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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3-16 (화) 20:46 3개월전 175  

본문) 요 11:47~57, 레 16:1-10,20-23, 히 9:11-1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코로나19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백신 면역주사 맞기가 한창이다.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그러면서도 저 미얀마의 군부들의 폭력 사태가 악화되면서, 발포로 인한 사망자만 200명이 넘어서고 부상자도 부지기수라는 소식이어서,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정권 찬탈의 변(辯)도 황당하다. 총선거에서 집권당이 압도적 승리로 재집권이 되니까, 거기에 부정선거가 개입되었다면서 자기들의 바로 잡겠다면서, 국권을 그렇게 약탈한 것이다. 

 

배후는 모르지만, 그간의 미얀마가 친미 쪽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국이 그 군부와 결탁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래서 그런지 유엔 안보리에서의 중국이 그 군부에 대한 국제적 제재에 매우 소극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미얀마 국내 문제라는 이유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불법과 폭력으로 힘없는 국민들을 총검으로 살상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이웃이 아니다. 요즈음은 가정 안에서까지 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뛰어 들어가 그 폭력자를 체포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가장 뜨겁게 반발하고 그들 군부에게 항의하기 시작한 이웃은 우리 한국인 듯하다. 우리는 이미 그 아픔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국민들이 저들 군부세력에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교단도 이 저항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집단이나 공동체는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그곳에 담긴 이념이나 목표와 가치가 무엇이냐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집단 이기심과 탐욕과 배타심으로 뭉친 집단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 역사도 한동안 군부세력의 잘못된 행태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해왔던가? 그들은 일제 군정의 흐름을 이어오다가 권력과 총칼의 맛에 취하여, 국민 위에 군림하여 한동안 취해 살았다. 그들은 반공, 지역주의, 재벌 중심으로 나라를 이끄면서 너무 큰 후유증들을 남겼다. 

 

그 후에 우리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과의 싸움들을 계속해오고 있다. 정보부-국정원-기무사 등으로 이어지는 세력들이 그들이었고, 그것을 촛불 혁명으로 넘어서면서 지금은,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의 산맥인 수사권-기소권을 독점해 온 검찰 권력의 산과 씨름하는 중이다. 얼마 전 물러난 전 검찰총장인 윤석렬은 현대 정치검사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는 ‘국민에게 충성한다’는 말로 임기를 시작했지만, 그가 지난 2년간 우리에게 보인 모습은 정의와 공정이 아닌, 자기 검찰과 권위 지키기에만 충성한 자였다. 그 바람에 검찰개혁을 집권의 소명으로 알고 검찰 개혁에 몰입했던 정부여당으로서는, 그에게서 뒷퉁수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그를 계속 비판하니까, 그는 ‘현 정권으로부터 맞서며 박해받는 총장이다’는 인상을 받아내면서, -국민을 위해 수고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도-, 퇴임 후 그는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자랑하는 중이다. 참 어처구니없다. 진짜 코메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현 정부의 아쉬움과 부족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국민들은 이제 상황을 잘 분별해야 한다. 현 정부는 민주주의 가치를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하여, 그 걸림돌인 내부 권력기관들의 개혁을 소명으로 알고 집중하는 바람에, 뜻밖에 내상을 크게 입고 있다. 정권교체는 했으나, 그 하부 구조들인 공무원들까지 개혁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이번의 LH사건도 단적인 예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아직 큰 개혁 대상이 남아 있다. 바로 보수언론 집단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탁월함을 알 수 있는 길은 외신을 들어봐야만 가능할 정도이다. 국내 보도들은 아예 안팎의 반가운 소식들은 외면해 버린다. 왜 그렇게 되었나? 모든 기득권의 총본산 격인 현 보수언론은 현 민주당의 개혁 정권과는 가치와 이념이 너무 다르다. 저들은 현 정부와 지금 전쟁하고 있다. 저들은 가치가 아닌 이익을 위해 싸운다. 이번 서울. 부산 시장 선거도 여. 야당의 싸움이 아니다. 여당과 완강한 보수 언론과의 싸움판이다. 

 

특히 현 정권에 보신의 위기를 느낀 보수언론들의 현 정부 공격은 상상을 넘어선다. 저들은 이미 언론의 균형 잡힌 보도를 포기했고, 오직 문재인 정부의 장점은 외면하고, 허물과 문제점을 집중하여 깨내고 공격하기에 전념하고 있다. 야당들보다 훨씬 치열하다. 윤석열은 그들을 보호했고, 그들 보수 언론들에 의해 옹호받은 인물이다. 지난 추미애 전 법무장관 때, 총장이 조중동 언론사 사주(社主)를 개별적으로 만난 것을 심각하게 문제 삼았던 것도 그 연유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오래 방해해온 거대한 권력 카르텔인, 군부-재벌-검찰-언론기관들의 힘의 집중을, 저지하고 개혁하며 민주화시키기 위한 행진을 해오고 있다. 이것을 이룰 수 있는 동력은 역시 깨어 있는 우리 국민들이다. 특히 기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 만일 이들 카르텔의 힘의 결집들을 허용하게 되면,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특정 세력들의 불의한 힘의 지배를 받는 미얀마처럼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는, ‘진전이냐 퇴보냐’의 큰 경계선(境界線)에 서 있다. 

 

 

o 그러면,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만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바로 유대교와 이스라엘 권력층의 최상위 카르텔 구조인 공회(公會), 곧 산헤드린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현장을 향하고 계셨다(47절). 즉 당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세력들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고 계셨다. 그 바람에 두 거대한 힘의 충돌이 임박한 순간이 되었다. 하늘의 힘과 지상의 힘의 충돌이다! 

 

☞ 산헤드린(마5:22)은 유다 공동체의 최고 관청으로서 그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유력한 제사장들, 지도적인 서기관들, 장로들과 명망 있는 평신도의 무리를 대표하는 남자만 71명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정권은 그들에게, 정치적 권력이 아닌 종교적인 권위와 결정권만 허락하였다.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신앙상의 구조와 정치적 입장을 가졌으나, 회원으로는 하나였다. 

 

☞ 오늘 본문은 그 산헤드린을 초긴장(超緊張) 상태로 몰아넣은 사태가 발생한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자, 긴급 소집된 공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매우 긴박한 사안 때문이었는데, 대체 어떤 일 때문인가? 상정 안건은 바로 나사렛 예수와 그로 인하여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부활한 일(요11:43-44)과, 그로 인하여 야기된 예수 추종과 믿기 운동이 퍼져가고 있는 일과, 그로 인한 후유증과 그 대응책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47-48절,12:9,11,17-19 참조). 그들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내용과 본질, 그리고 문제점을 살펴보자. 

 

1) 일단, 나사로의 부활(죽은 자의 부활)이 가져다 준 <예수 운동>은 그들을 아주 불편하였다. 비록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① 무엇보다도 ‘죽은 자가 부활했다’라는 부활사건 자체가 준 일이 곤혹스러웠다. 그 일은 설이나 소문이 아니라, 실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그 다음에 올 예수의 완전한 부활을 향한 예고편(豫告篇)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온 하늘 사건이었고, 동시에 부활한 자(나사로)의 출현을 맛보게 한 일이어서, 그들로서의 아직 정리가 되지 못한 일이었다. 우왕좌왕이 맞다.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은 낡은 역사에는 핵폭탄과 같았다고 본다.

 

② 그 파장(波長)을 두려워했다. 예수와 그의 부활운동을 방치한다면, 유대교와 함께 그들의 종교적 권위는 뿌리째 흔들릴 것으로 보았다. 그들 중 사두개파는 부활 자체를 부정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부활신앙을 시인하는 자들이었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활할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에 의하여 실재로 죽은 자가 부활하는, 그것도 백주에 무덤의 입구로 죽은 자를 불러내 살려낸 것이다. 그것도 저 거리의 랍비였던 나사렛 예수가 살려냈다. 자기들로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한 것이다. 초라해진 자신들을 목격했다. 이 일이 온 땅의 핫뉴스가 되었고 백성은 예수를 자신들의 희망으로 보게 된 일이었다. 

 

☞ 하지만 그 부활을 현실로 수용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인색했고 무지했다. 불신앙도 컸다. 특히 나사렛 예수를 인정할 여지는 전무였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남은 일은 정치적 계산뿐이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와 그의 사건을 덮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과 육체의 힘으로 신앙의 영역을 짓밟고 가야할 폭력(暴力)의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정상적이라면, 그 부활의 주 앞에 경배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자기들은 결코 저 동방박사들(마2장)과 같은 수는 없었다! 

 

☞ 미얀마의 군부와 우리에게도 그런 낯 뜨거운 역사의 죄를 저지른 폭력자들과 종교인 협력 자들이 많았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나 선택은 과연 어떨까? 내가 못하는 일을 상대가 하고, 새 인간의 등장(부활 인간)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냉소자로 그들 곁에 선 것은 아닌가? 

 

2) 국가의 위기와 안위도 생각하였다(48절). 만일 백성들이 그 예수를 메시아로 간주하여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 예수도 그 백성들의 열망을 수용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들 유다는 로마 군사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아 전국이 초토화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런 판단 역시 나사렛 예수가 누군지를 모르는 데서 온 것이었다. 진리와 평화의 주로 오신 분이 그런 세속적인 정치적 선택과 힘의 우위라는 방식으로 세상의 왕이 되시려는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면 예수의 선택이나 방법은 어떤 것일까? 세상 방식은 어느 하나를 취하게 되면서 상대는 포기해야 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로마정치가 그런 방식이었고, 유대교 지도자들도 그 방법만 생각하였다. 그보다는 제3의 길, 곧 그 어느 쪽의 선택과 버림에 의한 승리의 방식이 아닌, 제3의 길- 오직 참 구세주만이 보여줄 하늘의 방식, 즉 이쪽저쪽 모두를 다 함께 품고 살릴 길이었다, 그 출입구는 이것이었다. 

 

4) 그들 상대 위에 군림하면서 만드는 길이 아니라, 그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며 희생해야만 형성될 그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양심을 부끄럽게 해야만, 보이게 되는 매우 좁은 길이었다. 갈보리 십자가(十字架)의 길이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그 길이 있다고 증언한 자가 있었다. 바로 그들 공회의 수장(首長)인 대제사장 가야바였다. 그도 엉겁결에 토해낸 말이었지만, 아주 역사적인 증언(證言)이 된 말이었는데, 다시 들어보자.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절). 

 

5) 그의 이 말은, 예수의 죽임 당함이 그들만의 유익이 아니었다. 온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로 구원받게 되는 원대한 일이었다(51-52절). 결국 그 공회는 대제사장의 언급을 처리 방안으로 받아서, ‘예수를 죽이기로 공식적인 결정’을 하고 공개 수배에 들어갔다(53,57절). 예수는 잠시 에브라임에 머물고 계셨으나, 장안의 관심사는 온통, 이런 판국인데도 과연 예수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 것이냐는 데에 집중되었다(54-56절). 

 

 

o 그런데 예수의 이런 대속적 희생의 방식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었음이 구약의 제사법에서 밝혀졌다. 유대인에게 일찍이 자리한 독특한 대속죄일(大贖罪日) 제도 속에서, 이미 ‘아사셀 염소’(scapegoat‘희생양)의 의식(儀式)이란 내용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레16:5-10, 20-22절 참조). 그러면 아사셀 염소란 무엇이며, 아사셀 희생 제사의 목적인 무엇인가? 

 

1)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용으로 숫염소 두 마리, 번제용으로 숫양 한 마리를 취한다(5절).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하여 수송아지도 드리면서, 자기와 집안을 위한 속죄도 함께 드린다(6절.상). 문제는 두 염소 처리하는 일이다. 제비를 뽑아, 두 염소 중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로 드리고(8-9절), 나머지 하나는 아사셀를 위한다. 이 아사셀은 산 채로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광야(廣野)로 보낸다(10절). 그래서 ‘속죄 염소’라고도 칭한다. 

 

2) 대제사장은 광야로 그 염소를 보내기 전, 염소 머리위에 두 손을 얹고 안수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범죄를 전가시키는 예전을 집행한다. 그래서 온갖 백성들의 죄악을 전가(轉嫁) 받은 염소는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광야 깊숙한 곳(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간다.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20-22절, 요1:29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의식을 자신의 죄악을 분리시켜 멀리 떠나보낸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였다(사53:6참조). 하나님께서도 이제 이스라엘을 ‘죄 없는 자’로 보신다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o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숭고한 희생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했다. 즉 그런 주님의 십자가 피의 희생은, 그 동안 피조물로서 허무한 데 굴복당해 왔던 짐승들 제사를 끝내게 하고, 그 대신 당신의 육체로 영원한 속죄(贖罪)를 이루고, 또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의 거룩한 행위가 되어서(12절), 구원의 새 문을 활짝 열게 하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걸음마다 역사와 세상의 운명이 새롭게 형성되는 순간임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인간의 범죄를 때우기 위한 피조물(짐승)의 애꿎은 희생들이 종료된다(12-13절). 이는 인간이 예수의 그 보혈이 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양심의 할례를 받게 되어, 부패한 생각과 언사와 행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계속 깨끗하게 섬길 수 있도록 된 일과 맞물려 있음이 확인된다(14절).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으로, 피조물들이 오랜 탄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말하며(롬8:19-21), 완전히 거듭난 주의 자녀들도 에덴에서의 첫 언약으로 인한 범죄에서의 속량도 얻게 되어, 영원한 기업(안식/복낙원)에로의 재진입(進入)도 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한다(15절). 

 

 

o 우리 주 예수의 가신 길을 다시 보자. 그 분이 서신 구원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다시 보자. 우리의 분별력 없는 치우침도 경계하자. 주님은 결코 세상의 위협에 외면도, 타협도, 굴복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위에서 그들의 회개와 변화와 하나 됨을 견인할 길을 제시하고자 하셨다. 바로 속죄하는 일, 대속하는 일, 하나님의 참 사랑과 구원을 맛보게 하는 일을 찾아 실천하셨다. 인간의 편 가름에는 구원도 없고 화해도 없다. 그들을 묶어낼 십자가를 매자. 그래서 주님의 모통이 머릿돌의 삶을 선택하며 들어가자. 흔들림 없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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