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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7-07 (수) 10:08 2년전 419  

본문) 엡 1:3~14, 사64: 1-9, 막 13:28-37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늦게 찾아 온 장마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면서 지구촌 처처에서 이상(異常)기온에 따른 재앙들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산사태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름에도 늘 선선한 날씨가 지속된 북미 서부지역은 고기압의 정체로 뜨거운 공기가 그 지역에 갇히는 ‘열돔’현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기온이 40-50도를 훌쩍 넘게 되면서 벌써 700여명이 돌연사하기도 했다. 기후위기의 징후들이 무척 다양해진 것이다. 


그런 중에서 반가운 소식도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제68차 이사회에서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우리 대한민국의 지위를 기존의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시킨 일이다. 그 바람에 세계의 선진국 그룹은 한국을 포함하여 32개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선진국으로의 지위 변경의 건은 1964년 운크타드 창설 이래, 우리나라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로부터 성공한 나라로 공인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양측의 협력과 연합을 견인할 모퉁이 머릿돌 위치에 들어선 것이다. 책임도 커졌다.


(참고로, 국제통화기금(IMF)의 발표를 보면, 우리나라는 지난 해 국내총생산(GDP)이 1조5512억 달러로 세계 10위에 올랐다. 세계무역기구(WTO)집계로 보면, 우리 수출은 지난 해 5125억 달러로 세계 7위이다. 그리고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은 3만1497달러로 세계 26위였다). 


마침 우리나라는 내년 봄에 있을 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당에서 후보들을 선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훌쩍 성장하고 커진 우리나라를 제대로 섬길 지도자를 제대로 뽑는 일이다. 우선은 국민들의 자존심을 고양하고, 위상에 걸 맞는 국민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자가 선출되도록 온 국가적 역량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한 그룹의 수장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품고, 민족과 세계의 내일을 밝게 열어갈 리더십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교회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졌다. 정치가 감당 못하는 영성과 지혜를 제공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우리 교회에게는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교회와 성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처럼 나약하고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주일(강림 후(6))에 주님께서 소개하셨던 바, ‘노아와 롯의 길’에 대한 묵상과 연구가 보다 강화되어야 하겠다(눅17:26-29절 참조). 


요즈음의 강림절기 말씀들은 주의 날을 대비한 종말(終末)신앙에 대한 증언들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 주일을 이런 성격의 말씀들을 계속 주신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우리는 험난하고 치밀하게 그날과 그때를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기에 종말에 관련된 새로운 주제들도 매 주간 쌓여간다. 그렇다면 오늘은 건강하고 올바른 종말신앙을 위하여 어떤 차원의 말씀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의 시간대인 영원(永遠-Eternity)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확실히 소화할 수 있을 주제이다. 예정론(豫定論)이다. 사실 우리 장로교 신학의 원조인 J.칼빈의 신학에서 이 예정론은 신학의 핵심적 위치를 점하는 부분이다. 어떤 이는 구원으로 예정되었고, 어떤 이는 버림으로 예정되었다는 식의 ‘이중(二重) 예정론’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한데-, 이 예정론은 오해와 함께 그 부정적 파장이 컸다. 운명론(運命論)과 같은 교리로 비쳐질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혼란은 그의 신학자 칼 바르트(K.Barth)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은총의 선택론(選擇論)’으로 잘 정리되었다. 그의 선택론은 교의학(2/2)의 신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증언한 하나님의 예정론의 핵심 부분을 본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보자.-‘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12절).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한다. 무려 4차례를 언급하였다(4,5,9,11절). 여기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원칙(原則)을 근거로 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조물주이기에, 그의 만물에 대한 절대 주권(主權)을 인정해야함을 기초로 한다. 둘째는 그의 예정 혹은 선택의 기초는, 전적으로 세상 죄를 씻기 위하여 성육하여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임을 원칙(原則)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매 구절마다 올라와 있고, 그것도 무려 10번 이상이나 반복해 있다. 셋째는 그 선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讚頌)하게 하고자 함에 있다. 이 부분은 서신서 본문의 처음과 나중의 내용들로 올라와 있다.(3,6,12,14절 참조).  


그런 점에서 바울의 예정론은 철저한 그리스도를 중심한 은총의 선택론이다. 서신서는 우리의 정체성이 창세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음을 말한다. 구약의 본문은 그런 은총의 선택을 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에 빠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 앞에 설 수 있는 비참한 처지를 탄원하면서, 더 큰 자비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복음서에서는 임박한 그 날의 징조를 분별하여, 늘 깨어 준비하고 사는 삶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O 에베소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이지만, 유대인 디아스포라들도 함께 모인 교회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한 사도 바울은 이 두 그룹의 온전한 하나 됨과 연합만이 참된 교회의 모습을 이루면서, 교회의 주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 모두의 시선(視線)을 인간의 수고에 따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원래적인 예정과 그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으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으로서, 이런 연합 교회가 가능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3-6절).  


1) 바울은 그곳의 모든 성도들과 교회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복(福)을 받은 대상들임을 선포한다(3절). 그렇다면 그 복은 대체 어떤 복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창세전(創世前)에 이미 우리(교회의 구성원들)를 예정하고 택하셔서,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기쁘신 뜻대로,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아들(자녀)들이 되게 하신 일이었다(3-5절 참조). 


☞ 이는 지상의 교회가 처한 영적 위치를 담대한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어서, 매우 주목되는 증언이다. 그리고 낮고 천한 피조물인 인간을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러들이셔서, 그들을 당신의 아들(자녀)로 삼으시는 복을 베풀어 주셨다는 선포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구원 문제와 직결되는 일도 되기 때문이었다. 본질상 자녀를 버릴 부모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2) 하지만 바울은 그게 가능하였던 일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확실하게 밝힌다. 이 일은 본래부터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류의 참 구원자로 설정하심에 의한 것이었음과 함께, 그가 이 땅에서 보이신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공동체 무리들(교회들)과 피조물들에게도 당신의 아들에 준(準)하는 은혜와 기업을 베풀어 주시리라는 계획(plan)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0-11절, 롬8:29-30참조). 거기에는 물론 그 어떠한 인간들 사이에 차별 행위도 있을 수 없다. 유대인-이방인, 남-여, 빈부귀천 모두가 용납되었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창세전부터 참 구원자의 모델로 예정되신 일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쏟아 주셔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속량(贖良), 곧 죄 사함을 받게 된 일로서 입증되었다고 밝힌다(7절). 동시에 그런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초(超)시간적인 구원의 의지가 우리 인류사에 실현된 일이었다. 그를 근거로 하나님은 인간들을 죽음의 나락으로부터 해방하시는 은혜까지 베풀어 주신 것이다(롬3:24,고후5:19-21,골1:14 참조). 


4) 그뿐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은 유대인의 표적 중심이나 헬라인의 지혜 중심의 차원과 하늘과 땅의 차원의 모든 것들을 넘어서, 온 인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들을 거침없이 다 들어낼 수 있게 한 예정이기도 하였다(고전1:22-24참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統一)되게(=화해(和解)되게) 한 것이다(7-10절 참조). 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기독교와 교회가 지금까지 그 어떤 종교와는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며, 구원 종교로 우뚝 존재할 수 있었다.  


5) 바울은 에베소교우들에게, 아니 오늘의 우리들 모두에게 강조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11절).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고 나오자, 주께서 성령을 보내어 인(印)쳐주신 일은, 바로 성령이 친히 우리 미래의 구원을 보증(=선불금(先拂金))하신 일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13-14절, 고후1:22참조). 


6) 그러면서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지상의 온 교회들 모두를 격려한다.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자’는 것이다. 그의 선하신 예정과 그의 뜻에 의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선택,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을 죄인인 우리가 자녀로 택정을 받아서 그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은총의 하나님께 찬양하자고 외친다.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맛보고 그를 찬양하게 하심이 그의 예정의 종점임을 새롭게 일깨우면서 말이다. 그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내는 지혜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런 그의 외침과 격려가 어찌 우리에게도 와 닫지 아니하겠는가!


o 구약의 예언서는 범죄의 깊은 늪에서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빠져나올 처지가 못된 곤경의 인물이 뒤늦게 깨닫고 발견한 자비와 능력의 하나님, 아니 자신들의 참 아버지이신 여호와를 향하여, ‘오직 은혜로’(1절) 새롭게 자신의 곤경에 개입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는 내용이다(시18:7-15,77:16-18,144:5-7,삿5:4-5참조). 이런 모습은 마치 누가복음의 탕자(蕩子)의 고백이요 외침의 소리와 흡사하다(눅15:11-21참조). 따라서 이런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그 회복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품어야할 마땅한 자세요 기도의 모범이다. 


1) 예언자는 주님의 강림이 주의 원수들과 이방 나라들을 떨게 하고, 또 인간들이 생각할 수 없는 두려운 일들을 안겨주셨던 때와 일들을 추억한다. 그것도 오직 주님만을 앙망(仰望)하는 자, 곧 기쁘게 공의를 행하고,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찾아오셔서, 그런 외세들을 두려워 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대(善待)를 기억하고 있었다(1-5절,상). 


2) 그런데 자신들은 범죄하여 주님의 진노를 받았고, 그것도 이미 오래 지냈는데-,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는 자신들의 실상(實狀)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7절).  


3) 그러면서도 예언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본래적인 관계 때문이다. 무슨 관계 때문인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자신은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었다(8절). 그 점을 다리삼아, 오직 은혜로 새롭게 개입해 주시길 호소할 수 있었다(시18:7-15참조). 


4) 그것은 그만큼 당시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패하였나이다’(10절 참조). 결국, 그들은 깊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9절). 이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얽힌 문제를 풀 지혜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할 탕자의 마음과 고백이다. 


o 복음서는 세상 최후에 일어날 현상에 대한 제자들 네 명(베드로-요한-야고보-안드레)의 질문에 대하여, 주께서 답변하신 내용이다. 제자들 역시 당시의 사람들의 관심사처럼, 그 날과 그 때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고 답하셨다(32절). 주님은 때를 사전에 계산해 내려는 모든 인간적 시도들 속에는, 다 불순종과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으로 보셨다. 


1) 무화과나무 비유는 전 공관서에 나온다(마24:32-36,눅21:29-33). 팔레스틴에서의 무화과나무는 대부분의 상록수와는 달리, 계절을 탄다. 가을이면 낙엽으로 떨어졌다가, 봄이면 가지마다 수액이 올라 잎을 내기 시작하면서,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계절을 분별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도 가까이 왔음을 잘 알고 깨어있기를 바라셨다(28-29절).


2) 본문에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의 흔적과(30절), 머잖아 닥칠 거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최후의 그 날에 대한 예고를, 주의 말씀의 전적인 권위를 담아서 함께 전한다(30-32절, 벧전1:24-25참조). 주의 선포된 말씀은 최후에 심판의 척도가 될 것이다(8:38절). 


o 결론은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오실 그 때를 알아내려는 유혹을 버리고, 평소(지금 여기서)를 늘 깨어서 사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에게 집안 살림을 다 맡기고 먼 타지로 떠났던 주인이 홀연히 예기치 않은 시간에 귀가하듯이 주님도 오실 터이기 때문에, 그 때에 전혀 당황하지도 부끄럽지 않게 주인을 맞이하도록, 철저히 준비된 종의 모습으로 깨어 살아가는 모습이다(33-37절). 그래서 영광과 찬송을 주인에게 올리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종과 백성으로 선택하신 주님을 크게 기뻐하시게 해드리는 것이다. 다함께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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