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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8-20 (화) 22:57 3개월전 297  

본문) 약 5:13~20, 왕하 5:1-14, 막 5:1-12


오늘은 강림 후 열네 번째 주일이다.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극심한 기후 변화와 계속된 전쟁의 참화와 대지진이나 폭우 등의 각종 환경재앙에 따른 범세계적인 각가지 위기의 연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형편은 비교적 행복하게 보낸 여름이었다. 특히 자신의 생존을 위해 너무도 험난하게 세월을 보낸 이웃 나라들과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크게 감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물론 우리도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악화일로에 접어든 나라의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소상공인들의 폐업 사태가 계속되고, 대통령이 최근의 계속되는 친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정치 행태로 인하여 온 국민을 열 불나게 함으로써, 그로 인한 어떤 험난한 앞길이 국가적으로 몰아닥칠지 모르는 형편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여전히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앞길을 계속 바르게 인도해 주시도록 겸손히 구하며 이 절기를 보내야겠다. 


잊지 말자. 우리에게는 기도(祈禱)라는 완벽한 영적 무기가 있다는 점을! 이 기도에 입과 마음이 열리지 못하면, 그는 결코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생산적인 교제가 막혔는데, 어찌 믿는다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인데, 이런 신령한 영역인 기도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에겐 하나님의 임재를 입증할 기회가 없다. 물론 기도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기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은 없음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습관을 쫓아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눅22:39). 기도가 활성화되면, 그에 따른 유익한 점들은 실로 헤아릴 수없이 많다. 전능하신 분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기에, 그 어떠한 난관과 시련에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강하고 담대하게 살게 된다. 그러면서 고난과 난관을 뚫게 된 승리의 체험담을 무수히 쌓아가며 살게 된다. 


기도라면 유다의 왕 히스기야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앗수르 제국의 끊임없는 침략과 조롱에 시달리며 살았던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여호와의 무능함을 비웃는 앗수르의 왕 랍사게의 편지를 받아 들자, 성전에 나아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펼쳐 보이면서, 이제 그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다(왕상18:19 참조). 그 결과는 어땠나? 한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군사들 185,000명을 송장이 되게 했다(왕하19:36). 


그런가 하면, 그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네 집에 유언하라 더 살지 못하리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 즉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기가 주를 위해 살아온 것을 기억해달라며 통곡하고 기도했을 때, 여호와는 그의 기도와 눈물을 보신 후, 뜻을 돌이켜서 그를 무려 15년의 수명 연장을 선사하기도 하셨다(사38:1-6 참조).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에 시달리던 엘리야는 오직 기도로 3년의 흉년과 비도 주시는 역사도 주도했다. 바벨론의 포로의 일원으로 끌려간 다니엘은 하루에 3번씩의 기도 생활을 통하여 제국의 위협을 뚫고 제왕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공인하게 하는 놀라운 일까지도 얻어내곤 하였다(다니엘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기도의 세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알려주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삶의 패배가 아닌 승리를 취하기 위해, 우리 믿는 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분발을 촉구하신다. 


서신서는 교회 공동체가 기도 공동체임을 일깨워 준다. 그러면서 특히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고 병중에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가 있기를 바라신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간의 기도해 주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아울러 믿다가 미혹(迷惑)되어 진리와 교회를 떠난 자들의 복귀, 곧 잃은 양 찾기를 위해서도 서로 기도할 것도 일깨운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교회의 기도의 힘이 발휘되고 활성화되어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 터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강조한다. 


구약은 나아만 장군의 나병 치유 과정에 담긴 진지한 믿음의 여정을 소개한다. 특히 나아만의 치유는 단순히 개인의 치병 차원만이 아니라, 간절한 신앙 순례가 그의 영혼까지 구원을 받게 하였고, 그로 인해 야기된 여러 긍정적인 요인들까지 담긴 큰일이었음을 알려준다. 보다 의미 있는 일은 나아만의 승리에는 그만의 독자적 행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변의 서로 돕고 협력한 신앙 공동체의 일치된 노력의 열매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매우 중요하게 배울 점이다. 


복음서의 거라사(게라사) 미치광이를 치료하신 이야기는 이 세상의 어두운 세계까지도 다스리시는 주(主)가 계심을 보고 알게 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계에는 그 어떤 언설(言說)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그것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소위 <인간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의 세상>이 있다. 바로 그런 곳이나 세력도 예수의 통제와 이름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임을 본문이 우리에게 밝혀주신다. 


1. 서신서 / 약 5:13-20 / “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교회는 본래 어떤 곳인가? 기도하고 찬송하기 위하여 모인 신앙 공동체이다. 기도는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신뢰한 데에서 나온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부족과 약함을 절감하면서,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채워주시기를 구하는 데에서 나온다. 찬송은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과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기도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을 나누는 일에 가장 적합한 도구이다. 돈 없고 힘없어도 마음과 입술만 있으면 된다. 이웃을 향한 관심과 긍휼만이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일차 대상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교우들이다. 고난의 내용은 무수하다. 잃고 빼앗기도 부족하고 당하고 헤매고 쫓기고 필요하고 주저앉는 등의 숱한 가슴 아픈 역경들이 모두 그 고난의 내용이다. 이들을 위해 기도로 돕는 곳이 교회다. 소위 중보기도로 서비스하는 곳이다. 이제 예수의 아우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도인 야고보의 안내를 받아보자. 


1)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14-15절). 옛날엔 가난하고 의술도 허약해서 교회의 역할이 컸다. 그중에 성도들의 병든 자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강했다. 거기서 치유와 기적의 역사들이 많았다. 그 일로 목회자들이 바빴고, 기도회도 많았으며, 교회도 크게 부흥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병원의 역할이 커진 때엔 기도까지 내려놓아도 되는가? 아니다. 


모든 병은 육체적인 원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영적, 정신적 원인도 함께 담고 있다. 범죄의 열매로 얻은 질병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육체적 질병이 드러났을 때는 그의 영적 치료까지 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하다. 소위 온전한 치료를 받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병원 치료와 함께 기도치료가 잘 병행되면, 현대에도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여전히 예전에 못지않게 복음의 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懇求)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16절,시37:5-6)


2)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컸던 대표적 사례는 바로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였다(17-18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사악했던 아합과 이세벨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엘리야는 강력한 기도로 맞섰다. 특히 기후 재앙으로 맞섰다.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삼년 육 개월간 대흉년이 왔다. 하지만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기도 했다(왕상17:1 이하). 간절한 기도의 힘이 얼마나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지를 엘리야가 상세히 보여 준 것이다.  


3) 교회의 기도에는 타 종교나 우상이나 세상의 유혹들에 미혹(迷惑)되어 교회와 진리를 떠난 탕자(蕩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19-20절). 우리는 그런 배신자들에 실망하고 기도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런 우리에게 재 권면(勸勉)한다. 그런 자들이 기도의 힘과 응답으로 다시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지옥 갈 영혼을 건겨 낸 일이 되고, 그가 범한 숱한 죄악도 용서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내려놓았던 기도의 제목들을 다시 재점검하여 볼 필요가 있어야겠다.


2. 구약 / 왕하 5:1-14 /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시리아의 문둥이 장군 나아만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눅4:27). 그 내용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으나, 오직 수리아(아람=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왕상17장). 그것은 왜 그럴까? 그 당시 그 숱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방인 나아만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그 당시에 나아만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는지를 소상히 전해 준 내용이다. 

결정적인 사연은 그의 주변엔 그의 치유를 돕기 위한 협력자(協力者)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두 건이나 있었다. 그 덕분에 나아만은 치명적인 실패를 면하고, 몸과 영혼이 함께 구원을 받는 위인이 되었다(약5:14-16 참조). 


1) 첫째의 협력자는 그가 이스라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다가 자기 아내의 몸종으로 사용하던 이스라엘 출신 어린 소녀였다(2-3절). 그가 자기 집주인의 나병 상태를 보면서, 이런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그의 이 말은 절망 속에 빠진 나아만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아만은 즉시 전심전력을 다하여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간 것이다. 


2) 두 번째 협력자는 그의 동행했던 하인(下人)들이었다(13절). 그들이 그 판이 깨지는 위기의 순간을 간곡한 권면으로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나아만에게 찾아온 위기는 언제 어느 때였는가? 그가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가 왔음을 안 선지자는 나와보지도 않은 채,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10절)라는 메시지만 보냈다. 그런 접대에 나아만은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분노가 폭발하면서, ’씻으면 나으리라‘는 전언(傳言)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씻는다면 자기 나라의 강물에 가서 씻겠다며 흥분하면서 그 집을 떠난 것이다. 판이 깨지는 순간이며, 그의 운명이 그걸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길을 단호히 막으며 제지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합리성을 띤 설득을 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 그들의 진정성과 나아만의 절박성이 맞물리면서, 결국 나아만이 순복하였다. 


서로 약하지만, 서로 기도하고 합심하고 협력하게 되면서, 나아만 그의 몸도 깨끗함을 받았고, 영혼까지도 구원받는 영생의 축복까지 겹경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약5:19-20 참조). 그로 인한 부수적 축복들도 그 후에 얼마나 따라왔겠는가!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다!!


3. 복음서 / 막 5:1-12 / “ 그(더러운 귀신)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


예수님의 거라사(게라사=가다라) 광인의 치유 이야기는 세 공관복음서 모두에 올라와 있다. 그만큼 예수 사역에서 이 마귀 축출 사건은 큰 비중을 갖는다. 예수의 전능성과 상대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전능자로서의 모습을 이곳에서도 생생히 보여 주신다라는 점에서 그렇다. 


1)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 동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데가볼리를 포함한 이방 지역 10여 개 도시들 중의 하나다. 이런 곳을 방문하신 일은 예수님에게는 국경, 인종, 종교가 따로 없이 모두가 당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임을 널리 알리신 행위라 할 것이다. 


2) 배에서 내린 예수를 만난 자는 놀랍게도 당시 거라사 지방의 가장 두통거리요 문제 인물인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2-5절). 그는 무덤 사이에서 지냈고, 고랑이나 쇠사슬로 묶었어도 끊어내고 깨뜨릴 정도의 힘이 셌다. 늘 괴성을 발하고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살았다. 그 귀신의 이름은, 예수의 물음으로 밝혀졌는데, 군대(레기온-로마군 6,000명 정도 병력의 힘)였다(9절). 그런 막강한 수의 귀신들이 이 불쌍한 사람을 장악하며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런데 이런 귀신이 ’진짜 귀신임을 보여준 일‘은 그가 예수를 즉시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괴로워하며 부르짖고 간구했던 내용에 있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귀신의 요청과 간구를 용납할 수 없으셨다. 그가 장악한 그 불쌍한 사람을 우선 자유케 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8절). 


하지만 그의 첫 간구에 실패한 그 귀신의 자기 생존을 위한 간구(懇求)는 끈질겼다. 우선은 그 지방에서 머물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눈치챈 귀신은 산 곁의 큰 때의 돼지들이 보이자, 자기들을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해서 허락받는다(12-13절 참조). 그러다가 약 2,000 마리 정도 되는 돼지 떼들과 함께 바닷속에 뛰어 들어가 함께 몰사(沒死)한다. 


사람 한 생명의 살림의 대가는 분명 컸으나-, 주님은 생명의 가치를 대신할 물질이나 대상은 없음을 확실히 세상에 보여주셨다. 귀신까지도 그 앞에서는 간구하며 매달리는 모습과 함께 예수님의 그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도 보게 된다. 이게 또한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o 기도가 살아나야 한다. 기도의 활성화를 이룬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도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응답 역사는 절대적으로 따른다. 서로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들이 되자. 믿음의 기도, 끈질긴 기도, 진실한 기도의 힘으로 이 험난한 세상살이도 능력 있게 해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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