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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01-04 (수) 00:01 1년전 924  

본문) 마 4:12~25, 겔3:16-21, 행 4:1-4, 13-21


2023년 주현절 첫 주일이다. 계묘(癸卯)년 토끼띠 둘째 주일이다. 토끼는 가축 중에 가장 힘이 없는 짐승이다. 하지만 토끼의 특징이라면, 몸에 비하여 듣는 귀가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잘 듣고 큰 눈으로 반응을 잘한다. 배울 점이다. 올 해는 우리가 서로 상대의 말을 잘 듣고 경청하는 모습과 그래서 서로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때가 되기를 소망한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우리고, 그 말씀을 좇아 살아서 하늘 복을 받는 해가 되게 하자.  


올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남북의 정상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발언들이 빈번해지면서, 서로 힘자랑을 서슴지 않고 있어서 큰 걱정이다. 다시 한 번 동족 전쟁이 발생하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늪 속에 빠져들 것이다. 절대 막아야할 일이 바로 동족 전쟁이다. 신명기서에서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입해 들어갈 때, 여호와의 특명이 있었다. 그것은 과정에서 흩어져 있는 혈족들(롯의 후손, 에서의 후손 등)과는 절대 싸우지 말라는 내용이다(신2:8이하). 


아무래도 앞으로의 전쟁은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재래식 전쟁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 치명적 피해는 씻어낼 수 없다. 이 조그만 한반도 땅덩어리가 그 잔인한 살상무기의 실험장이 된다면, 과연 누가 좋아할까? 승자는 없다. 윤석열이든 김정은이든 만고의 역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망신살이 속에 접어든 대한민국은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특히 우리 가진 것이 많은 이곳 남쪽이 훨씬 더 치명적인 피해로 몸부림하게 될 것이다.  


막아야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길 길을 찾아야 한다. 함께 이길 길을 찾아야 된다. 평화를 위해서는 남과 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마침 시46편의 말씀이 큰 길잡이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 도다’(9). 진실로 역사의 주께 간구할 때다. 


주현절(主顯節)은 어떤 절기인가? 성육신(成肉身)하여 인간되어 오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가 직접 배우고 익히는 절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절기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활동하실 때, 홀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든 인물들을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셔서, 그들을 교육하시고 훈련하시며 파송하셔서 그들과 함께 일하신 모습들을 풍성히 접하게 된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투옥되는 모습과 함께 당신의 활동을 본격화하신다. 그러면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당신의 활동의 거점을 삼고, 하나님 나라운동을 시작하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구원자 메시야 사역을 펼치신다. 전국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기 시작했다. 구약의 에스겔서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당신의 파수꾼으로 선택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파수꾼의 책임이 막중함을 확인하게 된다. 


서신서는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 성령이 오시면서 하나님 나라운동이 제자들인 사도들을 통하여 본격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면서 숱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든다. 동시에 그들의 급속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성도들을 향해 탄압과 협박을 가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더욱 복음전파에 목숨을 받쳐 헌신하는 모습을 전한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생명을 전수받아 세계복음화의 초석을 놓았는지 보여준다. 


1. 복음서 / 마 4:12-25 /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체포됨과 맞물려 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의 계주자들의 바톤 터치한 것과 흡사하다. 이 때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떠나시면서(출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시기 시작하셨다(9:1). 결국 가버나움은 예수 활동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의 어부 출신들인 제자들 4명을 부르신다. 그곳에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시는 메시야 사역을 펼치셨다.  


1) 예수님의 가버나움에서의 활동의 거점은 아마도 제자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보고 있다(9:28, 13:1,26, 17:25참조).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느 집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2)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가 스블론-납달리-요단 강 저편 해변 길은 지형 상 이방인들이 많이 출입하고 유대인과 혼재된 지역으로서, 유대인은 그곳을 ‘이방의 갈릴리’라 불렀다.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는 기원전 732년에 앗시리아인들에게 끌려갔다(왕하15:29참조). 그 때 이래로 게네사렛 호수 인접 지역과 전체 갈릴리 땅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이주해서 살게 된 곳이다. 그 바람에 정통 혈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이들이 흑암의 백성들로 무시하며 살았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빛과 생명의 사역이 이런 흑암(黑暗)의 땅과 백성들을 바탕으로 시작된 일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크다. 그런 곳일수록 큰 빛과 은혜가 더욱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 향하는 일(24절,8:11참조)도 이미 시작된 셈이다.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로 선교의 방향(方向)을 바꾸는 일은 이미 그곳 갈릴리 선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28:16-20의 ‘예수의 선교 대 명령’은 이미 시작부터 잉태되었다고 본다.  


3) 그곳에서의 예수의 선포의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17절). 회개를 외치는 일은 세례 요한과 같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포는 회개가 목표가 아닌 복음이요 천국이었다. 회개만을 강조하면 힘들고 막연할 수 있으나, 회개가 열어 줄 복의 세계와 구원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시는 일은 회개를 더욱 강하게 촉진할 동력이 되기에 충분한 주제였다. 동시에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천국 소개는 더욱 강한 흡인력을 발산하였다. 


4) 예수님의 제자 세우심이 본격화되었다. 무대는 갈릴리 해변가에서 고기 잡은 어부들 네 명을 택하여 부르셨다. 주님의 초청사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였다(19절). 이에 이들 모두는 마치 주님의 초청을 고대했다는 듯이 즉시 응답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20절). 야보고와 요한 형제는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22절). 이는 예수의 부르심에 자신이 그 동안 의지해온 직업, 부모 친족을 다 버리고 따른 것이다. 아브라함의 응답을 맛보게 한 현장이다(창12:1).    


5) 핵심 제자들을 곁에 두신 예수님의 천국복음 전파사역이 갈릴리 지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세 가지였다. 유대 회당에서는 가르치셨고, 거리와 삶의 현장에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백성들 중에서 병과 약한 것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치시는 치유(治癒)의 사역을 펼치셨다(23절). 


6) 특히 주님의 치유의 능력으로 병 나은 이들이 많았다. 모든 앓은 자, 각종 병들어 고통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로서, 그 시대 각종 난치병(難治病)으로 고통 하는 모든 자들이 예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은 것이다(24절). 그 바람에 예수의 소문은 주변의 이방 땅은 물론, 갈릴리 현지, 데가볼리와 심지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건너편까지 퍼지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25절). 예수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2. 구약 / 겔 3:16-21 / “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


하나님의 인간 부르심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있었다. 바벨론의 왕인 느브갓네살이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예루살렘이 항복한 때는 주전 597년이었다. 그 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에스겔(=하나님께서 힘 있게 하시기를)이 있었다. 제사장 집안 출신인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때는 593-587년으로서, 그는 오로지 바벨론에 있는 동포들 가운데서만 활동했다.  


그 때의 그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점령당하고 파괴될 때까지는 죄로 가득한 잘못에 따른 심판이기에 돌이킬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일부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내주실 리가 없기에 곧 자기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하는 자들의 희망이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본문은 그런 환경 속에서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의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장면을 담고 있다.  


1) 에스겔이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받은 때는 그가 제사장의 위임식을 받은 칠 일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16일, 레8:33참조). 이때 그는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watchman)’으로 세우심을 받는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깨우치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17절). 내용만으로 보면, 이곳에서의 선지자는 백성들 전체를 대상하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 집중한 면이 강하다. 개개인의 사목(司牧)도 중요히 보신 것이었다. 


2) 예컨대, 하나님께서 한 악인(惡人)에게 죽음을 통보하셨는데, 선지자가 그것을 당사자에게 전하지 아니해서 그가 죽게 되면, 그 악인도 죄악 중에 죽겠지만, 전하지 않은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 악인의 핏 값까지 치루게 될 것임을 통보받은 것이다. 반면에 통보는 했으나, 그 악인이 회개하지 못한 체 죽으면 그는 죄악 중에 죽겠으나, 전한 선지자는 생명을 보존 받는다. 여기서 개인은 악인일 수도 있고, 의를 행하다 그만둔 의인일 수도 있다.     


3) 더욱 무서운 경고도 있다. 의인이었다가 돌이켜 악을 행할 때, 그가 그동안 행한 공의는 기억될 바 아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를 죽게 할 것인데, 그 때에도 선지자는 그를 외면하면 그가 죄 중에 죽을 것이나, 그 책임은 선지자에게 묻겠다고 하셨다(20절). 반면에 선지자가 그를 깨우쳐 범죄 하지 않게 하면, 그도 살고 선지자의 영혼도 보존되리라고 통보하셨다(21절). 


☞ 실로 여호와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 말씀의 자리에 부르심을 받은 자의 책임의 막중함을 동시에 절감하게 하는 매우 무거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변심한 의인들에게도 강력한 경고의 말씀도 전하는 내용도 큰 교훈을 준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이다


3. 서신서 / 행 4:1-4, 13-21 / “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예수의 부활 승천 후, 그가 보내신 보혜사이신 성령은 예수의 제자들을 사도(使徒)들로 불러 세우셨다. 그들은 성령이 주시는 힘(능력)을 받아서, 예수께서 하시던 생명을 살리는 복음 사역을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g한 남자를 많은 출입자들 앞에서 잡아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면서, 전체 예루살렘 도성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다시 보고 찾게 되는 대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행3장 참조). 


자기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바로 자기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이들이 모여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찬양하며 전하는 교회(敎會) 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베드로 설교에 남자만 5,000명이 모이기도 했다(4절).  


1) 이런 예수 운동에 초비상이 걸린 자들은 바로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앞장섰던 유대교의 제사장-성전관리-사두개인들인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사도들의 입을 봉하려고 잡아 가두기도 했지만, 사정은 자기들에게 아주 불리했다. 


2) 우선은 대표적 연설가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더 이상 예전의 학문도 없던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그때 예루살렘을 움직이는 대설교자들이요 유명인사(有名人士)들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앉은뱅이의 병을 치료받은 자가 사도들과 함께 동행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지내는 판이어서, 그들의 행태를 마구 잘못된 짓이라고 비난만하고 왜곡할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13-14절). 


3) 부활하신 예수가 그를 일으켰다는 사도들의 설교를 사람들이 믿는 판이 되었어도, 그것을 ‘거짓이요 허황된 것’이라고 저지할 방안이 없었다. 결국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에게 위협과 협박을 가하여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도 말라’고 강압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15-18절 참조). 


4)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불러 경고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사도들로부터 이런 놀라운 외침을 들어야만 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19-20절). 

이런 증언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그곳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경고를 들은 셈이다. 자신들이 못 듣는 하늘 음성을 예수 제자들은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들의 이 외침은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파수꾼의 사명을 훌륭히 감당한 모델이면서, 오늘날의 주의 부름 받은 모든 주의 종들의 소임에 대한 강력한 경고도 되는 말씀이다.  


o 주현절은 성육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활동하신 때이다. 이때의 주님은 결코 홀로 일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을 택하여 함께 일하셨다. 가르치고 선포하며 치유하셨다. 우리 역시 그 분에게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그를 잘 듣고 배우고 훈련하며 전하는 책임과 의무가 부여된 존재들이 되었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 전하고 심어주는 사역을 정성 다해 잘 감당해야겠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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