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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4-19 (월) 23:18 3년전 657  

본문) 요 11:17~44, 욥 33:14-18, 23-28, 고전 15:51-58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이번 부활 절기에는 둘째 주일부터 계속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주제의 말씀 선포를 계속해왔다. 지난 주일에 소개드린 대로,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7가지 차원으로 정리하여, 그 분 자신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형식으로 소개한 바 있었는데, 중요성을 감안해 그 내용을 재차 알린다. 


☞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과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오늘 넷째 주일에는,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다’라는 주제의 말씀이 다른 관련성서의 말씀들과 함께 주어졌다(11:25).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되살아나다. 소생하다’는 등등의 뜻이 있다. 마지막과 죽음이란 한계를 극복한 생명과 승리의 용어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로서는 간절히 꿈꿀 수 있는 극한(極限) 지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한 지점이기도 하다. 끝(죽음) 이후의 시작(소생)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부활은 제2의 창조요 시작도 된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그런 부활의 세계를 안내하고 맛보게 해 줄 존재라고 선언하신다. 즉 당신에게는 죽음을 이겨내어 생명(生命)만 펼쳐진 영원한 세상이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설레며 가슴 벅찬 세계인가? 죽음 너머의 부활의 영역 보고 살도록 인류에게 소식을 안겨준 일은 분명 복음(福音)이었다. 이 예수의 뉴스로, 지금의 기독교회가 인간 소망의 궁극점을 해결할 수 있게 됨으로서, 세계의 독보적인 구원의 종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뉴스에 대한 입증할 자료들이다. 그 물증이 없다면, 결국 아무도 못믿는 허황된 거짓 뉴스로 끝날 터이니까 말이다. 그렇다. 만일 예수가 부활이란 인류 최고의 가치(價値)를 그렇게 소리(말)만 내고 선포만 하고 말았다면, 예수는 희대의 사기꾼이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또 다른 황당한 교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나 듣고 믿고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이 함께 제시되어야 했다. (오늘의 본문들은 바로 그 답변들이다.) 

 

게다가 예수께서는 그 선언만으로 끝내지 아니하셨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라면서, 당신의 선언을 듣는 자들을 더욱 거칠게 압박(壓迫)도 하셨다. 어찌 보면, 그 위험 수위의 마지노선(?)을 넘어도, 완전히 넘은 것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이 말씀은 당신이 보여 줄 부활 세계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그런 주장을 하신 예수님에게 남은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스스로 당신이 왜 부활이시고 생명이신지를 입증하는 일이다. 말만이 아닌, 그 능력과 그 선언을 밑받침하실 자료들을 이 세상에 내어 놓아야할 책임이 있으셨다. 어떤 방식일까?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죽은 후, 직접 살아나 보던지, 아니면 최소한 죽은 누군가를 찾아가 직접 살려내는 주인공이 되던지 하는 일이었다. 그런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확인해주지 못하면, 그는 결국 희대(稀代)의 사기꾼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막다른 처지가 될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예수님 주변은 공격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주장이 실재로 입증되느냐의 여부는 그들에게는 다시없는 탄핵(彈劾) 거리가 될 것도 분명하다. 예수님도 자신의 그런 처지를 어찌 모르고 계셨겠는가!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선포로 온 세상과의 벼랑 끝 승부수를 던지셨다. 입증하면 영광(榮光)이지만, 실패면 지옥(地獄)일 뿐인 그런 승부수를 던지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이미 확고했다. 이미 주님은 당신이 준비하신 모든 것들을 세상에 내어 놓기 시작하셨다. 그 내용들은, 놀랍게도 그 ‘둘 중에 하나만‘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 둘 모두’를 직접 선택하여서, 완전히 죽고 완전히 사는 부활을 확인해주고 선보여서, 세상과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참된 부활 생명의 주가 되시고, 동시에 당신을 믿는 자들 모두도 함께 부활하게 되는 길을 여시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갖고 계셨다. 


그렇다. ‘자신도 부활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도 부활하게 하시는 일-’, 오직 부활의 주되심을 위한 예수님의 행보가 그의 십자가를 앞둔 최종 지점에서 펼쳐지기 시작되었다. 실로, 인간에게는 이 둘 중 한 가지도 불가능한 일인데, 메시야 예수님은 이 둘 모두가 다 당신에게는 가능(可能)함을 보여 주려고 하셨다. 주님의 이런 결단은 당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죽음이 아닌 생명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을 여시고자 하시려는 차원에 의한 것이었다. 


이 일의 의미와 가치는 지고(至高). 지대(至大)하다. 이 세계를 접하게 되는 존재들은 보고 확인하는 순간부터 변화를 받기 때문이다. 세상의 집착에서 영원한 세상을 향해 마음과 양심이 이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위 육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거듭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오늘의 본문들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 역사의 생생한 체험담만 보여주지 않는다. 욥기를 통하여 그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천상의 존재인 그리스도로서 고난 받는 자를 중보하는 중보자요 대속물로서도 일하셨음을 함께 전해 준다. 그리고 서신서인 부활장을 통하여서는 이 부활의 세계를 맛본 성도들이 최후에 어떤 변화된 새 옷을 입을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약속들까지도 잇달아 소개하여 준다. 곧 우리가 왜 부활신앙인이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이런 일련의 예수의 부활의 주되심을 입증하기 위한 첫 자료가 바로 복음서의 내용이다. 바로 주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베다니의 나사로와 그의 집을 찾으신 결정적 이유이었다. 대체 나사로의 집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o 상가(喪家)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유족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향한 위로자(慰勞者)들이었다(19절). 저들은 세 남매가 함께 살다가 오라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일을 통분히 여기면서(33절), 함께 울어주고 상주들을 위로하고 고인의 넋에 명복(冥福)을 빌고자 상가를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문자가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의 방문 동기는 완전히 달랐다. 위로가 아니고 죽은 자를 다시 불러내어 살려내고 다시 가정과 가족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행보는 처음부터 아주 달랐다. 비록 당신이 친구처럼 생각하고 사랑했던 나사로였으나(11:11), 나사로의 위독과 죽음의 소식에도 주님은 ‘그가 잠들었다’라면서, 무려 나흘이나 주변의 일만 하시면서 나사로를 찾지 않으셨다. 마치 나사로가 진짜 완전히 죽게 되도록 기다리셨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셨다(39절 참조). 


그런 주님이 결국 찾아오셨다. 그것도 고인이 무덤에 안장된 지 나흘째에 오신 것이다(17절). 오셔도 빈소를 찾지 않으시고, 베다니 근처에 머물면서 소식 듣고 찾아온 언니 마르다를 만나셨다(20절). 예수를 영접한 마르다는 안타까움과 야속함과 무언가 희망이 담겨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21-22절). 


주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초상집 상가에 제공한 부조(扶助)들 중에 이만한 충격적이고 놀라운 부조가 또 있을까! 위로 속에서 고인을 잘 보내려는 현장이었는데, 뒤늦게 오신 예수는 아예 무덤에 있는 고인을 살려서 가족에게 돌려보내시겠다는 것이었으니-, 이런 헷갈린(?) 말씀의 부조를 과연 상주들이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사실 주님의 이 예고에는 이중적(二重的)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당신의 인격 안에 그 희망이 성취될 것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믿는 자에게는 현실적이고 접근 가능한 일임을 알리고자 하셨다. 


마르다는 그 말씀을 이렇게 받았다.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24절). 그녀는 유대인 일반이 미래의 희망으로 품고 있던 신앙을 인용(引用)하면서 그렇게 답한 것이었다(행23:6-7참조). 그러자 주님께서 부활에 관한 ‘그 다섯 번째 자기 계시’를 하고 나오셨다.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마르다는 결국 한걸음 더 나아간 고백으로 응답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마르다의 이 고백은 이제 유대인의 신앙고백차원을 넘어, 모든 유대 민족의 희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초대교회 차원의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1:41참조). 곧 주는 하나님이 아들이시기에, 모든 희망을 능가하는 차원에서 주의 뜻이 성취되리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과정만 남았다. 


주님은 동생 마리아에게서도 마르다와 비슷한 고백을 받으셨고(32절) 그녀와 이웃들의 눈물 속에서, 돌로 막아 놓았던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셨다(38절). 주님은 즉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다(39절). 그러자 마르다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면서 만류하고 나왔으나, 주님의 더욱 단호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죽은 나사로를 당신과 바로 대면(對面)하게 하신 것이다(40절,2:11,1:14 참조). 


o 주님은 하늘 아버지를 향해 먼저 기도를 올리셨다(41-42절). ‘죽은 나사로를 이제 살려 달라’는간구가 아니라, 언제나 당신과는 하나이심에 대한 감사부터 드렸다(3:35,5:19-21,8:29,10:37-38등). 그 직후 주님께서는 큰 소리로, 마치 자는 자를 불러내시듯 그를 부르셨다(11) -‘나사로야 나오라!’(43절).  

그러자 비록 수족(手足)은 베로 동인 채였고 얼굴은 수건에 싸인 체였으나, 그는 이미 산 자로 일어나 그 무덤을 나왔다. 주님의 최후 지시가 내렸다.-‘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절). 깨어난 생명인 나사로를 향한 자유(自由)를 선포하셨다!


☞ 이런 나사로의 이 부활 사건은 곧장 이스라엘 온 유대 천지를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면서(11:47-50참조), 예수님 자신은 모두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신다. 이 과정으로 예수님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당신은 죽은 자를 부활하시게 하시고 당신 자신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진정한 주(主)이심을 스스로 입증하셨다. 


o 구약의 욥기 이야기가 예수 부활 이야기에 연관 본문으로 들어온 것 자체는 놀랍다. 내용은 욥이 자신의 고난에 억울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하나님께 탄원을 올렸음에도 응답이 없자, 그가‘자기 고통을 보기만 하신다’라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입장을 보인 일이 있었는데(30:20), 그 때 친구 엘리후가 이 말씀들로 욥을 권고하면서 욥의 회복을 돕고자 하였다.  


그의 증언 가운데는 부활 신앙과 연계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어느 중보자(仲保者-meditator) 천사의 역할과 그 결과이다(23-26,상). 중보자 곧 그가 만일 (욥과 같은) 고난자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정당함을 변호하며 기도를 올린다면,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몸값을 지불할 대속물(ransom-죄인으로부터의 회개)을 얻었다고 보시면서, 그에게 구덩이(지옥-pit)에 떨어지지 않도록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그 중보자는 누구인가? ‘파라클레토스’라는 이름으로, 해석자(解釋者), 보혜사(保惠師-요14:16,15:16), 대언자(代言者)란 뜻을 가진 이이다. 놀랍게도 예수께서 거론하신 성령 보혜사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그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23절), 또 하나는 죄 되고 연약한 인생을 위하여 자신이 친히 대속물이 되는 일도 하신다(24절).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성령과 성자가 대언자와 대속자로 이미 천상에 존재하고 계셨음을 암시한 놀라운 증언이었다. 욥도 그 중보자의 은혜를 입게 되면, 죽음을 이겨내고 생명이 부여될 것이다! 


o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서는 부활의 주를 만나고 그의 부활신앙에 굳게 서서, 온 세상에 부활의 복음과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온 목숨을 바쳐 헌신하신 사도 바울의 담대한 선언이 올라와있다. 그는 죽음의 세력인 사망을 비웃는다. 사망이 힘쓰는 곳은 오직 죄가 있는 곳뿐이며, 법을 앞세워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드는 율법 세계일뿐임을 말한다(55-56절). 


그렇다. 우리는 머잖아 주님의 때를 맞이할 때, 사망에서 벗어난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될 것이다(51,54절 참조). 그러기에 지금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울의 호소의 말씀을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권한다. 이미 치명적 힘을 잃은 ‘사망 권세에 절대 쫄지 마시라’! 그러면서 다만 우리가 꼭 해야 할 하나님의 일들에는 전념하면서 사시라!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대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절). 그렇다. 예수는 진정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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