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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려주일-고난주간/ 제주4.3기념주일

관리자 2021-03-23 (화) 20:03 2개월전 186  

본문) 막11:1~10, 삼하6:12-19, 히12:18-24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여섯째 주일이다. 우리 교회력으로서는 매우 특별한 주간에 들어간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최후 결전지인 예루살렘 성에 입성(入城)하시고 그의 마지막 고난(苦難)의 여정에 참여하시면서, 제자들과의 고별 만찬에 이어, 겟세마네에서의 최후의 기도를 올리시고 체포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의 배신도 당하신 후에, 빌라도의 재판을 끝으로 당신의 ‘짧고도 굵었던 생애’를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마감하는 일정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예수의 고난 주간을 우리 총회는 제주4.3기념주일로도 맞이한다. 이는 해방 후,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혹했던 이념 전쟁의 폐해로 저 제주 양민들이 이유도 없이 무려 수만 명이 폭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체, 동족인 군경(軍警)의 총검에 의해 무차별 학살된 사건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국회가 그 국가적 범죄에 대한 배상법을 통과시켜서, 그 사자들이 명예를 회복하게 하였지만, 우리 산 자들은 이를 기억하면서, 그런 범죄의 재발을 꼭 막아야 하겠다. 

 

또 있다. 지금 강도만나 무참하게 죽어가며 신음하는 우리 이웃 미얀마의 문제이다. 군부가 저지른 살상은 완전 옛적 우리 제주4.3학살의 참상을 연상시킨다.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너무도 과격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동족을 마치 원수 다루듯 한다. 사망자가 수백 명을 넘어섰다. 

 

최근, 우리나라에 와 있는 어느 미얀마인의 증언이 생생하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대한민국이 잘 보여 주었습니다. 군부의 학살에 승리하면 우리는 대한민국이 되고, 패배하면 북한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덧 그들에게 롤(roll)모델이 되어 있다. 우리 또한 그들의 도움의 손길들을 외면할 수 없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서있다. 우리 교단도 대응하게 시작했다. 지난 금요일(3.19) 정오에 미얀마 군정을 종식하고 살인의 만행을 규탄하는 거리 기도회를 광화문 외교부 정문에서 개최한 것이다. 

 

이런 때, 우리는 다시금 예루살렘 입성에서 보여 준 예수님의 행보와 그에 따른 세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과 메시지를 경청하려 한다. 본래 ‘입성(入城)’이란 언어는 왕이나 절대자에게나 부여되는 특정 용어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입성과 거기에 걸 맞는 나귀를 타신 행위, 그리고 당신이 친히 ‘주(主)’란 표현을 제자들에게 일깨우셨던 일은 예수께서 당신의 신분에 부쳐질 ‘왕’(King)이란 별칭을, 공식으로 수용하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실 예수님에게 왕이란 직함은 처음부터 낮은 자로 오시고, 평생을 가난한 자로 사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셨고, 최후에는 흉악한 범죄자들이 처형당하던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임 당하신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도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무리들로 가득한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대상들을 상대할 그곳에 들어서시자 마자, 당신의 본래의 정체를 거침없이 드러내셨다. 왕의 행보에 걸 맞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그 칭호의 주인공이 서셔야할 자리로 과감히 들어서신 것이다. ‘때가 이르니’, 당신이 본래부터 왕(王)이셨음을 과감히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마2:1-11참조). 

 

그러면 왕이되 어떤 왕이신가? 세상이 원하는 제도적이고 규례적인 왕이 아닌, 온 만민의 양심과 가슴으로 인정받고 추앙받을 왕이셨다.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살리시는 왕이다. 없어도 무관한 왕이 아니라, 없으면 살 수 없게 되는 절대 필요한 왕이었다.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다. 훑어가는 왕이 아니라, 채워주는 왕이다. 전쟁과 다툼을 불러오는 왕이 아니라,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안겨주는 왕이다. 세상 왕과 대립하는 왕이 아니라, 그들을 온전케 하는 왕이다. 그래서 모든 왕의 왕 됨의 평가를 가져오게 할, ‘왕 중의 왕’이셨다. 

 

이 세상 역사와 백성은 모두 이런 제대로 된 왕을 접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의 왕으로서의 출현은 세상의 모든 왕이나 지도자들에게는 지도자의 진정한 롤(roll)모델이 등장한 셈이다. 그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는 백성의 희망이 되고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이 왕과 멀어지면, 그만큼 어리석고 못난 지도자가 된다. 왕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안의 가장도, 회사의 사장도, 공동체나 교회의 리더십도, 국가의 지도자도 모두 예수가 평가의 기준이 됐다. 

 

그들에게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영적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리더십을 위한 문제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 이론도 가능하다. ‘예수가 있으면 우리는 일류(一流)가 된다. 그러나 예수가 없으면 우리는 하류(下流)일 뿐이다’ 그러면, 이제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보여주신 예수님의 생생한 왕의 행보를 주목하면서, 우리가 본받을 길을 확실하게 찾아보자. 

 

복음서는 왕 되신 예수의 입성을 보여주며, 그들 좇는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구약 사무엘서는 세속의 왕인 다윗 왕이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참되신 왕으로, 자기는 그의 신하로’ 섬기는 모습을 통하여, 그가 왜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상위의 왕위를 보전하고, 메시아의 조상의 반열에 서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서신서는 이미 시내산 상징의 율법종교에서 벗어나,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새 예루살렘인 시온산 공동체가 된 성도들이 선 탁월한 위치들을 확인해 주면서, 믿음을 유지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o 먼저, 주님이 당신의 입성하실 준비를 주도(主導)하셨음을 주목하자(2절). 우선은 타실 나귀 선정이다. 주님은 예루살렘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 맞은편 마을에 ‘아직 누구도 타 보지 않은 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꼭 지목하며, ‘끌고 오라’고 두 제자에게 지시하셨다(1-2절). 거기에서 발생할 주인과의 시비에도 대처할 방안까지 일러주시면서, 당신의 입성을 완벽히 준비하게 하셨다(2-3절). 제자들은 그 지시대로 수행하였고, 준비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4-6절). 

 

1) 타고가실 나귀 새끼가 준비되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 주변의 헌신들이 급속이 모아졌다. 제자들이 옷을 나귀 등에 얹어 놓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아드렸으며,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들을 길에 펴면서, 나귀 등에 타고 이동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의 앞뒤를 따르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7-9절.상).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하-10절)

 

☞ 정말 뜨거운 함성(喊聲)이었다! 그토록 조상 적부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아가 지금 오셔서, 목자로서 자기들을 이끄신다고 믿기 시작했고, 또 그로 인하여 자기들은 이제 강대국의 오랜 억압과 통치의 굴레에서 해방 받을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찼겠는가?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왕의 추대(推戴)를 그토록 외면하시던 나사렛 예수께서, 또한 죽은 자 나사로를 살려낸 초능력자인 예수께서, 이제야 자신들의 간원(懇願)을 수용하여 당신이 왕이심을 드러내어(3절), 이끌어주시기 시작했으니,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터질 듯 벅차지 않았겠는가? 

 

o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 담긴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선택의 내용들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① 예수께서 스스로 ‘주(主)께서 쓰시겠다’고 하라(3절)는 말씀에는, 당신이 곧 ‘다윗과 연결된 오신 주’였음을 밝히신 일이다. 이점은 당신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 메시야였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성을 가진 참 메시야이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의 오실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왕대를 통하여야만 했었다(막12:35-37,시89:3-4참조). 

 

② 입성 시에 선택하신 ‘한 번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이야기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었던 아주 오래 된 슥9:9-10의 예언을 성취하고자 함이었다. 그 말씀에서 여호와는 오실 메시아는 말馬)이 아니라, 나귀를 타실 것을 분명히 예고하셨다. 이것은 오실 메시아는 세상의 왕이나 영웅들과는 아주 다른 임금이심을 예고하신 것이다. 전쟁이나 칼을 사용하는 세상 일반 왕과는, 아주 다른 왕이 등장할 것을 예고한 것이다. 

 

☞ 곧 전쟁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전쟁을 끝내는 화해의 왕으로 오실 분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는 오직 말씀만으로도 평화를 일구어내시고 보존해내실 권위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사9:6, 11:4, 미5:5참조). 세상의 모든 무기를 무력화시켜서, 전쟁이 더 이상 정치적 수단이 되지 못하게 하실 분이시다(사30:15-16, 호1:7,2:18, 미5:10참조). 이 능력을 드러낼 본격적인 메시야의 행보가 바로 예루살렘 입성과 갈보리 십자가를 향한 예수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③ 이런 메시아 예수를 향하여 백성들은 마음을 뜨겁게 열고, ‘호산나’를 외치며 따랐다. 호산나는 ‘도우소서’(help)란 뜻이다. 정치적, 경제적, 영적 곤경에 빠져 사는 자신들을 구원해달라며 외친 ‘호산나’였다. 입성하신 주님이 자신을 경배하듯 좇으며 외쳐대는 무리들의 외침을 어찌 가슴에 담지 아니하셨겠는가? 

☞ 추후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화는 그의 선교 명령을 통하여 온 세계에서 서서히 그러나 견고하게 성취되기 시작했다(마28:18-20절 참조). 

 

o 그리스도와 그런 그의 리더십을 가장 흠모하고 받든 이들에게는 큰 복이 주어졌다. 

☞ 무슨 큰 복인가? 왕의 조상이 되는 복, 그의 후대에서도 왕이 기리 이어지는 복, 아니 영원하고 참된 하늘의 왕의 인정을 받고 영원한 기림을 받는 복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 그 모델은 누군가? 왕 다윗이었다. 오늘 구약 본문의 다윗 왕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제2차 법궤(Ark) 운반을 성공시킨다. 제1차 때, 웃사의 실패로 인해 충격을 받아 한 동안 망설였던 다윗은(7절), 법궤를 모셨던 블레셋 성읍의 가드 이방인 오벧 에돔의 집이 여호와로부터 소유에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궤를 그의 집에서 자기 다윗 성으로 모셔온 것이다(12절). 그 과정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영적 메시지들이 있다.  

 

1) 법궤(언약궤)는 무엇인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법(증거판)을 담은 궤로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었다(삼상4:3-8, 출25:10-16), 하나님 임재(臨齋)의 상징이었다(2절, 출25:22,30:6참조). 한 때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결국은 다윗이 혼신을 다하여 예루살렘(다윗성)으로 모셔왔다. 그 행위 자체가 나라와 백성의 중심이요 근간으로 여호와를 모신다는 신앙고백이었다. 그 후엔 왕들의 정통성의 근거도 되었다. 

 

2)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뜨겁게 법궤를 모신 왕은 다윗이었다. 그는 세상의 왕인 자신 위에, 영원하신 하늘의 왕인 여호와가 계심을 신실하게 믿었고, 자신은 오직 그의 충성된 종이기를 소원했던 인물이었다. 다윗의 여호와 경배는 모든 세상 왕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시편(詩篇)에서 우리는 그의 뜨거운 신앙을 접한다. 이런 모습은 그가 비록 한 때 부끄러운 허물을 보였음에서도, 하나님의 사죄와 긍휼을 입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된 연유이기도 했다(행13:22참조).   

☞ 본문의 법궤 운반 과정에서 다윗이 보인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충성된 모습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다윗 왕의 믿음의 면면을 잘 보여준 행위일 뿐이다(13-15,16-19절 참조). 특히 법궤는 신령하기에, 운반 시에는 반드시 들지 말고 어깨에 메야했다. 웃사의 실패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고(7절), 그 점을 파악한 다윗은 즉시 그 부분을 고쳐서 성공했다(12,13,15,17절 등). 

 

3) 그 과정에서 다윗은 기존의 제사법을 넘어선 행보를 보였다. 자신은 유다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의 몫인 제사장 사역까지 집행하면서, ‘대제사장 왕’처럼 행보를 보인 것이다(13,17-18절). 이는 그가 옛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영접하고 축복하며 ‘대제사장 왕’의 행보에 의거(依據)했음을 선보인 것이다(창14:18-20,히7:1-3참조). 아울러 나중에는 히브리 기자가 유다 지파이면서도 세상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예수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칭하게된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히7:11-17 참조). 

 

o 이런 파격적인 행보가 비난이 아닌 칭송과 찬양을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 사랑(다윗)과 인간 사랑을 위한 행동(예수)이, 삼위일체에 의하여 그 어떠한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규례나 굴레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생명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공인(公認)받았다는 데에 있다. 

☞ 이런 변화는 히브리서에서 더욱 극명(克明)하다. 시내산의 구약교회(율법종교)의 모습과 예수 안에서 성도된 시온산교회(복음종교)의 모습에서도 아주 현저하게 차이가 나타났다. 이 차이 부분은 고난 너머의 세계까지 보여 주신 주님의 선물이기에, 우리가 크게 관심을 갖는다. 

 

1) 시내산은 구약교회의 외형적이고 지상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18-21절,출3장 참조). 이 교회는 제사장들만 한시적으로 접근이 가능하고, 일방인들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이는 어둠-공포-접촉불가성-죽음의 총체적 개념을 대변한다. 희미한 구원의 예표(豫表)만 보여줄 뿐이다. 

 

2) 반면에 시온산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이미 도달한 곳이며(22절), 실재를 맛보고 있다(요5:24참조).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며 하늘의 새 예루살렘으로서, 천사와 완성된 교회가 있는 곳이다(계21:2,갈4:26 참조). 만유의 장자(長者-firstborn)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골1:18), 이미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까지 기록되어(눅10:20) 구원 받도록 정해진 장자들이 모인 곳이고(23절.상),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 존재한다(23,하).  

 

3) 무엇보다도 그곳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그가 뿌린 보혈(寶血)이 있다(24절). 이 보혈은 보복(報復)을 부르는 아벨의 것보다 낫다(창4:10참조). 만물과의 화해(和解)를 이룰 능력이요 완전한 사죄를 가능하게 하는 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보혈은 절대 권위를 갖는다. 

 

o 그러기에 우리는 이미 성도된 이들로서, 예수의 보혈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시온산 교회의 가족이 된 성도들은 아벨의 피가 목표여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화해하게 하시는 예수의 보혈이 삶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나귀를 선택하신 예수, 대적자들까지도 포용하며, 화해의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방향을 목표로 삼자. 그래서 이 시대에 과제로 부여된 일치와 화해와 용서의 새 역사를 일구어 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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