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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21-06-29 (화) 14:04 2개월전 102  

본문) 벧후 3:8~13, 습 1:14-18, 눅17:20-37


강림 후 여섯째 주일이다. 7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일기는 여전히 무덥고 습하다. 세계는 코로나19의 변종(變種)들이 창궐하면서 또 다시 위협에 휩싸이고 있다. 이런 중에 며칠 전, 미국의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서프사이드 아파트 단지가 일시에 무너져 내려서 대규모의 참사가 발생하였다. 현재까지는 159명의 실종자를 냈다는 데, 옛날의 우리나라 삼풍백화점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계적인 대 휴양지에서의 참변을 보면서, 인간의 진정한 피난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 묻게 된다. 


이런 중에 우리는 오늘 맥추감사절를 맞이한다. 본래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감사절이 있었다. 밀보리 등의 밭곡식의 첫 열매를 추수하여 드리는 맥추절(=칠칠절/오순절)과(출23:16), 포도와 올리브 열매를 추수하면서 가을에 드리는 초막절이다(레23:33-43). 이러한 감사 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땅의 소출로 자신들의 생명을 위한 먹거리를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에 힘쓰며 살았다. 


지금은 비록 우리 생존을 위한 기업들이 농업만이 아닌 숱하게 많은 기업들로 다변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들의 생명의 먹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품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펼쳐주신 대지와 그 속에서 생산되고 공급된 수많은 천연 자연식품들과 그로 만든 음식물들이다. 우리 몸은 근본에서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아닌가!(창2:7).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행위는 이런 생태적 존재론적 삶에 순복하는 일이기에, 계속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종말의 시대, 곧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시대를 극복해낼 가장 생산적인 영적 태도는 바로 감사하는 삶이다. 비록 환난과 곤경과 시련이 몰아치는 때에도, 그래도 원망과 불평과 원한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감사하는 마음 속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인생이 되는 것, 곧 ‘감사의 인격화’가 요긴하다. 시편의 시인의 고백이다 -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참조).


지난 주일에 이어서, 금주에도 주어진 세 본문 말씀들은 머잖아서 도둑 같이 맞게 될 주의 날은 과연 어떤 날이며, 우리가 그 날을 대비하여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갈지, 그 방안을 말한다. 먼저 서신서는 그 날이 우주적(宇宙的) 재난으로 올 것을 예고하였고(10-11절), 구약은 그 날이 참혹한 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피와 살이 터지는 참상으로 올 것을 예고하였다(17-18절). 


그러면서도 복음서와 서신서는 우리들에게 그 날의 출구(出口)도 열어준다. 우리의 시선을 그런 안팎에 가해진 최후의 심판에서도 끝내 살아남았던 구약의 주인공들을 보게 해 준다. 

☞ 방주의 노아(27절)와 소돔 멸망 시의 롯(28절)이다. 그들은 모두 그 타락과 죄악의 시대에 얽매이지 아니한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삶에 담고 살았던 주인공들이었다(26-30절 참조). 서신서에서도 그런 최후의 심판을 불러 올 ‘주의 날’을 안전하게 맞게 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 지’를 깊이 있게 제시하여 주었다(11-13절 참조). 


☞ 문제는 지금이 주님께서 예시하신 노아와 롯의 시절과도 너무나 흡사한 때라는 점이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갔고(27절), 롯의 가족이 소돔에서 빠져나가면서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면서 그들에게 쏟아질 때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으며 살았던 바로 그 모습이 지금 현재와도 너무도 흡사하단 말이다(28-29절 참조). 이 점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지금이 바로 ‘종말의 종말’에 아주 가까이 들어가 있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위 말세지말(末世之末)이랄까-! 사실 숱한 인류학자들이 임박한 지구의 종말을 말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온도상승으로 인한 지구촌의 변화, 환경 및 쓰레기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지구촌 전반에서 역동하는 지진, 화산폭발, 변종 바이러스 창궐 등등-, 기타 걷잡을 수 없는 생태계 파괴요인들이 급상승 중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이다(살전5:6-8).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할 때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들을 보자


o 초대교회 당시에는 ‘임박한 종말론’, 곧 자기들 세대에 금방 주님이 오실 것이다는 종말론적 믿음이 대세(大勢)였다. 바울 사도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표, 즉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표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신자들 중에는 종말이 지연(遲延)된 이유에 대하여 심각히 회의하는 경향들이 커졌다. 잘 믿는 이들이 자기들 앞에서 주님을 뵙지 못하고 땅속에 묻히는 일에 당황했던 것이다. 


1) 자칫 시험에 들 수 있는 일이어서, 그것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神學的) 입장에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베드로는 시90:4에 나타난 하나님의 시간관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대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8절)고 당부하고 나온 것이다. 


이 말씀도 사실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겪고 있는 시간대 안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 안에 모든 시간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대 안에만 계신 분이라면, 그는 그 시간대(과거-현재-미래)에 제약을 받아서, 우리 인간처럼 세대차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서 모든 세대에 적합한 신이 될 수 없고, 그러기에 당연히 영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모든 시간대가 있다는 것이라면, 그는 영원이라는 세계의 주가 분명하고, 또 그 세대와 환경에 맞도록 당신의 경륜들을 펼쳐 가시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시간대에서 아주 자유하시기에, 인간의 어떤 시간대에나 역사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항상 어느 때에도 현재나 지금처럼 개입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통전(通典)하여 이끌어 가실 수 있는 것이다. 초(超)역사의 존재이기에, 시간- 역사에 얽혀 산 인간을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주목하라. 그런 하나님께는 태초로부터 스스로 세우신 원칙과 질서와 규율이 있었다. 결코 마구잡이로 우리의 역사를 이끄는 분이 아니다. 비록 그 어느 시기와 상황에만 국한될 한시적인 제도나 법은 인간들의 몫으로 넘기시지만, 다만 당신의 의와 뜻과 사랑에 적합할 원리-, 곧 진리(眞理)를 앞세우셔서 온 인류와 천지만물과 우주만물을 영원토록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원리는 당신이 독보적(獨步的)으로 보유하고 집행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그를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의 영원(永遠-Eternity)을 대변하는 진리와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 진리의 실체가 바로 예수이시고(요18:37참조), 그가 제시하신 말씀들이다. 그중에서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영역은 그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갈 무대이다. 따라서 그 나라는 모든 성도들, 특히 종말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가장 가슴에 담아 두어야할 영역이다.   


2) 사도는 도둑처럼 찾아올 ‘주의 날’에 나타날 놀라운 파괴적 현상을 전한다. 마치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으로 비유한다(사65:17,66:22참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세상 구성의 기본건축자재인 원소)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며,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예고한다. 우주적 대재앙이 분명하다(10,12절,마24:29,살전5:2,사24:19등). 


3) 이런 엄중한 심판의 날이기에, 그것을 인간에게 집행하실 주님으로서는 참고 또 참으며, 한 인간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신다. 그게 그토록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이다(9절). 우리가 그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지연을 어떻게 볼까? 


☞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이다. 타인과 세상을 위하여 선행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면 이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11절) 


4)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한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날이 오기를 사모하자(12절). 무엇보다도 행실에서 거룩하고 경건함으로 옷 입어야 한다(11절,하). 공포와 염려에 빠져 살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절,상). 의만 있는 새 창조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13절, 계21:1,27,사60:21,롬8:21, 참조). 


o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바냐를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시리라고 예고하셨던 부분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항상 자신들의 삶 주변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신6:1-9),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범죄 함으로서 결국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거기에 따른 몇 가지 교훈들은 이것이다 : 


1) 여기에서의 ‘여호와의 날’은 어느 날인가? 득달같이 다가올 날이다. 용사가 자신의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어서 슬피 울 날이다(14절).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칠 흙처럼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가 무너지는 날, 고난에 빠진 인간들이 맹인처럼 행동하는 날이다(15-17,상). 


2) 처참한 전쟁으로 살과 피가 터지는 날이기도 하다(17절,하). 그들이 매달렸던 은금(銀金)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날이며, 여호와의 질투에서 나온 분노에 의하여 온 땅과 주민들이 놀랍게 멸절하게 되는 날이다(18절). 실로 얼마나 참담한 마지막 날인가-! 


3) 그러면 이런 치명적인 멸절을 당할 대상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전쟁이 나면, 그의 대적들이 멸망을 당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실재로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던 그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멸절당할 대상이었다(암5:18-20절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였기에, 그런 응징을 당하게 된 것이다. 

 

4)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의 그 근본정신은 외면한 체,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이런 자들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므로, 영혼을 살찌울 뿐 아니라 그것을 삶의 척도로 삼아 결코 정도(正道)에서 벗어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시19:7-10).


o 복음서는 ‘내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다른 특정한 곳에서 찾으려거나 또는 어느 특정한 지정된 시간에서 맞이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쓸데없는 관심들을, 차단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20절). 사실 당시에도 일부 거짓 영들은 ‘그 날과 그 곳’을 ‘이곳과 저곳으로’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백성들을 계속 오도(誤導)하고 있었다(23절 참조).  


1) 주님의 단호한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within you) 있기 때문’이었다(20,후-21절). 예수의 이 말씀은 그 나라가 이미 당신 안에서 시작되었음과 그런 당신과의 관계와 좇는 삶과 따르는 행동과 사고와 가치 등을 통하여 세상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나라임을 말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에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룩이 온 밀가루에 퍼지는 것처럼, 서서히 이루어지다가(마13:33)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임한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나라이다(마1:15). 


2) 그걸 모르고 때와 장소만 찾으려는 모습은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지금 시작된 나라를 놓치게 되고, 나중에는 ‘닫힌 문’이라는 절벽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25:10-12참조). 그러기에 그 나라에 관심 있는 자들은 항상 그 나라는 ‘현재적’이기에(10:21,11:20,12-19참조), ‘지금 여기에서’ 포착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한다(6:46-49, 8:21,11:28,14:25-35참조). 


3) 이 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평소부터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를 잘 보전하고 살아온 신앙의 모델들 두 명을 구약의 위인들 중에서 발췌하여 소개하신다. 누군가? 바로 노아(Noah)와 롯(Lot)이었다. 그들이 그 시대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보여주었던 특출한 신앙의 모습은 ‘현재의 삶에서 무엇이 절박하게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공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이었다(26-29절 참조). 


그들은 아무도 종말을 예측하지 않고 오직 먹고 살고 즐기며 지낼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말씀과 순종의 삶)와 그 가치를 최우선으로 선택하여 살았다. 바로 그런 자들이었기에, 홀연히 찾아온 홍수의 심판과 불과 유황의 심판에서도, 마치 벼락과 도둑처럼 찾아온 위기의 순간에도, 아무런 위협과 고통도 없이 생명과 가족을 보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창7:1,마24:37-39, 창19:15,살전5:3-5참조). 그 중에서도 ‘뒤를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한 롯의 처는 엄히 제외되었다(31-34절). 구원은 싸잡아 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 신앙에 의한 것임을 확실히 선포한 내용이다. 슬기로운 5처녀의 모습이 답이라 보인다.  


o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깨어 살아가야할 종말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다. 우선 내 안의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점검하자. 베드로의 권면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선행되어야 하고,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또한 깊어야겠다. 벼락치기 구원은 없다! 심판의 주님은 결코 허술한 분이 아니시다. 롯의 처를 기억하자. 주님의 엄중한 구별을 피할 수 없다. 노아와 롯처럼, 세상의 천박한 문화에 부화뇌동하거나 기만당하거나 휩쓸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속의 힘을 극복할 경건과 말씀의 힘을 키워가자.  코로나19 같은 세상적 재앙은 끝난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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