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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7-27 (화) 21:23 2년전 509  

본문) 행 8:4~13, 사 29:13-24, 막 1:21-28


강림 절 열 번째 주일이다. 말썽 많았던 2020도쿄 올림픽이 한창 진행하는 가운데, 장마가 마감되면서 폭염과 열대야(夜)가 연일 기승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대형 태풍도 지나는 모양인데, 우리 한반도는 섭씨 36도를 웃도는 폭염이 한창이다. 농가에서는 이 폭염 때문에 타들어가는 농작물로 인하여, 소나기라도 기다리는 마음이 절실한 듯하다. 이런 중에 코로나19는 델타형이 세계적으로 창궐하면서, 또 다시 지구촌을 걱정 속에 몰아넣고 있다. 


그 바람에 세계에서 코로나 백신접종에 앞장섰다가, 마스크 해방을 선언하기도 했던 나라들에서는 ‘다시 마스크로’가야 한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우리나라 방역당국도 ‘아차’하는 순간에 환자가 1,500명대로 수직(垂直) 상승(上乘)하면서, 또 다시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와 지방까지도 3단계로 격상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어떠한 영역에서도 하늘은 인간의 자만심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피할만한 안전지대도 없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종말(終末)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제는 내 몸과 마음을 어디에다 두고 살아야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진실과 참에다 두고 살 것인지, 아니면 위선과 거짓에다 두고 살 것인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말씀들은 세상의 거짓 풍조와 사조에 마음을 빼앗겨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다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고 살아가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큰 틀에서 보면, ‘쭉정이 인생 살지 말고, 알곡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보인다. 그 중에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자기 인생을 사이비(似而非-pseudo)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이비’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보면,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으로 말한다. 즉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사이비라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요즈음은 진실보다는 사이비가 더욱 판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재판의 판결을 좌우하는 판, 검사들의 문제점들도 많이 목격된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이나 철학들도 넘친다. 거짓 진술로 흠 없는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들도 허다하다. 국가 돈을 타먹기 위해 거짓 엔지오 팀들도 많다. 선거 앞두고 거짓과 가짜 유투브들도 기승을 부린다. 이런 사이비에 빠지면, 그 인생은 비참해진다. 그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영혼을 파는 사이비 종교와 교주들이다. 위선적 설교자와 거짓 전파자들이 가장 경계할 사이비들이다. 이런 현상은 지도자나 선생 소리를 듣는 자들에게서 더욱 찾아보기 쉽다. 참 경계할 대상들이다. 


이런 사이비들로 인한 진짜 큰 문제는 무엇인가? 대체로 이들이 각계각층의 지도급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로 인하여 종교도, 국가도, 그 공동체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거짓과 허세와 위선과 가짜에 휘둘리고 놀아나며 끌려 지내고 살아간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 것들이 없이, 남의 것들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삼고 살아간다. 안전해야할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요즈음 사이비 부모 때문에, 목숨까지 꺾인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이런 사이비들은 마치 진짜와 진리처럼 행세하는 바람에, 노골적인 가짜보다도 더 나쁘고 악하다. 상대하기가 더욱 어렵다. 흔히들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개혁의 주 대상이 거의가 이 애매모호한 사이비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래 진리와 가치를 좋아하지도 않고 좇지도 않는다. 거의가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나 풍조나 타협을 선택하며 산다. 오로지 세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체, 살다갈 뿐이다. 그러기에 엄밀히 말하면, 자기(自己)의 것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게 인생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 안에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가 없다.’ 아니, 예수를 마음으로 불편해 한다. 생각해보라. 요즈음 예수 없는 교회 강단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예수를 제대로 증거 하면, 자기들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교회 부흥은 그토록 외쳐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으로 사는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가 세속의 복 받는 일에는 크게 관심하면서도, 진리를 찾는 일은 매우 힘들어 하는 현실이 큰 문제이다. 교회가 거대한 사이비 신앙집단으로 변질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가르침을 좇아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할 참 이유이다. 


오늘의 세 본문을 다시 보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소위 당신의 백성이라는 대상과 무리와 예배 공동체로부터, 진정으로 당신께 속한 자들을 구별(區別)해 내신다. 거짓과 위선의 신앙의 늪에 빠져 사는 무리들을 당신의 복음 안으로 구원해내시려고 한다. 쭉정이로부터 알곡들을 구별해내시려고 한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잘 듣고, 먼저 내 신앙의 참 모습부터 확인하자. 이제 ‘대충대충 넘어갈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안 된다. 주님의 추수기가 임박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자. 예수와 말씀 안에 있는 참 나의 모습, 내 참 자아를 되찾은 기쁨을 누리자. 


o 먼저 서신서인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이비의 실체(實體)들부터 확인해보자 :


1) 그 때는 첫 순교자 스테반 집사가 나올 정도로 교회 박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행7장), 믿는 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곳곳으로 흩어지는 시기였다(4절). 그 흐름 속에서 이번에는 일곱 집사의 일원이었던 빌립이 사마리아의 성에 들어와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5절). 비록 박해를 통하여 시작된 모습이지만, 모두가 주님께서 예고하신대로 진행되는 과정에 들어간 것이기도 하다(행1:8참조). 


☞ 사마리아는 어떤 곳이었나? 한 때, 예수의 방문까지도 거부했던 곳이었는데(막9:51-53 참조), 이번에는 빌립의 방문을 받았다. 빌립 집사는 누군가?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최근에 집사로 임직한 인물이었다(행6:3,5참조). 그런 그가 사마리아 성의 곳곳을 찾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곳의 남녀가 믿고 다 세례를 받고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12절). 


☞ 그 뿐 아니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표적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는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떠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도 낫는 일까지도 발생한 것이다(6-7절, 3:12-16참조). 실로 예수와 사도들 차원에서 나타날 대 역사들이 빌립의 전도현장에서도 발생했다. 그 결과, 그 성(Sebaste)의 무리들이 한마음으로 빌립의 말을 따랐으며, 그 성에 하늘 구원의 기쁨이 가득했다(6,8절 참조). 


2) 그런데 본문은 한 낯설고 이질적인 인물이 빌립의 전도사역에 따라 붙으면서, 결과적으로는 그 복음의 새로운 판도(版圖)를 어지럽게 한(?) 인물이 되었음을 전한다(9-11, 13절 참조). 그가 누군가? 마술사(魔術師)인 시몬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마술을 행하면서, 순진한 그곳 사마리아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자칭 ‘큰 자’로 행세하는 바람에, 그곳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여 다 그를 ‘신적 인간’으로 간주하면서 그를 쫓아 살아왔던 인물이었다. 


3)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빌립 집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운동과 그 파장은 전체 판을 뿌리 체 뒤흔들었다. ‘무엇이 진짜이며 무엇이 가짜인지’를 새롭게 보여 준 기회가 되었다. 문제는 시몬의 처신이었다. 자기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어서, 이제 ‘예수의 복음과 맞서느냐, 아니면 그 복음에 굴복하느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맞선다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 절박한 상황을 파악한 시몬의 선택은 순발력 있게 결단했다, 그 모습이 어땠는가?


우선은 자기도 믿고 세례 받아 빌립을 따르는 입장을 취하고 나왔다(13절). 그러면서 대중과의 거리감을 해소시키고, 그 세계를 배우고 알아서, 때가 되면 자기의 시간(재등장)을 갖고자 했다. 복음을 이용하려는 태도와 그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으로 모든 상황을 재구성해 보려는 속셈을 품은 변신(變身)을 취했다(18-19절 참조). 오만과 죄악의 기회를 엿보는 자의 모습, 즉 사이비(似而非)인생의 모습을 시몬은 그곳에서 취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시몬의 간계 때문에, 빌립과 사도들이 떠난 사마리아는 또 다시 회색신앙에 빠져들었다 본다. 


☞ 사실 주후 2세기에는 그에게서 유래한 영지주의(Gnosticism)가 있었다. 그들은 철저한 헬라적 영혼과 육체를 분리한 이원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한번 영으로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면서, 몸과 육체의 지상에서의 책임적 삶과 응답에는 철저히 외면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기독교 구원의 ‘이웃 사랑’의 영역을 훼손시킨 최대의 이단이었다. 고대 교회에서는 이 시몬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경계선상에 있는 요술사, 이단가의 아비로 간주하였다.


o  이사야 예언서가 지적한 사이비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했나.  


1)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사이비 신앙인으로 지목하신 대상은 놀랍게도 그의 친 백성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의 사이비 현상은 겉으로는 거의 확인할 수 없었다. 예배도 차질 없이 잘 드리며, 입술의 찬양도 계속하였고, 고백까지도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의 판단은 매우 냉엄했다(13절 참조). 그들의 마음(heart)이 당신에게서 멀리 떠나있으며, 당신을 향한 공경도 그저 전통과 의식에 따른 것일 뿐이지, 진실한 공경에서 나온 것이 못되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다(13절 참조).  


☞ 그들의 행태를 더 살펴보자. 그들도 곤경에 처하면 기도한다. 하지만 그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지, 아니면 기도가 그저 목적을 이루려는 이기적 수단으로 쓰일 뿐인지는 불분명하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정작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을 찾아 구원을 요청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수완을 더 신뢰하고 나왔다(15절).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화신과 같았다. 


2) 예컨대, 30:1-2을 보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자기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행동하였다.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인양 처신하고, 피조물이 조물주인양 처신하는 듯,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듯 처신하였기 때문이다(15-16절). 그 까닭으로 그들 유대 지도자들은 나라의 위기 극복을 여호와께 구하기보다는, 애굽 제국과의 비밀협상을 통하여 국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행태를 저지르고 나온 것이다. 실로 사이비의 전형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분노(앗수르 침공)와 심판을 불러오게 되고 말았다(14하,16절 참조)


o 복음서에 나타난 사이비 신앙인들의 모습도 주목하자. 


1) 가버나움에 있던 유대인의 예배 공동체인 회당에서 발생한 일이다(21절).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신 후, 당신의 선교활동의 거점으로 삼으신 곳이었다(막9:1,마4:13 참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가정이 그곳에 있어서, 주님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하신 듯하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이방 지역인 스블론과 납달리 지역과 인접해 있어서,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쉽게 만나 교제하고 선교할 수 있는 요지였다(왕하15:29참조). 


2) 회당은 예수께서 그곳 사람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선포할 기회를 얻으신 예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뭇 사람을 놀랍게 했고, 권위를 보여 주셨다. 곧 하나님의 힘이 들어나 있었고, 전에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것에다가 놀라움까지 불러왔다(22절). 그런 중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그곳 회당에 자리하고 있었던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께 따지듯 고함치며 말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절). 


☞ 이 귀신은 ‘우리’란 용어를 쓰는 떼거리들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곳에 온 자가 아니라, 그곳 회당에 오랫동안 마치 ‘터줏대감’처럼 위세를 부리면서, 그곳 회당을 진리보다는 관습과 전통에 찌든 낡고 비생산적 회당으로 만들어왔던 사이비 세력을 이끈 악령들이었다. 그런 그가 이전의 그 누구도 능가하는 참 ‘거룩한 자’(나사렛이 나실인이란 용어와 유사)를 정면으로 만난 것이다. 그의 순수함, 거룩함 앞에서 그 더러운 귀신은 두려움에 떨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과 직통하고 계셨기에, 조작과 인위적 행태의 귀신은 쫓겨났다.


3) 예수의 꾸지람을 듣자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고 그 사람의 회복된 참 모습을 목격한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새로 보게 되었다. - ‘이는 어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7절). 그 가버나움 회당 공동체는 비로소 예수를 통하여 열린 새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가 활짝 열리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 이런 가버나움 회당 공동체의 현상은 결코 그 곳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숱한 우리 교회 공동체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진리의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거의 이런 류의 떼거리 귀신들이 교회의 기득권을 장악하여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영혼들이 구원을 못 받도록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은 어떻게 깨어 대처해야할 것인가? 



o 두 가지 접근을 권하려 한다. 하나는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와 그의 말씀에 보다 가까이 나아가도록, 읽고 배우고 좇아 행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 빌립 집사가 잘 보여 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우리도 구원의 복음이 주는 기쁨을 회복하자. 이를 위해 말씀의 묵상(默想)의 힘을 강화하자. 우리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믿음의 후예들임을 기억하며 깨어서 살아가자. 


또 하나는, 교회 안팎과 우리 주변에 있는 사이비성 교우들이나 집단에 대한 경계와 거리두기를 잘하며 살아가야겠다. 여기에는 성령과 말씀의 힘을 강하게 구하고 의지하여야 가능하다. 참과 위선의 분별력을 높여야 한다. 지금은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와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범람하는 세대인데, 이를 경계하여야 한다. 항상 말씀에 겸손하자. 심령이 가난한 자로 늘 말씀으로 새롭게 살고자 하는 갈망하는 영혼으로 살아가자(사29:19-20,22-2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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