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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승천주일-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주일

관리자 2020-05-12 (화) 11:29 3년전 939  

본문) 요 16:1~15, 신 34:1-8, 행 1:1-11

 

부활절 여섯째 주일을 맞이했다. 계절로는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낮의 더위는 어느 덧 초(初)여름이다. 하지만 국내 상황들은 이제야 코로나 상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상의 거리두기로 진일보하였고, 우리 아이들도 학교출입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야구를 비롯한 국민 스포츠들이 개막하면서, 세계적인 주목과 부러움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제야 일상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지만, 모두가 새로 받고 새로 깨어나는 느낌이다. 

 

금주는 우리 교단이 광주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로도 지킨다. 동시에 세계교회와 함께 예수 승천(昇天)주일도 겸하여 지킨다. 사실 지난 달 4월과 이달인 5월에 걸쳐서는 유달리 앞서 간 자들을 추모(追慕)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4.3제주학살대사건, 4.16세월호참사사건, 4.19의거 및 혁명,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억울하게 떠나간 이들과의 이별(離別)에 대한 기억과 아픔을 함께 한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과제는 이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그 일을 아파만하고 분노만 할 것이냐는 점이다. 그것을 승화(昇化)시켜서 더 큰 의미와 발전의 기반으로 받아들이게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아픔을 아픔만으로 끌고 가거나 끝낼 수는 없잖은가. 이제는 그 차원의 기억들을 끝낼 터널과 출구를 찾아야할 때이다! 곧 부활(復活)의 길이 보인다면, 그 쪽으로 과감히 나아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 그 사건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공정한 심판은 속히 내려져야만 한다. 더 이상 떠나간 이들을 향한 추모를 분노 속에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慰勞)와 감사(感謝)와 함께 희망(希望)속에서 맞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즉 가신 이들을 향한 추모예식을 더 이상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나 억울함에 대한 고발의 장이 아닌, ‘민족 통일의 밀알과 성숙한 민주국가 탄생의 희생의 씨앗이 되게 한 그들이었다’라고 승화된 평가의 무대가 되도록 해야만 하겠다. 

 

우리는 그런 차원의 승화된 모델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서 맛보고 산다. 보라!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그로 인한 죽음은 진정 얼마나 힘없고 억울한 자들의 참상을 대변한 사건이었나? 하지만 그의 후대 증인들과 교회들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 문제해결의 출구를 찾아냈다.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었던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짓밟힘과 짓눌림의 모순된 역사를 넘어서,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며 하나 됨의 역사로 나아갈 길을 찾아낸 것이다(행2:14-42참조).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인류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와 화해와 구원의 표징들로 승화시키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그 아래로 모이게 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승화된 모습이 예수 제자그룹 안에서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피해(被害)자 그룹은 바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인 갈릴리 출신인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단이었다. 반면에 가해(加害)자 그룹은 바리새인이자 디아스포라(교포) 계열로서 예수 제자단에 참여하게 된 바울을 비롯한 일련의 선교 그룹들이다. 이들은 원래 물과 기름과 같이 하나 될 수 없는 배경들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성령과 초대교회는 바로 이 상극된 두 그룹들을 하나로 묶어냈다(행9장 참조). 부활 예수의 넓게 열린 품으로 이 둘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 바람에 이 둘은 서로를 살려냈고 키워냈고 구원 종교의 주역으로 역사를 구원하는 생명세력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이 화해와 부활의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끄러운 역사적인 참사(慘事)들에게 예수 부활의 옷을 입히는 작업 말이다. 그 일련의 아픔들이 조국의 새로운 발전과 성장을 위한 십자가의 밑거름으로 보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제가 우리 한국교회와 4.15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 정부의 과제라고 보인다. 선거 후에 문대통령이 던진 한마디가 기억 된다. - ‘이번 선거에는 세월호의 정신적 유산이 담겨 있다’. 그렇다. 앞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죽음의 의미를 살려내는 몫(부활시키는 몫)은 산 자인 우리들, 즉 교회와 하늘 백성들이 감당해야만 할 몫이다. 이 점을 절대 잊지 말자!

 

이를 위한 교회의 설교와 신학적 해석 작업에는 다음 두 가지 차원들은 꼭 담아내야 하겠다. 하나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설교와 해석에 능해야 한다. 부활 신앙의 힘을 극대화시킬 능력이 요청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부활과 그 미래 즉 승리와 영광을 여는 길을 향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둘은 독자적이지만 동시에 쌍방 통행적인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1) 먼저 죽은 자들(死者)을 생각해보자. 죽은 자들은 정말 죽은 것인가? 죽어서 정말 끝난 것인가? 자연사나 무가치한 죽음이 아닌 죽음들, 즉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죽음들, 특히 타자에 의해 억울하게 생을 단절(斷切)당하거나 모두를 위해 희생당한 죽음들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의 피가 창4:10의 아벨의 경우처럼, 죽어도 죽지 못해 조물주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야당(野黨)이 왜 계속 선거에 연패하는 줄 아는가? 죽은 자의 소리와 외침을 강제로 땅에 묻거나 외면하거나 왜곡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2) 사자(死者)는 사자(使者)이다. 사자(使者)로서 죽은 자는 절대 침묵하지 못한다. 말을 걸어오고 행동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떠나서 알고 쓰러져서 비로소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국회의 입법(立法)을 이끌어낸 사자(死者)들이 제법 있다. 말로는 안 듣기에, 죽음이란 행위로 외친 이들이 그들이다. 1971년 청계천의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이 바로 그런 자였다. 요즈음도 김용균이 그 사람이다. (우리 부모들도 그러하다. 부모님은 세상 떠나신 후에 더욱 자식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구순의 형님이 ‘내가 왜 부모님 생전에 좀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가’라고 자탄하며 눈물로 탄식하는 모습에 놀란다). 

 

3) 그들의 죽음은 파장이 크다. 전태일은 세계 신학시장에 민중(民衆)신학이 생산되게 하였다. 우리 현대사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준 파장도 얼마나 심대한가? 5.18광주민주화와 세월호의 희생자들은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더욱 그렇다. 그는 죽음으로 이 지구촌과 인류사에 미증유의 파장을 던져 주셨다. 그는 죽임당하면서 오히려 산 자와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罪)의 문제, 불의(不義)한 삶의 문제, 심판(審判)을 외면하는 삶을 향하여 심각한 경고를 보내는 바로미터(barometer/지표)가 되셨기 때문이다(요16:8-11절 참조). 

 

예수께서 이런 구원자의 위치에 오르신 것은 고난과 부활 차원에서만 거론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몸과 삶이 이 땅을 떠나셔서 하늘에 오르심(승천)으로 이어지셨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계교회가 지키는 승천 주일은 우리 신앙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어떤 차원에서 예수 승천이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문이 되게 한 일이었을까? 

 

승천(昇天)의 우선적인 의미는 예수께서 죽음의 영역을 완전히 이겨내고 영원한 승리와 기쁨을 취하셨다는 데에 있다. 만일 예수에 대한 증언에서 부활만 있고 승천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자 되신 예수와 그의 본향의 나라를 바라볼 수 없어서 영생(永生) 신앙을 보유할 수 없을뿐더러, 다시 오시고 만나게 될 그를 고대하며 깨어 살아가는 재림(再臨)신앙이나 종말(終末)신앙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의롭고 건강한 삶을 지탱할 동력(動力)상실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예수 승천은 성자(聖者)시대에서 성령(聖靈)보혜사(保惠師)의 시대를 잇게 했다. 예수 종교를 탈(脫)유대교화(化)하며 세계 생명종교로 뻗게 해주었다. 지역종교에서 세계종교로 거듭나게 하였다. 교회와 증인(설교/해석/진리연구/체험 등등)의 시대의 개막도 안겨 주었다. 특정인(제사장)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의 신앙세계도 활짝 열어 주었다. 

 

주님의 떠나심은 눈먼 우리에게는 눈을 뜨게 하는 축복이었다. 믿는 우리의 편협했던 인생과 삶의 지평(地平)을 무한히 확대시켜 준 구원이었다. 땅과 하늘을 동시에 품고 살게 하였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떠남을 통하여 현재와 과거를 다시 보게 하고, 현재를 건강하게 추동(推動)하여 미래(未來)의 삶이 영광에 이르도록 돕기 때문이다.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별하여 살게 하신 선물이기도 하였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별(離別)을 대비하게 하신다. 당신의 떠남으로 제자들에게 야기될 실족을 예방하고, 오히려 이별의 유익을 극대화시키려 하셨다(7절). 당신이 보내실 보혜사인 성령이 그들을 어떻게 돕고 변화시키며 어떤 세상을 열게 할 것인지를 제시하면서-(8-15절 참조).

 

1) 주님은 당신이 떠나서 예상되는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을 미리 보셨다. 유대 공동체가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출교나 처형과 같은 가혹한 제재(制裁)들을 가하리라고 보신 것이다(행12장). 그 박해 이유들도 설명하셨다. 그들이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그 일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절대 대비가 필요했다. 

 

2) 대안(對案)은 무엇인가? 제자들이 품게 될 모든 근심과 고난과 두려움을 가볍게 넘어설 보다 크고 담대한 비전과 확신이었다. 그 결정적인 대안은 바로 보혜사(保惠師)의 오심이었다! 보혜사는 그들 안에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예수’로 살게 하실 분이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헬)는, 본래 ‘변호사, 조력자, 원조자, 위로자, 상담자, 교사’ 등등의 기능(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인 분이시다. 아들 되신 주님이 보내실 분으로서, 제자들과 늘 함께 있고 안에도 계셔서 극복하게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7,14:16-17참조). 

 

☞ 세상에 오실 보혜사는 죄와 의와 심판을 놓고, 세상에 깨달음도 주고 책망도 하신다(8-11절). 본래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은 받은 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것을 말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께로 들은 것을 말하고 장래 일을 알리신다(14-15절,14:17,18:30 참조).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예수의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신다(13-15절). 그러기에 예수의 증인된 이는 오직 성령 보혜사를 받는 일이 절대 필수요건이다(행1:8). 성령은 우리에게서 예수의 권능(power)을 드러내게 할 능력자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를 그의 백성과 이별(離別)하게 하시는 장면을 전한 내용이다. 그때 그의 나이 120세였고, 그의 눈이 아직 흐리지 않았으며, 그의 기력 역시 쇠하지도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의 생과 활동을 거기에서 접게 하셨다(7절).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세가 백성들의 오랜 반역 행위들로 성질이 거칠어지고, 급기야는 가데스 므리바에서 여호와가 베푸신 능력을 마치 자기의 능력에 의한 것처럼 과시하는 일까지 발생하자(민20:12절 참조), 여호와는 당신의 거룩함을 더 이상 잘 드러내지 못하는 모세를 ‘거기까지’로 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던 종이었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시듯이 여호와와 대면하였던 사람이었다(출33:11,민12:6-8참조). 그러기에 비록 도중하차(途中下車)되어, 그의 생이 마감되고 가나안 정복의 대임(大任)도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넘기게 되었을지라도, 모세는 여호와로부터 버림이 아닌, 따뜻한 배려와 위로를 받는다. 

 

1) 그를 비스가 산꼭대기에 데려가셔서, 머잖아 그들 백성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 전체를 미리 보도록 배려해 주셨다(1-4절). 즉 모세에게 미리 들어갈 땅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마치 성령 보혜사처럼, 여호와가 모세에게 ‘장래(將來) 일’을 미리 알려주셨다(요16:13하 참조). 

 

2) 그의 모압 골짜기에 장사된 묘지(墓地)를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 하셨다(6절). 마치 예수의 빈 무덤의 느낌(?)을 갖게 하셨다. 그의 시신이나 몸을 땅에서 찾지 못하게 하심으로서, 모세를 땅의 영웅으로 남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모세에게도 예수의 승천의 낌새(?)도 남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로 그를 세워 주신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복음서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예수님의 떠남과 승천(昇天)의 막전막후(幕前幕後)에 발생했던 일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증언들은 누가복음의 기록자(記錄者)이면서 의사이기도 했던 누가가 전한 것으로서, 다음의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내용들을 치밀하게 담아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40일간의 체류를 통하여, 당신을 알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2) 주님은 사도들에게 그 기간 동안에 준수해야할 두 가지 사항을 분부(分付)하셨다(4-5절). 

  ①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②성령을 기다려서 며칠 후에 임할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3) 성령 세례를 받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나? - 권능(power)을 받고 예수의 증인이 된다(8절).

 

4) 말씀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본향(本鄕)인 하늘로 올려져(승천) 가셨다(9절). 

5) 위만 쳐다보던 제자들에게 두 천사들이 곁에 와서, 매우 놀라운 예고를 하였다(11-12절).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 재림(再臨)이 통보되었다!

 

결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고 사는 우리는 반드시 성령 보혜사를 받아야 한다. 고난과 부활의 영이신 성령과 동행해야 우리도 주님을 다시 뵈올 때까지 그의 고난을 걸머지고 그의 부활 신앙의 능력자로 살아가게 됨으로서, 그의 증인(證人)이 된다. 승천과 재림 신앙에 굳건히 서서 종말을 살자. 영광과 영생으로 열린 그 세상을 선택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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