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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어린이.청소년주일 - 교회교육주일

관리자 2021-04-29 (목) 10:30 1개월전 129  

본문)  요 15:1~11, 롬 8:1-11, 아 2: 8-17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다. 년 중 가장 아름다움과 건강한 젊음을 뽐낼 5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늘 첫 주일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꽃주일, 곧 어린이와 청소년 주일도 된다. 그리고 교단에서 제정한 교회교육주일이기도 하다. 지켜야할 목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 계절에는 할 일이 많다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가정과 교회에서 말이다. 그 대상이 어린이와 청소년들, 그리고 교육 책임을 맡은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의 교육 환경은 매우 염려스럽다. 우리나라의 아이 출산율의 저하 현상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고, 상대적으로 노인 고령화(高齡化)는 빠르게 급증하는 기이한 현상이 굳어지는 판국이어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감당할 책임의 무게는 너무 버겁고 막중할 수밖에 없기에, 기존 세대로서의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은 늘 미안(未安)하다. 

 

아이들의 교육환경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년간 지속된 코로나19로 인한 교육환경과 교육의 질은 많이 낙후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가속화되면서 염려스러운 면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취업 전선의 문이 좁아지고 일자리도 여의치 못한 처지에서, 교육의 경쟁 수준은 더욱 첨예화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우리 아이들 자신은 물론, 부모들까지의 운신의 폭까지도 한없이 옥조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교육의 상황도 무척 우려가 되는 대목이다. 교회교육은 세상이 제공할 수 없는 하나님 교육을 통하여, 경쟁 만능 사회에서 인간의 삶과 인격과 영혼에게 반드시 제공되어야할 생명의 양식들을 맡아온, 그래서 인간 교육 영역에서 매우 소중한 균형추의 역할을 감당해 온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교회의 코로나로 인하여 집회 자체가 잘 되지 못한 바람에, 아이들의 신앙교육도 심각히 움츠러들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건가? 계속 이런 부정적 상황만 걱정만 하고 살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보완과 보충의 기회를 찾고, 그 동안의 우리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면서, 보다 성숙한 양질의 교육을 위한 도전적 시도를 추구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발상과 접근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족들에게 매우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서도, 먼저 부모와 성인 세대가 배움과 성장의 무대 앞으로 나와야만 한다. 

 

오프라인이 제한되었다면, 온라인의 문을 더욱 적극 두드리자. 성서교육, 소그룹모임, 개인 심방과 상담, 다양한 만남의 영역도 우리가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는 자원이다. 그래서 모임과 교육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정보화 매체의 유익성을 복음과 하나님 나라 전파에도 활성화시키는 적극적인 시도들이 펼쳐져야 한다. 온라인의 주인도 인간이 아닌 예수와 그의 복음과 사랑이 되게 하자. 움크린 인간들의 가슴에 새 희망과 새 시대를 밝힐 등대를 세우자. 

 

지금은 오늘 본문의 아가서 말씀대로, 우리가 자다가도 깨어 나와야 할 때이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도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들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아10-12절)

 

부활절 다섯째 주일인 오늘의 말씀은 하늘 아버지가 농부(農夫-Farmer))이심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1절). ‘나는 참포도 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절). 농부의 밭가리로 부터 시작된 세상, 그의 밭가리로 부터 생명의 풍성을 맛보게 된 세상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농부 없는 세상과 나무 없는 인간의 삶, 거기에서 소출되어 제공되는 열매과 곡식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이제 가슴을 열자. 농부 되신 하나님이 내 가슴 밭에 당신의 나무와 열매들을 가득 채우실 그 놀랍고 기이한 역사를 위해,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자. 알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세상에 농부이신 것처럼,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에게는 엄연한 농부다!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농부다. 교사들은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농부다. 따라서 밭과 나무의 소출과 미래는 모두 깨어 있는 농부의 몫이다. 

 

☞ 그러니 성찰해보자. 농부로 부름 받아 살아온 내 농사현장의 지금은 어떠한가? 풍성한가, 빈곤한가? 고맙고 자랑스러운가, 아니면 부끄럽고 미안한가? 

자식 농사에 인생의 전부를 건 농부인 부모들의 실상을 살펴보자. 상황은 어떤가? 전망은 있는가? 그래서 묻는다. 지금의 자식 농사에 무슨 거름을 쏟아 붓고 있는가? 지금과 같은 방법이라면, 내 자식농사가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의 방식, 곧 물질과 학력 위주, 기능과 직업 위주의 세상 교육이 과연 내 자식 농사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은가?  

 

문제는 자식 농사라는 것이 그러한 세상 교육을 위한 노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자녀 농사의 열매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그의 생을 건강하게 떠받쳐 줄 인성(人性)과 영성(靈性)의 교육의 열매들이 그의 삶을 떠받쳐 주는 데까지이다. 거기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자식농사를 평가할 수 있다. 곧 핵심은 그 자식 농사에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세가 뿌리를 내렸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이 문제가 함께 해결되지 못하면, 부모의 자식 농사는 깊은 후회 속에 막을 내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보다 확실한 교육의 열매, 자식 농사의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그 해결의 길을 적극 찾아야 한다. 마침 오늘의 말씀은 그 해답을 명료하게 제공한다. 그게 무엇인가? 주님의 자기 계시의 일곱째인 ‘나는 참 포도나무(I am the true vine)요’라는 말씀에 있다(1절).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이 계시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 농부이신 아버지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선언하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생명이 될 것인가? 

 

o ‘예수란 나무를 우리 아이들(우리들) 속에 심자’는 말씀으로 받으면 되겠다! 우리의 인성과 영성 속에 예수 나무를 깊이 심자는 것이다. 예수는 누구신가? 인간 중에 ‘참 인간’으로서, 가장 따뜻하고 온전한 인간이시다. 따라서 그 예수란 나무가 제대로 내안에 심겨지면 어떻게 될까? 그 열매도 함께 얻게 될 것이다. 그 열매에는 주님의 인성과 영성이 함유되어 있다. 그 바람에 그는 예수를 닮은 성숙하고 훌륭한 인격과 품성을 보유한 인물로 변한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예수 나무가 심겨진 자녀가 과연 부모의 자식 농사를 망치게 한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자녀로 인하여 감사하며, 결국 편안히 주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예수가 ‘참 포도나무’란 표현이다(1절). 이것은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이시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거짓과 잘못된 이스라엘과 당신을 구별하시던 선언이기도 하다. 본래 성경에서는 이 포도나무와 포도원이란 말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사용하였다(시80:8-13,사5:1-7 참조),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는 모습을 보이자 그 때부터는 ‘악한 포도원지기들’로 이스라엘을 재규정하기도 했다(막12:1-12 참조).  

 

o 이제 과제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를 우리와 우리 자녀와 가정 안에 심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신 열매를 맺겠는가? 주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하시다. 곧 ‘너희가 정말 내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내게 붙어있으라’라고 요구하신다(2절). 곧 ‘붙어 있음’이 생명이다! 가지(branch)로 붙어 있는 것이다(5절). 예수님은 자기 몸속에 당신을 품고 사는 자들을 당신의 가지로 간주하신다. 그런데 나무는 자기를 어떻게 알리는가? 오직 가지들을 통하여 알린다! 

 

그렇다. 나무는 자기에게 매달려 있는 가지들을 통하여 자기의 꽃과 열매를 생산한다. 영광과 화려함을 모든 가지들이 누리게 한다. 몸통인 나무는 다만 묵묵히 서서, 자기에게 붙어 있는 모든 가지들을 지켜내며, 그 가지들 마다 꽃과 열매를 맺도록 꾸준히 힘과 능력만을 퍼 날라주고 공급할 뿐이다. 마치 부모가 은혜를 자식에게 전하며, 스승이 수고의 열매를 제자에게 전이하고, 앞 세대가 수고를 뒷 세대에게 그 열매를 따먹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지들은 전적으로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된다. 그 일에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바람이 치고 새들이 찾아와 앉아서 그 가냘픈 몸을 흔들어내고 위협을 해도, 그래도 가지는 끝까지 버티면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래야 장래(將來)가 있고 영광(榮光)이 따른다. 예수의 맛과 생명을 담은 풍성한 나무와 열매까지 자기 몸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o 그러면 나무에 붙어 있을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들인가? 최고의 핵심적인 ‘붙어 있음’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지켜 행하는 일이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그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확인해 보자.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은 ; 

 

1)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다’ (3절). 

2) 형통의 상태에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7절)

3) 사랑의 상태에 들어가 있음을 말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0절)

 

o 혹 나무와 떨어지거나 끊어지게 되면 어찌될까? 그때부터 그의 생명이나 운명은 끝장이다. 

1) 생명 열매의 생산이 끊어짐을 말한다.-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4절)

2) 무능 상태에 떨어짐을 말한다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5절)

3) 모든 관계에서 버림과 심판 당함을 말한다 -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게 될 뿐이다’ (6절.하)

 

☞ 이렇듯, 인간에게 예수 나무가 심겨져 있느냐 없느냐 여부는 그 운명의 성패(成敗)를 판가름할 기준점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하기에 예수 자신은 물론, 성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가 너의 안에 계시냐’를 절박하게 묻는다(요14:6,21, 행16:33, 요일5:10-12참조).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모든 농부들인 부모, 교사, 목사들은 바로 이 점을 절대 유념해야 한다. 진정 허망한 농사꾼이 되고 싶지 않거든, 모든 사람 농사에 예수 나무심기부터 확실히 챙기시라. 그러면, 그 나무가 그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미래를 이루어갈 터니이까-!

 

o 나머지 두 본문들인 서신서와 아가서는 인간(자식) 농사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들로 보면 된다. 

-로마서는 내 안에 예수 나무가 심겨져서 작동하는 상태와 그 결과에 대한 영적 상태를 보다 다양하게 증언하여 준다. 그 역할은 자기 안에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역사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에 아가서는 인간(자식) 농사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의 현장에 있다고 해도, 사탄의 간계와 훼방은 끊임없음을 알고, 거기에 대처하지 못하면, 그 농사는 패망하게 됨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15절).  

 

o 예수 나무, 예수 사람이란 진단(診斷)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이다(4절). 성령은 누구신가? 바로 예수 나무의 영이시다. 예수의 생명, 인격, 능력, 마음과 뜻을 가지들인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시는 영이시다. 그러기에 성령과 접목하여 사는 이들은 예수의 생각과 마음과 지혜를 좇아서 살게 된다. 그러기에 바울의 이런 놀라운 선언이 나온 것 아닌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하)

 

그리스도의 법인 성령을 좇아사는 이들의 특성(모습들)들이 진단표로 제시되었다. 무엇들인가? 

1) 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대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질서)이 그를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해방(解放)하였다(1-2절). 

2) 그는 율법에서는 불가능한 일, 곧 오직 하나님의 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은헤와 사랑과 축복의 물결(흐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3-4절). 

3)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생명과 평안을 얻어 누리게 된다.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5-9절) 

4)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기에 그 성령을 예수 나무안에서 받은 이들은 결코 그 존재가 끝나지 아니한다. 죽어도 살 것이다. 죽을 몸도 살리시는 영이기에, 예수의 가지된 우리에게까지 몸의 부활을 안겨줄 분이시다(11절).

 

o 아가서의 환경은 그야말로 최상이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11절). 지면의 대지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며 포도나무도 때를 만나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한다(13절). 이런 분위기는 사랑하는 이들을 한 데 모을 수밖에 없다.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할 시기와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13-14, 16-17절). 이 얼마나 멋지고 최상의 수준인가-!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냉험한 염려와 경고를 보낸다. 그것은 서로와 모두를 위하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것이다. 그 여우는 어떤 것인가? 겉보기에는 별거 아닌 듯싶은데, 일단 걸려들면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주저 안칠 수 있는 치명적 독성을 가진 세력이다. 저 다윗을 괴롭혔던 독성이다. 잘 지었던 포도 농사를 한순간에 망칠 훼방꾼이다. 요즈음 산골 농가들의 멧돼지들과 흡사하다. 

 

최근 자신의 자제력을 잃고 성추행으로 낙마하고 온 국민들과 소속원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던 지자체장들의 모습도 연상된다. 어디 그것뿐인가? 잘 나가던 집안이 부모의 방심해서 저지른 실수들로 한순간 무너지고, 깨지고,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잘 자라던 자식들과 가정의 기반 전체를 무너뜨리는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흥하던 교회들과 목회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바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의 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렇다. 여우는 잡아야하지, 잡히면 안 될 흉악한 짐승이다. 경계하고 물리칠 가까이 있는 어둠의 세력이다.

 

o 그러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안전지대는 없다. 있다면, 오직 예수와 성령, 그리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을 때이다. 신실한 가지로 예수 나무에 붙어살 때이다. 주의 말씀에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경고는 여전히 옳다(눅16:10절). 큰 것에만 능하고 작은 일에는 무능하던 이들의 결말을 보자. 이게 우리와 우리 가정과 자녀,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지켜낼 주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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