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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24-08-06 (화) 06:59 1개월전 133  

본문) 롬 10:5~17, 사 42:18-43:7, 막 7:31-37


오늘은 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이다. 연일 폭염(暴炎)에다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어서 여름도 한창임이 분명하다. 변종 코로나도 확장된다는 말도 있는데, 부디 독자 여러분들 모두의 안녕하심을 소망한다. 요즈음은 파리 올림픽도 한창이다. 우리 선수들이 양궁을 비롯한 여러 종목에서 탁월한 솜씨를 빛내면서, 더위에 지친 국민들을 크게 위로하며 기쁨을 안겨 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기여하고 있는 선수들 모두가 고맙기가 그지없다. 

                

이런 중에 일본의 사도 광산이 국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데에 우리 정부가 협력해 주어서 만장일치로 성취되었다는 보도도 들린다. 일제에 우리 선조들이 무려 1,500명 이상이나 강제 노역에 끌려가서 제대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만들어낸 곳이라서, 이번 우리 윤석열 정부의 친일 행태는 두고두고 우리들에게도 한(恨)이 될 듯하다. 참 이 정부의 친일 행각은 끝이 없다. 이러다 독도(獨島) 문제까지도 위험하다는 생각도 가시지 않는다.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제79주년 8.15 민족 해방일을 맞이하면서, 총회가 제정한 평화통일(平和統一)주일로 지킨다. 분단의 한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한스러운지를 절감하는 마음을 품고, 오늘 우리는 이 주일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이 하나 되면, 우리는 세계에서 최강의 나라와 가장 탁월한 민족의 기상과 위상을 뽐낼 수 있는 종족이다. 그런데 아주 불행하게도,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이라는 불행한 선택을 하는 바람에, 지금 이렇게 민족 내부 전쟁과 이념 전쟁의 늪 속에서 헤매며, 지난 79년간을 지내오고 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며 증오하고 격하시키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사장(死藏)시킨 채 지내왔다. 그 바람에 주인 의식보다는 종의 의식에 빠져서, 주변 이웃 강대국의 옷자락에 매달려 지내온 것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운 강대국이 우리의 좋은 이웃인 양 착각하며, 그들이 없으면 우리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망상하며 지내오고 있다. 이런 오류에 빠진 내 모습을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우리는 이 못난 짓을 언제나 청산하게 될 것인가!


마침 오늘 우리가 받게 되는 세 본문 내용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과 자세로 상대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특히 이스라엘은 기원전 922년에 솔로몬이 사망 후 남북으로 분단 길에 들어서면서, 북왕국은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유다는 586년에 바벨론에 망하여 70여 년의 포로 되어 살게 되기까지 무려 400여 년의 불구와 떠돌이 생활을 해왔다. 그들의 하나 됨은 페르시아(바사) 제국의 유대인 귀환 허용(BC.539년)으로 예기치 않게 주어졌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으로서는 대 치욕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정말 암담하다. 최근의 사정은 더 악화되면서 북한은 우리 남한 정부의 적개심을 빌미로 하여, 남북을 아예 두 나라로 기정사실(旣定事實)화 하면서 최상의 적대국으로 공언하며 모든 교통도 차단하였다. 언제 제2의 동족 전쟁이 발발할지 불안스러운 상태이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언제 다시 한나라로 통일이 될 것인지 예측이 더더욱 불가능 해진다. 이는 우리의 불행과 불안이 끝없이 지속된다는 말이어서 더욱 슬프다! 


이런 중에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받는다. 분단과 분열의 탄식과 좌절이 깊어진 유대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 불행한 역사에 대한 원인을 깨닫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와 희망의 메시지도 함께 받는다. 그러면서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도 확인해 준다. 아울러 그런 예수의 치유의 역사가 어떻게 삶의 현장에로 구원의 복음이 되어 확산해서 퍼져갈 것인지도 알려주신다. 


사42장의 선지자의 말씀은 마치 수술대에 오른 만신창이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중환자를 향해 만병의 의사 되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 병인(病因)을 진단해 주신다. 이 의사의 지적은 이렇다. 곧 그 모든 질병의 원인은 결국 그 누굴 탓할 성격이 아닌 그 환자 자신의 어리석고 나태하며 배신적인 태도에서 자취(自取)해 낸 병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환자 자신이 듣기에는 무척 거북스럽다. 하지만 그 중병에서 낫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적확(的確)한 진단이었다. 


사43장에서는 그 의사가 그 환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였음을 보여준다(4절). 그러기에 ‘두려워말라’고 적극 권고하면서(1,5절), 어떻게 하든 너를 치료하고 구원해 주겠다(3절)로 굳게 손을 붙들어 주신다. 그러면서 흩어진 모든 자들을 동서남북에서 돌아와서 그들의 체력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해 주신다(5-7절). 이런 위로의 성취는 곧 이루어질 고레스의 특명에 의해서 맛보게 된다. 세계 역사에서 아주 희귀하게 전개된 지극히 평화로운 대 회복의 역사였다. 


복음서에서는 이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직접 메시아로서 보여주신 모습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그 하나님은 예수로 오셨다. 오시되 ‘에바다’(열리라)의 권세자로 오셨다. 귀먹고 말 더듬는 모든 장애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듣게 하고 말하며 살게 하도록 도우시고자 오셨음을 보여준 내용이다. 


서신서는 그런 에바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은 교회공동체가 세상과 이웃에게 어떤 대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지를 전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福音)의 실체를 다시 보게 된다. 복음은 어려운 논리나 정죄의 수단으로 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입술의 시인과 마음으로 믿어서 얻어질 것임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와 그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는 구체적인 방법도 배우게 된다. 그러기에 이제 평화통일의 세계를 내 입술과 마음에서부터 먼저 찾아보는 영적 신비(神祕)를 경험해 보자. 


1. 예언서 / 사42:18-43:7 / “ 야곱아 --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날카로운 비판과 잘못에 대한 지적의 말씀은 결코 비난과 질책을 목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반등과 온전히 회복을 향한 재출발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든 시련과 저주의 멍에는 순전히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배신적 행위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이제는 바로 그런 부분을 직시하고 참회하며 깨닫고 새출발에 매진하면 풀리는 문제였다. 그러면 그들이 대체 어떤 잘못을 범해왔던가? 


1) ‘맹인(盲人) 아닌 맹인 노릇’을 했고,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 노릇을 했던 까닭이었다(18-20절). 그것도 그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하여 그런 어긋난 짓들을 자행 해온 까닭이었다. 종은 어떤 존재인가? 누구보다도 주인의 움직임에 민첩하게 반응하여야 되는 존재이며, 주인의 지시에 즉시 순응하며 행동해야 하는 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주 오랫동안 정반대의 행보를 취해왔다. 충성이 아닌 패역의 길을 걸어왔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도 숱하게 받았지만(24절, 하),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2) 그러기에 당신의 종 이스라엘의 거듭된 배신행위에 여호와께서 어쩔 수 없이 사납게 채찍을 드셨다(21-25절). 도둑맞게 하고 탈취를 당하게 하며, 굴속에 끌려가고 옥에도 갇히게 하셨다. 노략질을 당하고 약탈을 당했으나 막아줄 자 없게 하셨다(22-23절). 실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그들에게 쏟아부으셨다(25절). 그 참담한 시련과 부끄러움과 고립된 상황들이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떨어졌던 사건들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자신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되돌려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타락과 탈선에 빠져든 자식을 향한 부모의 가슴 아픈 마지막 징계의 수단이었다! 


3) 다행히 바벨론 포로기 70년은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패역의 삶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손길을 붙잡게 될 절호의 기회였다. 최소한 포로기 이전의 강퍅했던 그들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인 탕자의 심정으로 여호와의 뻗어주신 구원의 손길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다. 여호와는 그런 모습을 죗값을 치른 ‘복역(服役)’을 끝내고 죄 용서받게 된 자로 표현하시면서, 당신의 위로(慰勞) 말씀을 선사하셨다(사40:2 참조). 


4) 그러면서 여호와는 돌아온 이스라엘과 야곱과의 관계 정상화를 적극 도모하고 나오셨다(43:1-7). 더 이상 분열된 두 나라 백성이 아니라 하나인 유대인 이스라엘 족속으로 부르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창조주로서의 주권과 지명권과 소유권을 밝히시면서, 이 관계 위에 그들이 다시 서도록 독려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가 이전의 그들의 조상들을 돌봄처럼 앞으로도 적극 돌보고 사랑할 터이니(2-3절), ’두려워 말라‘고 강조하셨다(1, 5절 참조)!


5) 그러면서 여호와는 그들의 허약해진 국력과 체력을 강화시키고자 그동안 수 세기 동안 세계 처처로 흩어진 동포들인 디아스포라들을 동서남북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흩어지는 족속이 아니라 돌아와 모이는 족속으로 거듭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5-7절). 


2. 복음서 / 막 7:31-37 / “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이스라엘 백성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영적 장애를 가진 불구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 그래서 숱한 재앙과 시련과 슬픔의 골짜기를 걸어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여호와는 비로소 친히 보혜사 치유자를 공개적으로 보내주셨다. 그를 만나고 그의 손길을 받으면, 귀가 열리고 입이 터지는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선사할 메시아를 하나님이 직접 보내 주셨다. 그가 누군가? 바로 나사렛 예수였다! 


1) 예수님의 전도와 선교 활동 무대는 결코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방 지역들도 당신을 필요로 하시는 곳들은 어디든 찾으셨고, 상대하셨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주 활동무대인 갈릴리에 오셨을 때, 그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께 왔고, 그들의 뜨거운 안수 요청을 받아서 예수의 치유의 선물을 받게 된다(31-32절). 


2) 그는 <귀먹고 말 더듬는 병자>였다. 이 병은 아주 시청각 측면에서 아주 꽉 막힌 자는 아니지만, 정상적 생활이 불편하여 가슴 아픈 자였다. 외롭고 슬픈 생활을 면치 못하며 산 자였다. 그런 고단함을 헤아리셔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매우 특별한 치료 방법을 동원하셔서 그를 고쳐주셨다. 그를 데리고 한적인 곳에 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후, 하늘을 향한 숨을 깊이 몰아쉬시더니, ’에바다‘(Ephphatha!=열리라)라 명하셨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자유로워졌다(33-35절). 


3) 그의 회복된 모습에 모든 이들의 놀라움은 컸다(37절). 못 듣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시는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를 대하시는 마음은 달랐다. 이 인물은 바로 이사야 42장에서 만났던 그의 조상 이스라엘이 안고 살았던 온갖 영적 장애들, 곧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여 온갖 불행을 끌어안고 살았던 바로 그 질병을 그 한 몸에 안고 살아온 매우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3. 서신서 / 롬10:5-17 /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이제 중요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행동들이다. 에바다 예수로부터 전수받은 생명을 되살리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하며 살아가느냐가 큰 과제가 되었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게 특별한 당부의 말씀을 전한다. 또다시 옛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지 말고, 그 말씀을 가슴(마음)에 담고 입으로 시인하고 전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행동을 실천하라고 권한다. 


1) 그중에서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이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강조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서 나온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의‘를 얕잡아보게 하여 그들의 믿음에 혼란과 시험을 불러오는 행위를 강력히 경고한다(5-7절 참조). 곧 구원의 문제를 놓고,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냐 하는 식의 발언은 하나님만의 결정권을 훼손하거나 왜곡하게 할 위험성이 있기에, 그 누구도 단언해서 말하면 안 됨을 역설하였다. 


2) 반면에 바울은 구원이 드러나는 여건에 대하여서는 밝힌다. 곧 구원의 말씀이 사람의 시인하는 입과 믿는 마음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렇게 말한다.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하며, 또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10절). 즉 구주 되신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일을 믿으면, 그는 세계 어느 곳의 사람이든 차별 없이 모두 구원받는다(12-13절). 


3) 그러면서 바울은 이 구원의 믿음을 사람에게 심어주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들과 나가서 세계 처처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한다. 물론 듣는다고 다 믿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품게 된 믿음은 본래부터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전한 것을 들음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것도 설교나 선포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에바다의 예수를 만나게  됨으로써,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믿음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16-17절 참조). 


o 부디 평화통일을 소원하며 지키는 해방절의 은혜가 우리 한국교회에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지금의 한국 역시 귀먹고 말 더듬는 환자의 나라이다. 교인들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다. 이를 치유할 현재의 한국교회는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에바다 예수와 그의 복음이 성령을 통하여 보다 새롭고 강하게 임하셔서, 병든 귀를 치료하시고, 마음에 믿음을 심어줄 교회의 강단의 증언들이 새롭게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그래서 이 경직된 세상까지 새롭게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이 역사에 등장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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