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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4-1) - " 위대한 명령을 받드는 교회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0-06-25 (목) 16:27 3년전 1135  

본문) 행 16:6-15, 마 28:16-20, 욘 3:1-4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넷째 주일입니다. 여름 무더위도 본격화되었습니다. 코로나19의 위협마저 가중됩니다. 그런데 이런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요즈음 우리 현장 교회들의 행사들이 매우 다양하고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 정기노회에서 교회들이 소속노회에 올린 각종 청원 사항들이 노회의 허락을 받음으로서 가능해진 것들입니다. 

 

어떤 일들이 노회와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습니까? 교회를 창립하거나 설립하는 일, 교회의 다양한 현황을 점검하는 일, 목사를 임직하고 파송하며 각종 역할을 부여하는 일, 목사후보생을 관리하는 일,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보고를 듣고 격려하는 일, 해외 교회와의연대를 위한 행사들을 진행하는일, 노회 재산과 선교 상황을 관리하는 일, 상회 기관인 총회(總會)의 위임 사항을 결정짓는 일, 그리고 개 교회에서의 중직(重職)들인 장로와 권사 또는 안수집사를 임직시키는 일들 등등입니다. 

 

본래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교회를 세우신 영이고, 선교하게 한 영이었으며, 각종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이끄신 영이었잖습니까! 비록 통계상의 집계는 없었으나, 아마도 상당히 많은 한국교회의 창립(創立)일이 이 이 강림절기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 흐름에 있는 우리교회의 창립일도 1986년 6월29일인데, 이 또한 성령의 작품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자신이 성령 안에 있는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건강한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을 충만히 받은 만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이기에, 비양심적이고 불량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받았던 말씀대로, ‘진리(眞理)와 평화(平和)를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를 반드시 이뤄냅시다(슥8:19하).

 

이 일들이 가능하려면, 내 신앙의 중심에 ‘예수가 진리이시고 예수가 온 세상의 참 평화(화평)’(엡2:14-18)이심을 확고히 믿고, 그 내용을 주변과 온 누리에 계속 선포하며 사는 선교(宣敎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삶이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일까요? 그를 위하여 우리는 본문의 증언들을 다시 주목하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마침 우리교회 창립 3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늘의 축하와 영광을 받으실 분은 우리를 세워주신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본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교회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재(再)성찰(省察)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의 앞뒤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펼쳐오셨고, 우리를 선교적 인물로 키워주셨으며, 그 선교의 범위와 영역에 대하여서도 우리의 시각이 이전보다 넓고 크게 열려서, 우리를 진정한 선교적 교회로 세우고자 하심에 있습니다. 

 

본교회 개척자로서 잠시 회고해 봅니다. 나의 교회개척 동기는 전적으로 선교적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건물이나 인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폭넓게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마음이 결정적인 동기였습니다. 이게 일본 유학기간에서 받은 비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교회의 초기 모습은 거의 ‘주는 교회’ 수준이었습니다. 개척교회이지만 개척교회를 도왔고, 이재민과 불우한 이웃 돕는 일들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초대교회 시절엔 거의 전 교인이 선교헌금카드를 가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교중심의 목회는 많은 장애와 시련과 만났습니다. 그 선교를 든든히 밑받침해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너무도 취약했고, 또 기장이라는 교단에 대한 주변의 몰이해의 장벽이 생각 밖에 높은 현실 속에서, 교회당 건물들을 두 번이나 사고 팔며 관리하고 틀을 형성하는데, 내 목회의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진된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엎드렸습니다. 좀 긴 시각으로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심은 간직하되, 내 다음 팀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탄탄히 닦아놓자고 조정을 했습니다. 

 

다만 나는 내 다음 세대가 보다 활발히 선교할 수 있도록, 내 주어진 시간에 신학적-성서적-물질적-인적 기반 구축에 전력했습니다. 나의 세 본문 연구 작업은 그런 기반 닦기의 큰 열매입니다. 교단의 총회장 섬김도 나의 이런 선교적 관심을 보다 탄탄히 이어가게 하는 일에 큰 디딤돌이었습니다. 다행히 주님의 응답으로 우리 교회는 열심 있는 후임자 오정석 담임목사를 모시게 되었고 예전보다 성숙해진 교우들을 통하여, 다음 차원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고 큰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ion)을 담은 복음서를 봅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 전체를 부르셨습니다. 마지막 유훈(遺訓)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짧고 간결한 내용이었지만, 그 유훈은 제자들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씀이었고, 지구촌의 운명까지도 방향 짓는 내용이었습니다. 

 

1) 제자들이 주님을 찾아간 곳은 유대북부인 갈릴리의 어느 산입니다(16절). 갈릴리는 기독교 복음의 출산지입니다. 갈릴리는 유대의 땅이면서도 이방인 요소가 짙게 드리워 있던 그늘지고 슬픔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을 주 무대로, 예수와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활발하게 펼치셨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 교회도 항상 갈릴리란 영역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갈릴리를 잊은 교회와 성도의 삶이란, 예수 잃은 공허한 ‘믿음 팔이’에 빠집니다. 

 

2) 그 산의 이름은 분명치 않지만, 주님의 산상수훈이 펼쳐진 바로 그곳이 아닐까 싶습니다(마5-7장 참조). 주님 사역의 시작과 끝을 그 산에서 하신 셈입니다(18절). 

 

3) 주님은 자신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All authority)를 부여받았음을 밝히십니다(18절). 아들로서의 하늘의 전권과, 인자(人子)로서의 땅의 전권을 동시에 받았음을 밝히면서, 바로 당신의 보유한 그런 역량과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살려내시고자, 제자들이 맡아야 할 세 가지 특별 임무들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바로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부여된 명령들이기에, 모두 명심해 두어야할 내용들입니다. 

 

하나)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19,상)- 가서, 처처에 ‘예수 닮은 자들’을 만들어라! 

☞ 이는 현지로 가서, ‘예수의 마음와 갈릴리 영성(靈性)을 가진 자’들을 모아서 그곳 지역과 집단의 구원을 위한 거점(據點)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들의 실체를 오늘 말씀들인 서신서와 구약의 내용에서 바로 확인하게 됩니다.

 

둘) ‘그들에게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19.하)

☞ 세례를 삼위 중의 하나가 아닌, 삼위 전체인 하나님의 이름과 영으로 받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왜 삼위일체적 교인이어야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은 한편에 치우친 시각이 아니라 통전적인 시각을 가지고 모두를 유익하게 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시각을 가진 자에게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적 시각은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에 적합한지를 판단하고, 다음으로는 너도 유익할 것인지도 살피며, 나중에는 나에게도 좋은 것인지를 함께 살펴는 시각입니다. 교회 선교는 바로 그런 인물을 키워내는 것에 목표를 둡니다. 건물 세우고, 사람 많이 모으는 것이 목표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그런 영으로 세례 받은 인물들이어야,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킬 큰 인물이 가능한 까닭입니다! 

 

셋째)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켜 행하게(行)하라’(20.상) 

☞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말씀 교육(敎育)과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선교(宣敎)란 양식을 먹고 자랍니다. 교육과 선교가 중단된 교회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먼저 행동의 지침이 될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교육 없는 선교(행위)는 무질서에 빠지기 쉽고, 건강한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가 일찍이 설교와 성서교육의 방향을 삼위일체력에 근거한 세 본문 설교를 강하게 유지해 온 것도, 바로 그 연유입니다. 복음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통전성과 연합과 일체와 교제를 담아낼 성서교육이 바로 삼위일체력에 따른 설교와 성경교육에 있음을 믿고, 지금껏 견지해 온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우리의 씨름이 우리의 종말론적 신앙의 체질을 상당히 강해지도록 세워왔다고 믿습니다. 단, 부족한 것은 보강하며 됩니다.

 

4) 주님은 이런 명령을 온 맘을 다해 준행(遵行)할 제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 

 

서신서도 봅시다

찾아가는 선교(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고, 누구를 찾을까 하는 문제는 원칙적으로 성령이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 선교의 밑그림의 주역은 여전히 성령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1) 선교사 바울 일행은 아시아와 부르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그리고 비두니아 등등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펼쳤으나, 계속되는 외적인 난관들에 부딪쳐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기록자는 그런 힘들었던 상황을 ‘예수의 영(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6-7절 참조). 그렇습니다. 성령은 당신의 종들의 계획과 추진하는 일에 무조건 ‘Yes’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더 높은 뜻을 위해, ‘No’하실 때도 많습니다! 

 

2) 하지만 그 결과는 참 좋았습니다. 그 바람에 유럽 선교의 문이 열리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항구도시이자 에게 해(海)로 통하는 드로아로 내려갔던 날 밤에, 바울이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한 것입니다(9절). 그래서 바울 일행은 그리스의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로 갑니다.

 

3) 유럽 선교의 관문이 그곳 빌립보에서 열리는 순간입니다. 빌립보는 어떤 곳입니까?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12절). 그곳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로마인들이 많고 유대교적 색체가 약했습니다. 전도자들에게는 접근이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있었던 유대교 회당도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겨우 흐르는 강가에 기도처소가 있어서 그곳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일련의 여자들을 만났습니다(13절)

 

4) 하지만 빌립보에서의 성령은, 바로 루디아란 여인을 준비시켜 두셨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지금의 터키 리디아지방) 출신으로서 자색(紫色)직물이란 호사(豪奢)품목으로 장사를 해온 부요한 기업가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바울 일행이 증언한 예수의 말씀에 마음을 열면서 따랐습니다(14절).

 

6) 루디아의 응답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전 가족이 다 함께 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집을 활짝 공개하면서 선교사들의 유숙(留宿)처로도 집을 기꺼이 제공했습니다(15절). 주님이 분부하신 명령이 루디아 가정에서 성취되었고, 그녀의 집은 유럽선교의 거점이 됐습니다!!

 

구약을 봅시다

성부 여호와께서 선지자 요나를 이스라엘의 적성(敵性)국가였던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니느웨는 기원전 8세기 말부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존재와 신앙을 계속 위협해 온앗수르 제국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원수 같은 곳에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그것도‘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절)라는 짧은 경고를 선포하도록 보내셨습니다(1-4절). 

 

요나에게 떨어진 선교명령은 두 번째였습니다. 처음에는 아예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붙들리는 바람에, 죽을 고생한 후에, 다시 재 파송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피할 수 없음을안 요나는, 정말 성의 없이 외치고 끝냅니다. 사흘 길거리(60-80Km)되는 길을 하루 동안의 외침만으로 끝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3-4절). 결과는 어땠나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즉시 금식과 함께 회개하며 엎드렸습니다(5-6절). 그것도 가축들까지도 금식시키며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악행도 금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7-9절). 이런 모습은 친 백성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의외 행동이었습니다. 어찌 무자비한 제국 앗수르에서 이런 뜨거운 회개가 가능했을까요?

 

☞ 여호와께서는 그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원수 같은 이방세력까지도 구원해내시려는 여호와의 모습을 전하려는 까닭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도 그런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오직 하나님은 죄인들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와, 목숨을 보존하기만을 깊이 관심하십니다(겔33:11,렘18:8참조).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시대의 저 니느웨와 같은 저 북녘 땅에서도 선한 일을 행하시리라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로 열려 있는 양무리 교회가족으로 택하시고 세우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제 우리에게 부여된 삶이 탐욕과 이기주의를 넘어서, 선교적인 삶이 되게 하고 선교인으로 살아갑시다. 성령의 도우심이 그런 분들에게 가득하실 것입니다. 

 

선교는 육체적으로는 다소 불편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교가 절대 필요한 것은 선교할 때 내가 살고, 너를 살리며, 하나님께도 영광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돕고 복 주시는 것을 뜨겁게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냅시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선교로 부요하고 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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