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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장애인주일 - 4.19혁명기념주일

관리자 2021-04-14 (수) 08:11 2개월전 110  

본문)  요 10:1~18, 히 13:7-10, 20-21, 겔 34:11-16

 

부활절 셋째 주일이다. 대지는 온갖 식물들을 생산해내면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뽐낸다. 앙상했던 나무 가지들도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꽃부터 피었던 나무들도 이제는 어느덧 풍성해진 이파리들로 인하여 그 멋과 균형을 자랑한다. 꿀벌들의 등장과 움직임도 신비롭다. 그런데 이런 생태계(生態界)의 새 옷 입기는 결국 인간을 위한 창조주의 놀라운 작품이요 선물이 아니던가! 때맞추어 금년엔 하늘의 생명 비가 온 대지를 수시로 적시어서 더 좋다. 

 

사실 우리에게 생명의 먹거리를 무한히 공급하는 대지(大地)는 문(門-gate)이다. 문도 활짝 열린 문이다! 인간과 모든 동식물 생명체를 생산하고 받쳐주며 먹고 살도록 무한하게 먹거리들을 공급해주는 생명과 구원의 문이다. 동시에 하늘의 비를 그 가슴으로 받았다가 인간에게 마시며 살도록 음료를 공급하는 저수원이기도 하다. 참 신비롭다. 그 뿐인가? 대지는 또한 인간의 온갖 부끄러움과 더러움과 오염물도 받아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덮개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기에, 인간은 이 대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좌우된다. 인간 자체가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인데다가(창2:7),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처럼, 흙(진흙)으로 맹인의 눈까지 뜨게 되는 치유의 생명력까지 있음을 엿보게 하였기 때문이다(요9:6참조). 요즈음 도시의 삶에 병들고 지친 이들이 적잖게 귀어 귀농 귀촌 혹은 산골이나 섬 등을 찾고 있다. 다행스럽게 보인다. 자연은 사회보다 훨씬 정직하고 따뜻하다. 인간이 조금만 욕심을 버린다면, 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그들의 생은 더욱 건강하고 안락하게 삶을 즐길 것이다.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의 장애인 주일이다. 한마디로 누가 장애인인가? 겉모습만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별은 쉽다. 하지만, 한 껍질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세상은 온통 장애인들뿐이다! 아니, 비장애인을 찾아보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정신적 장애는 말할 것 없고, 영적 장애인이 아닌 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알고도 행동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의 천지이기 때문이다.(사6:9,행28:26 참조). 

 

그러기에 이 세상은 항상 시끄럽고, 우리의 삶은 불안하며, 미래의 희망 역시 밝지 않다. 희망을 노래할 부활의 계절 안팎으로, 왜 그리 나라와 민족의 상처받은 흔적들이 많은지-, 안타깝다. 우리 총회가 지키는 4.19혁명 기념주일로 마찬가지이다. 건강하지 못한 자들이 집권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모습들이 뒤풀이 되면서, 우리 한국 현대사는 피의 혁명들을 반복해 왔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민간들이 주도한 정치혁명을 그 다음 해에 군인들이 전복한 일이다. 요즈음 미얀마의 군인들의 폭거를 보면서, 우리의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 더욱 서글프다. 

 

다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고대한다. 그것도 저 대지와 같은 넓은 품과 치유와 관용의 넓은 가슴을 가진 메시아, 그러면서 무한히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먹거리도 공급해주며, 생명까지도 넉넉히 보듬어 줄 메시아, 종국에는 우리의 죽음도 받아주되 나중에는 변화된 새로운 존재로 우리의 몸을 부활시켜 줄 그 메시아를 고대한다. 이는 분단의 고통에서 탄식하는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그러하고, 미얀마의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그러하며, 코로나로 탄식하는 지구촌의 대변화를 견인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그런 메시아가 과연 누군가? 

 

다행히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그 주인공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를 소개한다. 그는 원래 창조주로서, 이 대지를 만드신 주인공이시고, 무엇보다도 장애인들만 사는 이 지구촌에 친히 인간되어 오셔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며, 건강하고 온전한 참 인간의 모습을 선보이신 인물이시다. 놀랍게도 본문의 예수는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소개에 집중해 주셔서, 우리가 그를 이해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예수는 세상에 자신을 누구라고 계시하신 걸까? 

 

o 본래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부활하시고 교회의 주님 되신 예수를 다각도로 증언한 바 있는데, 그 핵심적인 틀은 바로 ‘에고 에이미’(헬), 즉 ‘나는 —이다’라는 형식이었다. 이는 구약 이사야서의 여호와의 자기계시 형식에서 인용되었던 것이었다(사41:4, 48:12참조). 요한은 예수의 다채로운 모습을 총 7가지로 압축하여 증언하였는데, 그 내용들은 이러했다. 

 

☞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과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이 주님의 자기 계시를 보면, 유독 ‘생명(生命-life)’이라는 주제가 3차례나 올라와 있다. 그만큼,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핵심적 삶의 과제이고, 예수님은 인간 생명에 관련한 모든 답(答)들을 가진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 중의 2가지, 곧 ‘나는 양의 문(門)이다’(10:7)와 ‘나는 선한 목자(牧者)다’(10:11)라는 예수님의 자기(self) 계시(啓示)가 올라와 있다. 이 주제가 우리의 삶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인지를 이제 함께 살펴보자. 

 

o ‘나는 양의 문(門)이다’(10:7). 본래 이스라엘은 양들의 나라다. 목자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곧 유목민의 나라였음을 말한다. 성서의 아벨로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다윗 왕을 비롯한 백성들의 삶의 기반들은 모두 목민 사업들이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양무리였다! 양은 어떤 동물인가? 유독 겁이 많고 무력한 동물이라서, 그 어느 동물보다도 잘 돌보아야할 목자가 필요했다. 광야로 나간 양들에게 목자는 절대적이었다. 

 

목자의 생활은 어떤가? 하란의 목초지에서 라반의 양떼를 돌보던 야곱의 체험담을 경청하자-‘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 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40참조). 그 만큼 목자의 양떼 지키기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이런 목자와 양의 관계였기에, 목자의 양 사랑, 양들의 목자 의존도는 가히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양들의 생명과 안전은 오직 목자와 함께 있을 때이다. 목자만이 양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9절). 

 

양떼 주변엔 언제나 약탈자들과 맹수들이 있었다. 그러기에 특히 밤이 문제였다. 대게 돌담을 만들고 출입문을 만들어서, 양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 때, 대부분의 목자들은 아예 그 문 입구를 자기의 몸으로 틀어막고 자면서 그 밤을 보내며 살았다. 주님의 ‘나는 양의 문이다’(7절)라는 말씀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 내용에는 자기 양들 지킴과 함께, 외부로부터의 절도와 강도의 침입에서 자신의 양들을 보호하려는 의지도 담겨 있다. 도둑이 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양들의 생명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었다(8,10절). 

 

그런데 주님이 당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그들이 처한 영적 생명의 위기를 염두에 둔 말씀이었다. 예수는 그 선언을 통하여, 세상의 처한 위기에 대처할 희망을 주시려고 하셨다. 즉 당신이 바로 길 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목자라는 점과, 목자이기에 이제 당신은 당신의 양들을 절도와 강도인 거짓 종교와 지도자들로부터 지켜내시겠다는 입장을 공적으로 천명하셨다.

 

사실 그 시대의 종교인 유대교는 백성의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려는 의지는 없었고, 오로지 종교란 이름으로 그들을 옭죄고 도둑질하며 생명을 고갈시켜서 죽이는 행태만을 보여주고 있었다(1,8,10절 상). 그런 그들을 주님은 절도요 강도로 보신 것이다. 곧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계시인 당신’을 거절하는 행위, 하나님의 직접적 위탁(委託)인 예수를 배척하는 행위를 드러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거짓 사이비 세력임을 스스로 입증했던 것이다. 

 

주님은 당신을 더욱 분명히 알리시고자, ‘나는 양의 문이다’고 밝혀주셨다. 게다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는 말씀도 덧붙혀 주셨다. 어떤 말씀인가? 이는 오직 당신이 그 동안 닫혀있던 낙원(樂園)을 열고 들어갈 출입문이며, 모든 믿는 자가 들어가게 될 천국문임을 단호히 선포하신 말씀이 분명하다. 그렇다. 오직 예수가 답이다. 그를 통하면 우리는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 다른 것을 찾으려하면 우리는 도둑질 당하고 빼앗기며 강도를 만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이다. 

 

o ‘나는 선(善)한 목자(牧者)다’(10:11).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강조하신다. 그러면서 유독 삯꾼(hired man)과 비교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참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무엇인가? 삯꾼은 돈이 목적이다. 양들의 돌봄이 목적이 아니기에, 양들의 생명에는 무관심하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이리란 무서운 공격자가 나타날 때이다. 그때의 삯꾼의 관심사는 자기 목숨이지, 지키던 양들이 아니다. 다 버리고 도망한다. 저 세월호 참사 때, 304명 학생들 버리고 도망쳐 나온 선장처럼 말이다. 그 바람에 양들은 다 죽는다.(12-13절)

 

그렇고 보면 이스라엘에서 목자(왕/제사장/리더들)로서의 평가는 양들을 어떻게 돌보고 지켜내느냐에 달렸다. 다윗은 사자와의 싸움을 치루면서 양들을 지켜내는 목자의 본문을 잘 감당하므로서, 이스라엘 왕으로 주의 선택을 받게 되었었다(삼상17:34-36).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다윗의 그 차원을 완전히 넘으셨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 인류(人類)의 목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엔 울안의 양들뿐 아니라, 울 밖의 다른 양들도 품고 계셨다. 세상 어디에 있던, 당신의 음성을 듣고 모일 양무리들을 다 품고 계셨다(15-16절).  

 

o 그런데 ‘양의 문’되시고 ‘선한 목자’되신 주님이 유독 당신 자신의 내세운 목자로서의 윤리(倫理)가 있었다. 그것은 온전한 문이 되시고자 함이고, 또 온전한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심에서 나온-,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행동 지침(指針)이었다. 무려 4번이나 강조된 희생(犧牲)적 행동 지침이었다(11,15,17,18절).이는 실로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젖줄이 된 윤리 강령이 된 지침이었다!

 

주님의 이 지침은 십자가 처형당하심으로 친히 실천해 보이셨고, 그의 부활의 열매로 그의 교회 공동체를 생산해 내심으로서 그 목적을 입증하셨다. 즉 하늘 아버지께서 보유하신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를 넘겨받으신 주님은 그 권세들을 죄인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특히 당신의 양들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고 교회를 생산해내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신 것이다(16-18절 참조). 그러기에 절대 잊지 말자. ‘교회는 주님이 당신의 목숨을 버려서 얻어낸 공동체임’을!!! 

 

o 구약 에스겔 예언의 내용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방법(方法)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다가오실 것인지를 예고한 말씀이다. 당시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과 애굽등으로 온 민족이 끌려가고 흩어져서 살던 불행한 시기였는데(렘43:1-7참조),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서는 ‘내가 내 양을 찾아서 그 흩어진 모든 곳들에서 그것들을 건져내리라’(12절)라고 예고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친히 그 백성(양)의 목자가 되어, 이스라엘 모든 거주지에서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누이며 살진 꼴을 먹이겠다고 약속하셨다(13-14절) 

 

☞ 그런데 이런 회복의 역사를 펼치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사용하신 방법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었나? 사회적 약자들(잃어버린 자/쫓기는 자/상한 자/병든 자/들)을 집중적으로 찾아 세우시고, 강한 자(살진 자/강한 자)는 무너뜨리는 등의 사회적 정의(正義)를 기초로한 질서의 재편(再編)을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었다(16절, 렘31:8-9절 참조). 본문을 다시 본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교만한 자(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正義)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16절).

 

물론 성부 하나님의 이런 약자 중심의 선교 방법과 지혜는 성자 예수님의 희년 사역 현장에서도 더욱 강하게 빛을 발하였다(눅4:18, 사61:1참조).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살리는 주의 은혜의 해가 복음으로 폭넓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서도 교회의 선교는 계속 약자를 사랑하고 돌보고 세워주기 중심으로 복음이 선포되어졌다. 

 

o 서신서인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큰 목자로 둔’ 양무리 공동체에게, 그의 십자가(十字架)의 피의 희생으로 구원의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들에게(20절),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8절)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두어 가지 간절한 당부를 전한다. 

 

1)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며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며 인도하다가 순교한 교회의 모범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권한다(7절). 교회는 그들의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복종과 충성으로 목숨까지 받쳤던 이들의 선교 위에 세워진 곳임을 기억하라 것이다. 대표 사도들이었던 베드로와 바울 이 두 분들 모두, 땅끝 선교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서 순교한 지도자들이었지 아니한가! 

 

2) 성도들은 예수 십자가 보혈의 은혜(恩惠)에 집중하고, 모든 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충성해야 한다(9절). 특히 믿음 생활에서 발행할 여러 가지 잡다하고 지엽적인 다른 교훈들이나 예식과 음식 규정들에 끌려 다니면서, 믿음의 생명력과 순수성이 손상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한다(21절), 하나님의 양무리인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절도와 강도들이 우리 영혼을 훔치기 위하여 호시탐탐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o 우리의 생명의 큰 목자 되신 예수님은 진정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온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실 유일한 문이시다. 동시에 우리를 거짓 세력과 위선적 유혹으로부터도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실 절대적인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니 흔들림 없이, 그를 담대히 의지하며 살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이다. 온갖 죄악의 오물 속에 빠져 살던 나를 위하여, 영육간의 장애인으로 온갖 시행착오를 범하며 살아왔던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가 먼저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지내고 있는 내가 아닌가! 그러니 부족한 나를 통하여서도, 예수 부활의 능력이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봉사와 섬김, 전도와 선교의 자리에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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