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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씨뿌림주일

관리자 2021-03-30 (화) 22:00 2개월전 156  

본문)  눅23:50-24:12, 출14:15-31, 계1:10-18                            

 

오늘은 2021 부활주일이다. 앞으로 7주간 계속될 부활절기는, 우리의 삶의 현장을 생명력이 약동하는 전혀 새로운 무대로 펼쳐낼 것이다. 죽음을 이겨낸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되새김하는 절기도 될 것이다. 게다가 총회에서는 오늘을 한 해의 먹거리들을 생산해낼 절기의 시작으로서 씨뿌림 주일로 정하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그 의미를 되새긴다. 

 

본래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하늘씨앗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와 무덤이란 죽음과 흑암의 토양을 뚫고 살아나셔서, 변화된 새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하늘 생명체들을 이 세상에 출현시키신 주역이시다. 그의 변화된 부활체는 꼭 땅의 씨앗(seed)의 변신과 같았다. 씨앗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새 순(筍)으로 변화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때에는, 연약한 새 몸으로 시작하여 나무로 커가고 가지들을 뻗으며 꽃을 피고 열매를 맺어, 수많은 닮은 생명체로 번성하게 하는 변화의 옷을 입는다. 그러면서 그 씨앗은 자신의 생명과 역사를 중단 없이 이어간다. 

 

부활 예수도 이 씨앗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죽음을 이기신 그의 부활은 우리가 눈이나 육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나, 그가 부활 후 남기신 증언들과 특히 그를 닮은 열매들로 인하여, 그의 부활은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부활체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그의 부활의 몸체이다(마16:18참조)! 지금의 제도적 불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가 곧 그의 부활하신 증거체이다(엡4:15-16참조). 그 교회가 지난 2,000여년을 넘게 그의 살아계심을 온 세상에 입증한다. 

 

복음과 성령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씨앗들이다. 말씀과 성령(영과 진리/요4:23-24)이 지닌 불멸과 불사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의 역사를 이어 받고 사는 하늘의 씨앗들이란 말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교회를 대변하고 세상 역사를 갱신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변혁해 나아갈 지혜와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성서 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신앙의 메뉴들(창조신앙-언약신앙-구속신앙-해방신앙-화육신앙-고난신앙-부활신앙-종말신앙-재림신앙-영생신앙 등등)중에서도, 부활신앙을 가장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앙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이다. 기독교의 죽은 자의 일어남을 전하는 부활신앙은 매우 독보적(獨步的)이다. 이제 오늘 세 본문에 나타난 부활신앙에 과한 증언을 통하여, 왜 예수의 부활신앙이 이 세상과 인간 구원의 대안(代案)인지를 말씀드리겠다. 

 

o 부활은 본질상 사망(死亡)을 이겨내고 극복한 상태를 말하는데, 우리 기독교는 이 부활을 우리 신앙의 핵심으로 붙들고 있다. 예수의 부활로서, 베일에 가려져왔던 죽음을 넘어선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맛보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죽음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일, 이 자체가 너무도 놀랍고도 획기적인 일인가-!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미움과 폭력과 파괴와 짓밟고 군림하여, 결국은 상대를 꺾으면서 자신의 이익과 승리를 추구하는 무서운 곳이 아닌가? 그런 그들은 죽음을 자신의 최대의 무기로 삼고 있다. 그들의 입술에는 항상, ‘까불면 죽어-!’, ‘너, 죽여 버린다’라는 폭력 언어가 있다. 실재로 실력 행사를 통하여 상대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언제든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비참하게 굴복하고 비겁해지며, 무릎을 꿇게 된다. 

 

하지만 만일, 그런 포악한 자나 그 폭력 앞에 무릎 꿇는 자-, 모두가 ‘죽음 자체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되거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거나, ‘죽음을 이기는 무엇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어떤 일이 있을까? 그래도 계속 상대를 죽이려거나, 또는 피하려고 가면을 쓰게 될까? 아니다! 즉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죽어도 산다‘라는 차원의 세상이 알려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죽음을 통한 허망한 거래 인생도 끝나게 될 것이다. 

 

o 문제는 과연 누가 그런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 사건이 될, 죽음을 이겨낼 능력을 인간 세상에 선사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그게 사실이요 실재요 현실이 된다면, 그만한 복음(福音)과 그만한 위인을 필적할만한 대상은 달리 없을 것이다! 지구촌의 기존 질서의 대변혁은 필연적이며, 인간 존재의 생태 환경에도 대 변화를 유발해 줄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의 세 본문 말씀에 나타난 부활에 관한 증언들이 바로 그 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

 

바로 이 미증유(未曾有)의 역사혁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3일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 후 지금까지 우리 곁에 살아 계신다. 그 점을 이 세상 역사가 공인하였기에, 이 세상은 이미 세상 역사의 분기점(分岐點)을 예수의 오심의 전후(前後)로 구별 짓고 있다. 기원 전(B.C)과 기원 후(A.D)가 그 구분점이다. 

 

우리는 인류사에 죽음을 이겨낸 이 예수를 대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승리의 기쁨을 존재로 맛본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간의 최고 공포 대상인 사망 권세를 제압하신 모습과, 인간을 무한정 괴롭혀온 권세가, 그 분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그 뒤로 숨는 것을 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망권세는 아무나 맘대로 짓밟을 수 있는 절대적 실재가 아니라, 상대를 보고 힘을 행사하는 기회주의적 힘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갈림길 중심에는 바로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 예수가 계신다. 

 

o 오늘은 그 예수가 죽은 지 3일만이 무덤에서 산 자로 부활하신 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복음서는 죽임당한 예수의 장례와 3일 후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 이야기를 전한다. 

 

☞ 먼저 예수의 죽음과 장례(葬禮)에 관한 이야기이다(눅23:50-53). 예수의 장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주도했다. 그는 공회 의원인 고위직 인사인데, 선하고 의로우며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였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별세하자,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아직 누구도 장사한 적이 없던 바위 무덤에다 장례했던 인물이다(23:50-54참조). 

☞ 또 하나는 예수의 부활 현장을 찾은 여인들의 체험담이다(눅23:55-24:12참조). 무덤을 찾아간 그들의 관심사는 온통 죽은 자 예수와 그의 시신에 부울 향료 드림에만 있었다. 하지만 그곳 무덤에는 당사자인 예수는 없었고, 그 대신 그의 부활하심을 전하는 두 사람(천사-天使)만 있었고, 주께서 남기신 빈 무덤만 있었다(1-3절). 

 

☞ 두 천사들은 누군가? 나중에 주님의 승천 시에 하늘에 오르는 주님을 쳐다보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주님의 다시 오심(再臨)을 예고했던 바로 그 천사들인 것을 보면(행1:10참조),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대비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파송된 종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들은 자신들에게 엎드린 여자들에게 예수 부활에 관한 매우 충격적인 두 가지 당부를 전했다.  

 

1)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무덤)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5절.하-6절.상).  

2)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記憶)하라’(6절,하). 

 

☞ 이 말은 무슨 내용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그의 부활 자체가 본래 예수의 예언대로 된 하늘 사건이었음을 알고 만나기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부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7절, 눅9:22참조). 그래야만,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을 허상이나 꿈 경험 정도로 보지 않고,‘약속된 말씀’에 따라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로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이 천사의 이러한 요구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침이다. 약속의 말씀에 대한 기억과 그 성취로서의 부활을 믿게 될 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실재를 만날 수 있을뿐더러, 그 이후에 이어질 다양한 영적 차원의 영역들인 승천-종말-재림-심판-영생 등에도 참여할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의 주의 몸 된 교회는 기억과 믿음 공동체임을 잊지 말자. 

 

O 주목할 일이 더 있다. 곧 부활 이후의 주님은 부활 이전의 모습과는 또 다른 차원의 메시야 활동을 계속하신 일이다. 먼저 당신 이후의 하나님의 선교를 이끄실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과 세상에 보내시고, 그 성령과 함께하는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敎會-에클레시아)들을 출범하게 하신 일이다. 율법종교인 유대교으로서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셨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앞세워 당신을 닮은 출애굽의 무리들-, 곧 악에는 죽고 의에서는 다시 부활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집단적으로 생산하는 기반 구축에 전념하셨다. 그 영역은 예루살렘-온 유다-사마리아-땅 끝까지 품는 온 세상 구원을 향한 네트워크였다(행1:8 참조). 

 

o 출애굽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도강(渡江)을 통하여, 전 민족적인 죽음(무덤)과 살아남(부활)을 경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출14:15-31), 부활절에 받는 이 출애굽기의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스라엘 민족이 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는 지를 밝히는 자료들로 보면 좋겠다. 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받은 백성 됨의 영원한 기억(記憶)의 통로요, 자신의 신앙을 되살리는 기반을 제공하는 대들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1) 이 홍해 도강의 건은 그 후, 이스라엘 종교과 역사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택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체성을 부여한 결정적인 기반(基盤)이요 씨앗이 된다. 즉 출애굽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記憶)하고 사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맞느냐 여부와 함께, 자신들의 신앙 생존 여부를 확인하는 기준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숱한 신앙의 굴곡(up and down)이 있을 때마다, 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자기 조상들에게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시 그런 은총의 역사의 재현을 기원하며 살아왔다. 

 

2)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출애굽의 도강 사건을 매우 적절하게 신학적인 해석을 해주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을 집단적인 세례(洗禮)를 받은 것으로 보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상속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고전10:1-2참조). 출애굽을 통한 집단적 세례 의식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기초적 성례(聖禮)를 받은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바울의 증언을 다시 확인하자.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하늘 본향과 보좌에 오르신 일들을 통하여, 제자들의 시야와 믿음을 세상 현장만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까지 더욱 활짝 열어서 보게 하셨다. 제약된 육체적인 죽음에다 마음을 두지 말고, 그 너머로 활짝 열려있는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도 마음을 두면서, 거기에 들어갈 걸맞은 성도들로 이 땅에서의 삶을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독려하셨다. 부활신앙을 생명의 씨앗으로 받은 이들은 영원한 나라 백성다운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O 부활하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영원한 본향(本鄕)에서 천상의 주님으로 계신다(계1:10-18절).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처음과 나중의 주이시다. 인간의 과거-현재-미래 역사는 물론, 시간 너머의 영원의 주로도 계신다. 진정 영원한 생명의 주로 계신다(11절). 그러면서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이 땅의 역사의 흐름과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을 주시(注視)하면서 복음과 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응원을 보내고 계신다(11절). 

 

☞ 성령의 감동(感動)을 받고 하늘 보좌에까지 올라서, 그곳에 계신 주님 앞에 선 요한 장로는, 거기에서 뵌 주님의 놀라운 특징(特徵)적인 모습을 그의 소아시아 7교회들에게 전한다(11절). 그것은 ‘전(前)에 죽었던 이’라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흔적(痕迹)을 보좌에서까지도 안고 계신 주님의 모습이었다(18절). 이런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서의 죽음의 흔적을 보유하신 주님’의 역설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시려는 걸까? 

 

☞ 지상에서의 당신의 거룩한 섬김과 십자가를 통한 죽음에의 승리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심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세상과 당신의 교회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뜨거운 주님의 관심과 연대의 마음의 표시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의로운 고난, 복음과 함께 정의, 평화, 생명을 위하여 이 모든 악과 불의의 세력과 싸우며, 탄식하며 상처받고 죽어가는 당신의 전사들에게 큰 응원과 격려를 보내시는 부활의 주님의 마음의 흔적으로 보여서, 우리로서는 큰 위로가 된다. 

 

☞ 절대 잊지말자. 우리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전에는 죽었으나 이제는 살았다'의 자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기억의 끈을 그 나라에 갈 때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은 얼굴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셨다(16절) -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절) 

 

O 부활의 예수로 인하여 강고히 닫혔던 복(復)낙원의 문은 이제 활짝 열렸다. 우리를 위해 은총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에, 주님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삶의 대혁명이 요청된다. 어떤 삶인가?

☞ 한 알의 밀알로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겠다. 역사를 이어주는 하늘의 씨앗으로, 하늘로부터 온 예수를 닮은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겠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뿌려지는 영역에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일에 힘써야 하겠다. 세상의 빛이 되어, 하늘 백성의 생명을 지닌 자의 본을 보여야 하겠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선에는 어른이 되어야 하겠다. 무엇보다도 ‘죽어서 사는 방법’인 십자가를 지는 삶과 부활과 그것이 안겨 줄 영원한 삶에 참여하도록 깨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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