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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6-23 (수) 12:21 3개월전 133  

본문) 살전 5:1~11, 욜 2:1-11, 막 4:21-34 


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날씨도 본격적인 무더위에 접었다. 한낮의 움직임에는 땀이 흐른다. 이런 더운 날씨에 건강과 함께 몸의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잘 견디는 대응 자세가 필요하다. 최소한 8월말까지는 더욱 그렇다. 지금을 소홀히 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다가올 가을을 건강히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건강을 살려야, 미래의 건강도 보장됨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이런 ‘견디는 일’이 날씨와 건강에만 관련된 일인가? 결코 아니다. 입시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더욱 절실할 것이다. 생업을 위하여 맡은 분야에서 종사하는 모든 생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방에 종사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모든 산 자에게는 잘 견디는 일은 큰 덕목이다. 만일 자기가 선 자리를 못 견디면 어찌 될까? ‘패배자, 낙오자’란 오명만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견딤의 덕목 여하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 때문에, 성경은 ‘오래 참음’(인내-忍耐)를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 소개한다(갈5:22). 대부분의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함의 원인은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예수의 십자가에 내던지지 못해서 발생한다. 하지만, 진정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자기부정과 대속적 사랑의 정신으로 강인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선을 드러낸다. 놀라운 기적과 새 역사를 창조해 낸다. 그렇다, 경거망동 속에서는 건질 것은 하나도 없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 기독교 신앙 영역에서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종말(終末)신앙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종말 신앙은 무슨 믿음을 말하는가?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믿고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리며 사는 신앙이다. 그러기에 이 신앙에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됨을 말한다. 동시에 도중에 변절(變節)되거나 도중하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변함없이 참고 견디어야 됨이 강조 된다.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여러 신앙의 메뉴들 중에서 가장 힘겨운 신앙이 바로 이 종말 신앙이다. 순간의 결단에 따른 순교(殉敎)보다도 더 힘겨울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신앙은 언제까지든 믿고 기다리되,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변절하지 않으며, 견디며 기다림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되기 때문이다. 곧 시간과 세월과의 싸움, 환경과 역경에서의 싸움에서 견디어내야 되기 때문이다. 


종말 신앙이 힘겨운 이유는 이 신앙에서는 항상 ‘지금 여기에서’(Here & Now)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무너진’ 과거만의 경력이나 화려한 업적, 신앙 유산들은 아무 쓸모없고, 또 ‘살아 있는 지금’이 없이 ‘앞으로 잘 하겠다’는 그 어떠한 다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이 신앙에는 지금이 살아있어야만 이전의 것이나 미래의 것 모두가 값진 것들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또 있다. 각종 고도의 과학화되고 편의주의 적이고 인본주의적 세상 환경 속에서, 마귀들도 고도화되고 지능화되며 집단화되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을 향한 그들의 도전 역시, 마치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고 덤벼든다. 고도의 힘과 지혜로 우리를 유혹한다. 예수 십자가의 고난이나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말고, 부디 몸과 마음과 영혼을 편하게 살라’는 것이다. ‘전도나 헌신이나 사랑의 수고에 신경 쓰지 말고 살라’고 한다. 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들이 주는 그들의 복음의 매력(?)도 대단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종말 시대에서 그런 마귀의 세속적이고 육체적 공세를 이겨낼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지금은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할 때이다. 세상이 주는 편의와 안식에는 인간 실존의 핵심 영역인 영혼과 정신에게 주는 양식은 없기 때문이다. 육신과 몸은 물질적 풍요에 빠질수록 악마의 유혹에 취약하다. 죄악과 향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전(前)에도 전한 바 있다. 에덴의 타락은 물질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니라 풍요에서 왔다. 잘나가던 왕 다윗의 범죄도 정적에 쫓기고 전쟁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안전하고 풍요해졌을 때에 일어났다. 


그것이 세상과 인간의 실존이다. 이 점을 통찰하신 예수께서 오죽하면 선포하신 첫 복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눅6:20)라 하셨을까! 착각하지 말자. 과학화되고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인간 생활이 극도로 편의주의적이 되면 될수록, 몸은 나태와 방종에 빠져들면서 우리 영혼은 고갈에 빠져든다. 잘 살펴보라. 왜 그렇게 소득도 늘고, 학력도 높아지며, 생활수준도 높아 가는데, 국민들의 불만과 자살과 성적 타락과 방황들은 더 깊어 가는가? 


이유는 그런 비(非)인격적인 것들로 인격적 존재인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그릇을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참된 만족과 위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진 타 인격체와의 깊은 접촉과 교제에서만 얻을 수 있지, 비인격적인 사물과 대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필요한 에너지는 우리를 만드시고 생존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요 믿음이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도 그의 말씀에서 나온다. 그 말씀에는 기쁨과 보람의 샘물이 넘친다. 


이제 종말론적 신앙의 지침(指針)들을 제공하는 오늘의 지혜와 진리의 말씀들을 경청해 보자. 세 본문들은 모두 종말론의 최후의 지평(地平)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신서에서는 ‘주의 날’로(2절), 구약 예언서에서는 ‘여호와의 날’로(1,11절),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26,30절)로 각각 제시한다. 이것들은 같으면서도, 그 역할에서는 다르다. 그 내용을 보자.


o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릇된 재림관과 그로 인해 발생한 무질서한 생활상으로 인하여 성도들 간의 갈등과 긴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곧 신도들 중에서는 주의 재림이 자기들 생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생업이나 가업까지도 아예 포기하면서, 오직 오실 주님만 기다리며 살겠다고 하는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살전4:10-12절 참조). 그 바람에 후유증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자,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부담과 짐이 되었다. 해당 가정은 물론, 이웃 성도들 사이에 계속되는 신세 짖기에, 시험 드는 사례들이 많아졌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4:11)라고 권했을까? 


그런 재림신앙이나 종말론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이기적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이웃에게 자신의 식사문제 해결을 의뢰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업도 포기하면서 가족들을 가난하게 하였으며, 오실 주님에게도 자기가 설정한 그 시간에 오시기를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종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어야함을 절감하면서, 본 서신을 교회에 보낸 것이다. 


1) 주님이 오실 때와 시기, 곧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언제를 말하는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오시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기에, 주님이 예전에 밝혀 주신대로(마24:43-44참조), 바울은 그 시간을 ‘밤에 도둑 같이 이르리라’고만 밝혀 주었다(2,4절). 도둑은 특징은 무언가?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존재이듯, 주님 다시 오심도 그렇게 오실 것이라고 말했다. 


2) 하지만 힌트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의 재림은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면서 마음 풀고 여유를 부릴 때이고, 임산부에게 예기치 아니한 시간에 해산의 고통이 찾아옴과 같을 것이며, 홀연히 임한 멸망이어서,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때라는 점을 귀띔해 주었다(3절). 그렇게 주의 날을 맞이할 자들에게 그 날은, 심히 두려운 날이요 심판대에 오르는 날이 될 것이다. 


3) 하지만 그 날을 전혀 다르게 맞이할 대상들이 있다. 바로 빛의 아들이요 낮의 자식들인 그리스도인들이다(4절). 그들은 그날을 저주와 심판이 아닌, 위로받고, 영광을 입고, 영접을 받게 되는 날이 된다. 곧 그들에게 그 날은 구원(救援)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9-10절)


4) 그날을 ‘구원의 날’로 맞이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들은 무엇이었는가? (5-8절 참조)

☞ 마음과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죄의 멍에를 매지 않고 산 빛과 낮의 사람들이었다(5절)

☞ 다른 이들처럼 ‘자지 않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산 사람들이었다(6,8절, 마25:1-13). 

 -‘자지 않고’란 말 ‘카듀도멘’은 도덕적 타락, 영적 나태, 그리고 무관심에 빠짐을 의미한다. 

 -‘정신을 차리다’는 것은 ‘self-controll’의 의미를 담은 내용으로, 자기 성찰을 잘한 것이다. 

☞ 낮(진리)에 속한 사람답게, 늘 자신을 돌아보고, 가슴(마음)엔 믿음과 사랑의 흉배(胸背)를 붙이며, 머리(의식)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산다(엡6:14-17참조). 


5)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교회의 몫이다. 종말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로서, 서로 권면하고(파라칼레이테), 서로 덕을 세우기(오이코도메이테)를 계속하며 사는 일이다(11절). 이 내용은 성도들이 서로를 아끼고 지켜내기 위하여 충고보다는 격려를, 꼬집고 질책하기보다는 인정과 세워주기를 지향하는 공동체를 세워가야 함을 말한다. 이런 따뜻한 영적 환경이야말로 건강한 종말신앙을 함께 누려야 할 성도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자산일 수밖에 없다. 


o 선지자 요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 예언은 당시 계속된 가뭄과 더불어 닥친 극심한 메뚜기 재앙을 보면서, 그는 이를 하나님께서 온 누리를 심판하실 조짐으로 본 것이다(1:2-2:1). 그의 환상에서 메뚜기 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11절) 무시무시한 적들의 무적의 부대가 되었고, 메뚜기 재앙은 마지막 큰 심판의 상징물이 된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얼마나 두렵고 피할 수 없는 날인지를 강하게 일깨워 주려한 것이다.


☞ 그러면서 요엘은 그들 범죄한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 의하여 얼마나 참담하게 유린당할 것인지를 경고하려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의 날의 두려운 상황을 알리고자 한 복합적인 성격도 담고 예언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알림을 통하여, 그러기에 ‘늦기 전에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절박한 메시지도 동시에 담고 있다(12-14절 참조)


1) 재앙과 심판을 시작하는 여호와의 날은 시온에서 울린 나팔 소리로 시작되었다(1절). 보통 나팔은 전쟁, 예배, 절기 때를 개시하는 신호탄인데, 이런 시작이 시온에서 올린 나팔이라는 말은 곧 심판의 주체가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의미한다. 악하고 어둠에 빠진 더러운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 무섭게 개시되었음을 말한다. (이는 코로나의 출처도 생각나게 한다-).


2) 그 잔인한 군사들의 공격은 마치 메뚜기떼들의 공세와 흡사했다. 팥중이에서 메뚜기로, 느치로, 황충으로 그 세력과 기세를 확충해가면서(1:4참조), 그들은 사자의 이빨을 가지고 바닥이 날 때까지 대지와 곡물과 식물들을 먹어치웠다. 그들의 산업 기반이 포도나무-무화과나무를 바닥내 버렸다(1:7참조). 사람, 식물, 짐승등 모두가 그 압도적이고 정교한 메뚜기 공세를 피할 수가 없었다(3,7-9절,하), 백성들은 그 앞에서 질리고 낯빛은 하얘졌다(6절). 실로 땅이 진동하며 하늘도 떨고 해와 달은 캄캄하고 별들도 빛을 거둔 절망의 시간이었다(10절). 


3) 오직 들리는 것은 그들 앞에서 진두지휘하시는 천둥소리 같은 여호와의 소리뿐이었다. 크고 심히 두려워 아무도 당할 자 없는 바로 압도적 현장이었다. 여호와의 날의 실상이다(11절). 그러면 그런 공포와 최후의 심판의 날을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야 할건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 점에서 피난처 되신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만 한다. 


o 복음서는 최후의 대안(代案)과 출구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말한다(26-30절). 그것도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나사렛 예수로부터 시작된 그 나라의 백성들이 되어 살며, 그 시민의 자격을 취득하여 사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앞에서 말한, 심판과 재앙의 날인 ‘여호와의 날’과는 또 다른 차원의 대안적 구원의 세계이다. 


이 나라 백성이 되고, 그 나라의 주권과 시민권의 권리를 폭넓게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언제 오실지 모를 재림(再臨)의 주를 맞이하고자 기다리는 우리들에게는, 곧 종말 시대를 살아갈 모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에게는, 꼭 확보해야할 최후의 보루와 보호막이기도 하다. 


☞ 이것은 요즈음 코로나19의 재앙을 극복하려고, 전 인류가 코로나 백신들을 접종하는 일과 흡사하다. 일종의 최후의 심판과 재앙의 그 때를 면하게 될, ‘어린 양의 피’처럼 효력을 드러낼 생명의 백신(출12:7)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영역에서 찾자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영원한 나라에 입국할 때 적용될, 천국 입국을 위한 여권(旅券)과 비자와도 같다. 그 주의 나라 백성의 증표가 무엇일가? -‘예수의 피‘, ’그의 고난을 공유하며 사는 삶의 흔적‘이다.


1) 그 나라 백성은 세상의 등불이요 빛으로 오신 예수 앞에 모이고, 그 빛으로 살아간다. 동시에 마음을 활짝 열고 그의 말씀과 지침을 좇을 준비를 하고 사는 무리들이다(21-23절 참조). 그러기에 그는 진리와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되는 영적 부자를 목표로 살아간다(24-25절). 


2) 그 가슴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그 삶 안에서 점차 자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간다. 처음에는 싹으로,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 다음에는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간다. 추수할 때가 되면 결국 그 알곡들은 모아서 천국 곡간에 둘 수밖에 없다(마3:12, 눅3:17참조). 


3) 씨앗으로 한 인격 안에 떨어진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은 외적인 번성의 파장까지도 불러온다. 처음엔 모든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들을 내면서, 공중의 새들까지도 그 그늘에 짓들일 만큼 되기 때문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해지리라’는 욥기의 말씀을 이룬다(욥8:7). 예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라! 12제자로, 120여명의 성도들로, 온 세계 교회로 번성한 모습이 되지 않았던가! 


o 예수의 그 나라에 들어선 자들은 다 그 은혜를 받는다. 보라. 주의 나라를 뒤엎을 더 큰 권세는 없다. 그러기에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그 백성답게 처신하며, 그 책임과 의무를 흔들림 없이 지켜 행하는 자라면, 그 누구나 반드시 심판의 ‘여호와의 날’의 문턱을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넘어서게 될 것이다. 종말신앙 자체만 몰두하면 힘들다. 하지만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의지와 긍지로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고 산다면, 우리는 꼭 승리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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