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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7-20 (화) 21:43 2개월전 93  

분문) 행 6:1~7, 왕상 17:8-16, 막 6:30-44


강림 후 아홉째 주일이다. 지난 금요일(23일)은 코로나19로 인하여 1년간이나 대회가 연기되기도 했던 도쿄 올림픽이 개막되기도 했다. 일본이나 IOC 당국자들의 행태는 여러 가지로 문제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일단 힘겹게 개최된 올림픽이기에, 이 날을 위하여 지난 수년간 피나는 훈련을 해왔던 각국의 선수들에게는 코로나에 감염 없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매우 의미 있는 대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중에 특히 우리 한국선수들의 선전도 응원한다. 


그런데 계속되는 폭염과 폭우를 동반한 장마의 습격들이 우려스럽다. 금주 간도 한반도 상공의 열돔 현상으로, 섭씨 36도를 옷돌 무더위가 예고되었는데, 잘 대비해야만 하겠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 독일과 벨기에의 북부지역에서 단 2일간의 기습적인 폭우로 사망자만 200여명 넘게 발생한 소위, ‘1천년 만에 발생한 것’라고 평가되는 대홍수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탱해 온 모든 각종 재난과 재해의 대응 체제와 시설이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온 세계에 경고해 준 큰 사건이었다. 이미 본격화된 온난화가 기후 변화를 촉발하면서 지구촌 곳곳에, 이상고온-폭염-폭우-산불-홍수-가뭄-산사태-질병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음이다.  


이런 이상기후의 공격이 격화되는 중에, 그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코로나19의 델타 변이 바이러스인 환자들이 우리의 수도권 중심으로 1,000명대를 넘게 연일 급증하므로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지침이 4단계까지 발령되는 바람에, 또다시 소상공인들 중심의 생활고 문제가 재기되었고, 교회들의 예배마저도 비대면 예배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참 어렵고 난감하다. 


이런 중에 코로나에도 새로운 국면이 발생했다. 영국과 싱가포르에서는 코로나 대응에 대한 국가적인 새로운 시도를 선언하고 나왔다. 그것은 국민들 대부분이 두 번 이상이나 백신을 맞았으나, 계속 변이(變異) 바이러스로 시달리는 상황이라는 점, 하지만 초기처럼 치명적인 사망자 숫자는 대폭 줄었다는 점에서-, 이제는 코로나를 ‘독감 수준의 감기와 같은 것’으로 상대하며 살아가겠다는 소위 ‘코로나로부터의 해방(解放)선언’을 취하고 나온 것이다. 


우리도 곧 국민 백신 접종이 70-80% 이상이 되어 그런 코로나19에 대한 ‘국민 면역시대’를 선언하겠지만, 그들의 치고나가는 모습은 ‘우려 반(半) 부러움 반(半)’이란 생각이 든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아, 우리의 대응도 그들보다 보다 성숙하고 안전하기를 바란다.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우리 생명과 구원의 삼위일체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면서 그 분의 구원의 메시지를 다시 들으려 한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내용은 바로 ‘나는 길(the Way)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the Life)이다’(요14:6)는 주의 말씀을 다시 보게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길 되시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이다. 지금 같은 대 혼란기와 예측불허의 위기에 정말 필요한 것은 ‘길 복음’아닌가!  


살펴보면, 이 지구촌의 삶에는 끊임없는 무질서와 질서의 싸움이었다. 어둠의 권세들은 우리인류의 삶을 무한정 파괴하고 분열시키고 갈라치며 방황하게 하였으나, 구원의 백신으로 오신 메시아는 항상 회복시키고 길을 제시하시며 삶의 질서와 길과 피난처를 제공해 주셨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두 가지 현실인 구원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사느냐는 것이다. 마귀의 길을 택하는 자들은 끝내 실종자가 되겠지만, 하나님과 그 말씀을 택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의 길에 들어서 영생의 안식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분별할 것이 있다. 우리 인생길에는 걱정-원망-미움-두려움-슬픔-분노-궁핍-실패-좌절 따위는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망가진 인생의 삶의 여정에 마치 쓰레기처럼 널려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들도 있다. 곧 사랑-희락-평화-인내-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와 같은 것들도 함께 있다(갈5:22-23참조). 우리는 항상 후자들을 믿음으로 선택하고 취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험한 인생길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내게 될 것이다. 


오늘의 세 본문들의 배경은 한결같이 부딪친 삶의 난관들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입을 통하여, ‘위기(危機)를 기회(機會)가 되게’한 은혜로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기에 주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안에서 방안을 찾는 주역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최소한 세 가지 원리들이 담겨있다. 이제 그 원리들을 중심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얻도록 하자.



o 첫째는 문제 해결의 고리를 ‘자신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1) 서신서의 문제는 교회 내 과부들에게 부여되는 구제 문제가 불공평하게 시행된다는 점에서 발생하였다. 그 문제는 교회봉사 영역까지도 주관하던 사도들의 리더십까지도 악영향을 끼쳤다. 사실 사도들은 기도하고 말씀 사역하는 일만으로도 분주하였는데, 그런 봉사문제까지도 도맡아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혜택에서 누락되는 사람들도 생기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책은 무엇이었나? ‘그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이 맡아왔던 그 일을(봉사/코이노니아) 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3절). 외부인사 영입이 아니라, 그들 공동체 안에서 성령과 지혜와 신뢰성에서 인정받게 될 평신도들 일곱을 택하여 그 봉사 업무를 집행하게 한 것이다(5절). 곧 일꾼을 발굴하여, 업무부담의 효율성을 기하고, 사도들은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게 되면서, 교회는 안정과 부흥의 시대에 들어갔다(7절). 


2) 북왕국 예언자 엘리야는 왕 아합의 추격을 피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3년 6개월간의 가뭄재앙으로 엘리야도 생존의 위기가 절박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명하신다. ‘이방 땅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거기 머물라’(9절). 그래서 찾아가 만난 과부의 현실은 가난으로 인하여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진 먹거리란 통에 가루 한 움쿰과 병에 기름 조금이 전부였다. 그것도 최후의 식량이었다(12절). 절박한 이들의 만남이었다. 


대책은 무엇이었나? ‘두려워말고 그 마지막 음식을 먼저 당신을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 너와 내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요구였다(13절). ’선 대접, 후 자기‘란 아주 낯선 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정말 비상식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엘리야와 그 식구들 모두가 ’비가 지면에 올 때까지‘(14절),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15-16절). 참 살길이 있는 곳을 제시했다.


3) 흔히 ‘오병이어’라고 알려진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급식(給食)이야기이다. 4복음서 전체에 올려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은 급식 이야기이다(마14:13-21,눅9:10-17,요6:1-13참조). 인간의 영혼과 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복된 통치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인시킨 내용이다. 여기에서의 위기는 예수를 좇아온 큰 무리들이 때가 저물도록 떠나지 않자,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게다가 주님은 제자들이 제기한 방안인,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36절)라는 청원을 거부하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命)하신 일까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37절,상). 제자들이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주님의 입장은 제자들의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헌신이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 지, 가서 알아보라’고 요구하시자, 찾아낸 것이 바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38절).  


☞ 제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은 부족하고 없으니,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하고, 그것도 많고 큰 곳에서 돈을 드려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을 모를 리가 없던 주님의 방식은 ‘바로 너희가 주라(37절)였고, 너희에게 있는 것을 찾아보라’(38절)는 입장이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바로 이런 주님과 자신의 차이와 입장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배우고 익히지 못하면, 평생 가도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크고 많이 있어야만 일할 수 있다’라는 방식은 믿음과 하나님의 개입을 차단하는 심각한 장애물이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내 안의 것을 모두 내놓는 일’은 주님의 개입과 능력을 즉시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통로가 된다. 어떤 통계를 보니, 유능한 사람일수록, 자기에게 있는 특성과 장기를 극대화시켜 일하지, 부족한 것부터 해결하고 일하려고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 교회 개척 초기의 일이 생각난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교회차를 운행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면서 교인들도 참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빈차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운전하는 목사의 마음은 갈수록 분노가 커졌다. 자연히 상처 받은 목사로 인하여 새벾 강단도 힘들어졌다. ‘그래로는 안되겠다 싶어’ 기도가 되었다. 그러자 성령께서 응답해 주셨다. ‘안 나온 신자에게 집중하지 말고, 제 발로 나온 교우들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쏟아 섬겨라’. 차 운행은 중단되었고, 나도 편하고 출석한 그들도 더욱 은혜를 받는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o 둘째는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부족한 것에 매달리지 말며, 그 대신 ‘자신에게 가진 것과 있는 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최고(最高)와 최선(最善)의 양질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라. 물론 요즈음 4차 산업형 인공지능 시대에는 폴리매스(polymath)라는 박식가(博識家)가 단연 인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우물(전문가시대) 생존’에 매달려 산다. 문제는 그런 전문가도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어설픈 것이 문제이다. 진정한 전문가는 자신의 장점으로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발산하는 힘은 찬란하다. 


1) 성령께서도 교회 봉사문제를 풀기 위하여, 외부인사 영입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부족해도 기본에 있어서 성령과 지혜와 신뢰도가 높은 평신도들을 발굴하여 그들로 사도들과 함께 교우들을 돌보게 한 것이다. 만일 보다 유능한 외부 인사를 채용하여 그 일을 맡겼다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역량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발굴하여 지도력을 강화시키면서, 교회는 안정되었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시고 그들에게 최후의 것을 요구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살리시려는 것이었지, 그들을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 모자가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 엄마의 말대로 정말 최후의 만찬(?)으로 생존을 마감했을 것이다(12절 참조).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인을 사랑하신 여호와는 당신의 종을 보내셔서, 종과 모자 모두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확인하게 된다. 


3)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과 축복은 남의 것으로 위기를 해결하려거나 풍부한 물질공세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여 소중한 자기의 것을 드리고, 또 수고와 진한 땀이 쏟아지며, 헌신의 피가 뿌려질 때 얻어질 것임을 일깨우신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일은 예수의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줌으로 자기 백성들의 몸에 생명의 떡과 잔을 먹이신 성만찬(聖晩餐)의 제정을 미리 지시하고, 교회의 성만찬 축제를 지시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o 셋째는 범사(凡事)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균형감 있는 방법과 행동 양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1) 사도행전에서 주의 성령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업무분담을 과감히 취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사도들(목회자)과 일곱 집사들(평신도 대표들)을 두 날개로 삼아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로 도약할 수 있게 하셨다. 그것도 히브리 본토인들인 사도들의 한계를 보완할 지도력을 헬라계 집사들로 전원 채우면서,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도약할 틀을 마련하셨다. 그 바람에 스데반과 빌립과 같은 집사들이 등장하면서, 얼마나 복음의 세계화에 기여하게 되었던가! (행6-8장 참조)


2) 열왕기상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구원의 방식도 서신서와 유사하다. 곧 세상의 환란기에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선지자 엘리야에게만 집중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복종하는 천한 이방인 여인과 그의 자식에게까지도 동일하셨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런 은혜로운 모습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방식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순복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성취되기까지(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분이시다(15-16절 참조)


3) 예수께서 사도들(제자들) 앞에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펼쳐 주신 일에는 앞에서와 같은 양면(兩面)의 의미를 품고 있으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처지에 빠져 살고 있는 무리들을 향한 깊은 연민(憐憫)과 위로(慰勞)의 마음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당신 이후의 사도들이 그런 무리들을 대하게 될 때의 행보와 처신에 대한 목자적 지침(指針)을 담아주시고자 하심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예수 당신의 목양의 방식에 눈과 마음이 열리기를 원하신 것이다. 


목양(牧羊)의 기본은 양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답은 인간을 바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도 자기와 교회가 몸소 감당하고자 주님께 기도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릴 때 해결되는 것임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언제 우리가 강해지는가? 주어진 멍에를 피하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감당하려는 마음을 굳게 품고 행동할 때가 아니겠는가! 



o 지금까지 우리는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셔서 그의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다(사43:19-20절 참조). 따라서 그런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난관이나 곤경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니 원망하거나 좌절하면 안 된다. 그럴 때일수록 엎드려 기도하면서,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것으로 주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부터 구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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