몸을 고침 받으려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보게 도우신 예수님의 선한 활동을 소개한다. 


1)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는 눈은 멀었으나 귀를 밝았던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예수에 관한 소문과 뉴스는 매우 민감하게 들으며 살아왔다(46절).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자로 인식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동네 여리고에 그 예수께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도 자기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에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그 기회를 붙잡을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자기의 속마음을 강하게 펼쳐 보이는 일이었다.


2)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주위 사람들의 ‘잠잠하라’는 꾸짖음이었다. 난감한 순간이었다. 외침과 짓누름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그 순간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절대적인 의지 관철을 위해 용기를 내었다. 그래서 더욱 큰 소리로 예수를 부르며 외쳤다(48절). 그의 외침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3) 그의 ‘나사렛 예수여’가 아닌,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호칭 속에는, 예수야말로 왕으로 오실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고 있었고,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호소 속에는 하나님 사랑의 본성인 긍휼(矜恤)과 자비(慈悲)를 생각하며 그것에 호소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디매오의 호소와 외침은 즉각 예수의 귀와 마음을 움직이며 반응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를 부르셨고, 기뻐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나오는 그를 향하여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느냐’. ‘예,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4) 예수의 즉각적인 은혜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가라 네 믿음의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 그 순간 새 인간 새 인생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부여하신 자유와 해방의 은혜가 뜨거운 믿음과 간절한 기도가 있었던 그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성자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당신의 그런 해방 사역을 온 세상에 넓게 펼칠 당신의 일꾼을 찾고 세우셨다. 이를 위해 12제자들 이외에, 온 세계를 향해 일할 일꾼들을 찾아가 세우셨다. 그래서 일차로 선정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사울이었다. 그것도 당신을 향한 대표적인 박해자(迫害者)였던 인물, 길리기아 다소의 사울이었다. 


3. 서신서 / 행21:39-22:16 / “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들으니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 


분문은 사도 바울이 그를 미워하는 유대인들에게, 왜 예수 박해자요 증오자였던 자기가 지금 이렇게 예수의 변호자요 증언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지를 밝힌 간증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당신을 찾으신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과 그로 인한 자신의 개종(改宗)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힌다. 주로 예수와의 내면적 만남과 깊은 이해가 주원인임을 밝혔다. 


1) 다메섹으로 믿는 자를 체포하려고 가던 사울에게 큰 빛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신 분은 그가 그토록 증오하며 미워하던 믿는 자의 주이신 예수 당사자이셨다. 그러면서 당신 소개를 이렇게 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6-8절). 거기서 사울은 첫 지시를 받는다. ‘다메섹으로 들어가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이를 사람을 만나라’하셨다(10절). 그가 누구였나? 율법에도 경건하며 모든 유대인의 칭찬을 듣고 살았던 아나니아였다(12절). 


2) 사울이 예수를 어떻게 느꼈을까? 그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크게 놀랐다고 본다. 율법주의자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차원 높은 긍휼과 자비의 마음의 소유자이심을 느꼈다. 특히 그의 자기 이름을 부르며 할 일을 맡기시려는 부름을 그러기에 외면할 수 없음을 느꼈다. 정죄와 보복이 아닌 용서와 화해, 그리고 장점을 인정하며 당신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하고 계시는 분에게 깊이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3) 아나니아가 그에게 전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예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證人)이 되리라’(14-15절). 그의 그런 분부에 사울은 주저없이 일어나 주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고 죄를 씻어냈다고 증언하였다(16절).


O 우리는 지금 허위와 거짓과 위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다시 생각하자. 입과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크고도 결정적인 도구이다(롬10:9-10참조). 특히 마음이 준비됨이 없이 입술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은 큰 불경(不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마음의 교통을 원하신다. 진심의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한 예배, 기도, 마음을 다한 충성으로 하나님의 인정받는 자가 되어 살아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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