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13~23, 호11:1-4, 8-9, 고전 1:26-31
오늘은 성탄 후 첫 주일이며 2023년 계묘년(癸卯年-토끼)의 새해를 여는 신년주일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2022년 지난 한 해 우리의 생명과 삶의 모든 것을 지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며, 올 새해에도 당신의 선하신 계획과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린다.
요즈음 교회에서 독일의 본회퍼 목사 작사와 나우엔의 찬양, <선한 능력으로>를 교우들과 함께 합창하며 은혜받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절(1절)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새해 노래로 소개한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 가네
나 그대들과 함께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후렴)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때 마침 우리 교단은 총회가 설정한 새 역사 70년의 주제인, <새 역사 70년,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창50:15-21,요13:31-35,엡4:3-4,시31:15-16)란 주제를 가지고 올 한 해를 맞이한다. 이는 지난 번 제11차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총회 주제인,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라는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내용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세상의 문제를 풀 열쇠고리임을 함께 고백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몇 년간 인류를 공포에 몰고 간 코로나19의 위협으로 우리의 삶이 크게 위축이 된 데에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의 장기화로 세계경제도 하강 국면에 접어 들어가면서, 우리의 생활은 물가고로 인하여 더욱 힘들어졌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정부의 남북 강경정책으로 인하여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전쟁의 기운도 우려되는 상황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면서, 우리의 미래는 더욱 희망보다는 어두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 평화와 화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세력들의 등장이 필요해졌다. 바로 그 일은 아무래도 교회의 몫이다. 평화의 주로 오신 예수를 주로 믿는 무리들이 나서서, 쌍방이 무기와 다툼을 내려놓고, 사랑이란 무기로 화해와 평화를 견인할 움직임을 갖는 일이 시급해 졌다. 현실로 보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이때에 가슴과 입을 열어서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전해야 할 때이다. 전쟁 무기가 아닌 사랑과 평화의 무기가 필요한 때가 왔다.
오늘 새해 첫 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세 본문 말씀내용도 이런 흐름과 함께 하고 있어서 기쁘다. 전체는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종교에 빠진 타락한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그들의 행보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기에 충분하지만, 정작 그 진노를 막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였다. 마치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 사랑이 당시의 세상을 지켜낸 것이다.
그 사랑이 이번에는 성탄하신 당신의 아들을 향하여 집중하셨다. 바로 복음서의 아기 예수를 헤롯의 잔혹한 학살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시는 하늘 아버지의 계속된 보호의 손길로 나타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학살자 헤롯에게는 헛발질을 유도하시고, 아들 예수에게는 애굽을 보호망으로 삼게 하시면서, 후에는 ‘나사렛 사람 예수’로 자리매김하게 하셨다.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세상의 판도를 재편하게 함을 보여 준다. 곧 하나님께서 세상의 다수의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과 천한 자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끌어안으셔서, 소수의 기득권자들인 지혜로운 자와 강한 자들과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이는 세상의 힘의 균형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약한 자들의 집결된 힘을 통하여, 소수의 귄력자나 영웅이나 특권세력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인간들의 육체를 자랑을 못하게 하신 것이다.
1. 복음서 / 마 2:13,20,22 / “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하나님의 아들 사랑은 아기 예수로 세상에 가신 당신의 아들을 폭군인 헤롯왕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어, 무사히 예고된 땅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인생을 출발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천사를 보내셔서, 의로운 종이었던 요셉(1:19)으로 하여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대피하게 하셨다. 세 번의 지시들이 있었는데, 처음은 애굽으로 피하도록 하셨고, 다음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게 하셨으며, 세 번째는 탄생지였던 베들레헴이 아닌 북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아주 한적한 동네로 들어가 살게 하신 일이었다. 그곳에서 그 메시아 가족은 마치 유배 생활을 하듯 살아가시게 된다.
1) 동방 박사들이 헤롯을 피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후,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지시한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어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 거기에서 네게 이르기까지 있으라’(13절). 그 바람에 아기 예수 가족들은 뜻밖의 애굽 피난살이를 하게 되신다.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게 되셨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묘한 이웃이다. 여러 가지 곤경과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피난처가 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초기에 기근으로 인한 애굽 생활을 통하여 곤경과 함께 재물도 얻어서 가나안 생활을 하게 된 일도 있었고(창12:10-20참조), 야곱과 요셉 가족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의 번영과 곤경을 함께 안겨 준 곳이기도 했다(창42:1-3,46:28, 왕상11:40,왕하25:26,렘26:21참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난처도 되기도 했다(호11:1).
아기 예수의 이 애굽 피난 사건은 후에 이집트에 예수 피난 교회를 거점으로 탄생한 콥틱 교회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 교단은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회 공동체이다. 숱한 박해 속에서도 지난 2,000년간을 묵묵히 믿음을 지켜온 신앙공동체로서, 이집트 국민의 약 10-15%에 이르기도 한다. 그들의 신앙은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겨 주기도 한다.
2) 헤롯의 대학살이 발생하였다(16-19절). 그것은 동방박사들이 자기를 속이고 떠난 일에 대한 분노보다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근처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사내 아기들이 대 참변을 당한다. 예수 탄생이후, 예수 때문에 발생한 첫 순교자들이었다. 이 점은 예레미야 선지자 때 이미 예고된 바 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라마에서 자식 잃은 어미들의 통곡과 애곡에 어떤 위로 받기도 거절되었다’(렘31:15)
이 일은 모세에게 닥친 일과도 다르지 않다. 유대 전승을 보면, 모세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 모세의 목숨을 노려서 애굽에서 어린이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출1:15-22 참조). 아기 메시야 탄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곤경과 죽음을 몰아온 일은, 모세 때나 예수 때나 모두, 그 탄생을 저지하려는 악의 세력들의 반격들도 그만큼 강력했었음을 말해 준다.
3) 헤롯이 죽자 아기 메시야 가족은 이스라엘로 귀환한다. 하지만 유대에는 헤롯의 아들인 아켈레오가 그의 후계자로 임금이 되자. 두려움을 느낀 가족들이 결국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마을로 들어가 사시게 된다(19-23절). 이는 메시야가 당신의 땅에 오셔서도 언제나 환영이 아닌 낯선 사람으로 사셨고 유배 생활하듯 지내셨음을 말한다. 이 거주지 때문에 예수님께 붙여진 ‘나사렛 사람’란 이름 속에는 그가 메시야라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2. 구약 / 호11:1-4, 8-9 / “ 내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
하나님의 그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어린 시절인 애굽 시절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되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 하셨다(출4:22-23, 신32:6 참조). 그들에게 걸음마도 가르치시고 그들을 팔로 안으셨던 여호와이셨다(3절).
또한 농사꾼이 자기 소를 정성스럽게 돌보 듯 당신의 백성을 매우 조심스럽고 넘치는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다(4절). 본래 소는 멍에를 맨 체 먹이를 먹기는 힘들기 때문에, 주인들은 멍에를 벗겨서 가축이 입으로 자유롭게 먹이를 먹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몸을 굽혀 가축에게 먹이를 갖다 대는 농사꾼에 비기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걸음마나 팔에 안으신 이가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로 알고 그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다(2절). 은혜를 배신으로 응답한 것이다. 울법에 따르면, 그처럼 반항하는 자식은 돌로 쳐 죽여야 마땅했다(신21:18-21).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함께 당했던 아드마와 스보임과 같은 운명을 당해야만 마땅했다(신29:21-22참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를 못하셨다. 사람들 경우라면 그처럼 깊은 상처와 배신을 당하였다면, 진노를 마구 터뜨릴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진노를 억누르신 것이다(8-9절).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9절)라는 표현은 창18:24-32에 비추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곧 거룩하신 하나님은 소돔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의인 10명이 모자라자, 몸소 그 자리에 서셨던 것이다. 그것은 심판을 거쳐서 그의 선하신 결정을 실행하실 것을 취하신 것이다.
심판은 저주만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을 통하여 자신들의 무서운 죄에 대한 깨달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영속적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렘30:11-17, 46:28참조). 그렇다. 심판에는 정화(淨化)라는 놀라운 기능이 담겨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14:5). 특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전에 맺었던 관계의 기반을 새롭게 하시려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음도 알아야 한다(2:14-23 참조).
명의(名醫)들은 현재의 환부(患部)의 상태를 보면서 어떤 게 그 환자에게 좋을 지를 판단한다. 환자가 수술을 좋아하느냐 두려워하느냐에 따라서 치료 방법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수술이 절대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집도(執刀)한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심판도 그런 차원이었다. 관계 회복을 위하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수술이라는 심판을 확실히 가하신 후, 밝은 눈으로 그를 다시 보고자 하셨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은 바로 하나님의 집도를 받아야 하는 그런 순간에 있었다.
3. 서신서 / 고전 1:26-31 /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당신의 교회의 가족으로 부르셨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접근을 배제하셨는가? 그 점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을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다. 하나님께서는 소수(小數)의 지혜로운 자와 능한 자와 문벌 좋은 자들 보다는, 다수(多數)의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인간의 기만적 자기 신뢰의 토대를 배격하신다(26-29절).
하나님의 다수에 대한 그런 선호(選好) 경향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약자(弱者) 사랑의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을 보라. 이 안에서는 약한 자들이 절대 다수이다. 하지만 숫자로는 다수이지만, 자체 능력과 역량이 부족하고 미련하고 약해서 자기 몫을 챙겨 살지 못한 체, 소수의 강자들에게 그 많은 몫을 빼앗겨(?) 살고 있다. 그런 점에 눈뜬 이들이 노조활동과 같은 단체를 통하여 임금 및 권리 투쟁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탁월하고 우월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압도적인 재능과 힘을 가지고, 다수의 미급한 무리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한다. 그 바람에 세상은 언제나 균형과 형평성을 잃고 강자 중심 세상으로 기우러져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군림하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지낸다. 영웅 중심, 강자 중심의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는 교회의 관심은 이런 흐름과 구도에 동의할 수 없다.
비록 힘이 약하고 부족하고 미급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공동체로 힘을 결집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웅이나 강자 중심의 소수가 이룬 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선한 힘을 낼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이것은 집단적 지성이 개인의 탁월성보다 우위의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 정신이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런 삶의 무대가 바로 교회 현장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작은 힘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개인의 우수성과 탁월함을 무시하거나 배격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것이 집단적인 것 위에 군림하면, 거기에는 독점, 배제, 교만, 패거리, 인물 추종 등등의 낡은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그 집단을 위험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힘은 공동체와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적극 헌신하고 기여할 때, 복되고 자랑스럽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하심이 되심을 본받아(30-31절) 육체의 자랑을 하지 말고, 우리 각자들도 교회 공동체와 이웃과 국가 사회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주역들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여야 겠다.
o 새해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오늘의 우리를 위하여 조물주 하나님의 배려와 돌보심의 압도적 은혜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사람과 정신으로 살아가자.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사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길 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알고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