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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 - "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 " / 이훈삼 목사 (환경주일)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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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1-2) - "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 " / 이훈삼 목사 (환경주일)

관리자 2020-06-04 (목) 18:39 3년전 1224  

본문) 행 2:37~41 (눅 12:8~12, 민 11:24~29)

 

1. 우리가 어찌할꼬

 

1) 교회사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 부활 후 50일 만에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구원을 위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주셨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갑자기 세상은 하나님 부재의 공간이 되었다. 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불안, 무의미, 불확실성, 두려움 등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해도 분명한 삶의 의미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그 삶은 행복할 수 없다. 성령강림 이전 초대교회는 두려움으로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결코 평안할 수 없었다. 행복한 삶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고 생전의 예수님처럼 우리 곁에서 영으로 함께하시고 있다는 그 사실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한 사건이었다.

 

2) 그거면 다 되는데

JTBC 비긴어게인3에서 가수 박정현은 이태리 어느 빌딩 옥상에서 하비샴의 왈츠라는 노래를 열창한다. 1861년 발표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내용을 토대로 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결혼식 날 신랑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신부는 평생 결혼 드레스를 입고 시계도 결혼식 시간으로 맞춰놓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애절하게 소리친다 ; 그대만 있으면 그대만 있으면 돼 그러면 다 되는데

희로애락의 삶 속에서 수많은 사건을 만나는 우리들 인생이지만 아무 것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신이다. 신앙이란 이런 삶의 자세다. 하나님도 있고 건강, , 명예, 미모, 성공 등 이런 것도 다 가지려 하는 것은 사실 신앙적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세속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으며, 나는 단지 하나님만 있으면 그거면 다 된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며 행복과 만족으로 이끌어주시는 존재, 그분이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영의 형태로 존재하신다. 그분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 성령님 한 분 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2. 회개하고 용서를

 

1) 회개-세례-성령

오늘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령이 나에게 오시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평생 참 신앙을 맛볼 수 없다. 성령임재를 원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은 비본질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평생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고 그 문 앞에서 구경꾼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하나님 부재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역동적이면서도 삶의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물음이고 고민이다.

 

오늘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고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37~38)

 

우리가 회개하고 그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고 그러면 성령을 받는다.

거꾸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성령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오늘 성령을 받는 핵심 고리는 회개다.

 

2) 제라드 세헤르스, 성 베드로의 참회, 148*110cm, 1629, 러시아 에르미타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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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가 베드로다. 그는 예수 공동체의 대표로서 2천년 기독교를 지탱해 왔고, 로마교회의 수장으로서 지금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주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흡족히 여기셔서 이 베드로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위대한 베드로도 주님 앞에서는 늘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오늘 참회하는 베드로는 혈기왕성하여 뭘 모르던 때가 아니라 인생과 신앙의 모든 부침을 다 거치고 난 다음의 모습이다. 그런데 화가는 이러한 노년의 베드로를 참회하는 인물로 그렸다.

 

이미 머리와 수염이 허옇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그나마 다 벗어진 베드로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베드로가 짊어진 삶의 고뇌도 깊고 무거웠다는 것이리라. 산전수전 다 겪은 노 사도가 두 손을 꼭 깍지 낀 채로 간절히 기도한다. 이마의 깊은 주름만큼이나 간절한 기도다.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있다.

 

옆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입 크게 벌려 수탉이 베드로의 죄를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큰 소리쳤건만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를 부인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이 그렇게 큰소리쳤던 약속을 아주 쉽게 내버리고 두려움 앞에서 죄의 덫에 빠졌다. 베드로를 평생 따라다닌 이 트라우마는 베드로의 것만이 아니다. 그를 보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의 죄에 대한 가능성이기에 아프지만 공감하는 것이다.

 

참회 앞에서는 천국의 열쇠도 별 소용이 없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죄의 위험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창공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혼의 거울에 비춘다.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를 닦느냐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처절한 자기 성찰과 죄의 고백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유일한 통로다.

 

3) 빈 공간

우리가 내 속의 죄를 고백함으로 내 존재를 비워내야만 그 빈 공간 속으로 성령이 임재하신다. 성령이 내 속에 들어오고 싶어도 죄가 도사리고 있으면 들어오실 수가 없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행복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만 있으면 다 된다. 성령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얼마든지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데, 성령이 내게 오시는 조건은 내 속의 죄를 비워내라는 것이다. 주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그 때 나는 빈 존재가 되고 그 비움 속에 성령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3. 우리의 회개

 

1) 코로나 섭리 : 불편한 삶이 구원 환경주일

2천 년 전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도 베드로도 평생 회개했다. 우리도 각자 그리고 이 시대를 회개해야 성령이 오신다. 우선 코로나-19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탐욕의 구조 속에서 살았는지를 적나라하게 알았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자연을 마음대로 유린한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가 자본주의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너무나도 잘 적응하며 자본주의를 누리고 있다. 그 결과가 자연의 황폐이고 지구 온난화이고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역습이다. 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고 무한 욕망의 시대와 그 속에서 마땅히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해버린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환경주일로 드린다. 단순히 자연보호 캠페인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에 천착하며 우리 자신과 세계 구조의 근본에서부터 발생하는 죄를 찾아내고 회개하는 때에만 새 인생과 새 역사를 열 수 있는 성령강림이 가능해진다.

 

2) 온라인 예배를 즐기지 말라 편리함 : 구원은 불편함에서

3월부터 두 주만 온라인예배를 드리면 다시 우리는 과거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양하던 교회를 회복하리라고 기대했건만, 넉 달째를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제 그런 바람은 접어야 할 것이다. 온라인 예배가 꼭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교회 와서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담보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나 마음의 중심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화상으로 예배 드려도 전보다 훨씬 정성스럽게 은혜를 입는 경우도 있고, 몸이 교회에 와 있어도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온라인예배가 낯설고 빨리 다시 모이는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교회에 오지 않고 온라인예배가 현장예배와 같은 효력을 지닌다 하고, 또 그 기간이 길어지고 온라인예배에 익숙해지면서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주일 아침에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번거로워진 것이다. 11시 예배 참석하려면 적어도 9시에는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고, 옷도 갈아입고 챙길 것도 많아서 허겁지겁 달려와야 했다. 그런데 같은 효력을 지닌다는 온라인예배는 1시간 이상 늦게 준비해도 되고 별로 신경 쓸 것도 없다. 그냥 편하게 앉아서 예배 한 시간 드리거나 아니면 구경하거나 하고 이후로는 내 마음대로 활동하면 된다. 예전엔 이것을 미처 몰랐는데 코로나 때문에 강제로라도 이 맛을 보니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안했지만 이것처럼 편리한 것이 없다. 이제는 온라인예배의 편리함에 젖어버린 것이다.

 

물론 코로나 사태로 모이는 예배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신 분들도 있다. 너무 감사하고 그 고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목사는 원래 근심이 많은 직책인지라 그런지 나는 걱정이 많이 앞선다. 내 경우 사람은 편하다가 불편함으로 적응하기는 어려워도 불편함에서 편리함으로 적응하기는 무척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교인들 내면을 다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개인의 진심이 무언지 모른다. 또 목사가 물으면 빨리 교회 나오고 싶다고 다들 말한다. 고맙기도 하지만 솔직히 진심일까 하고 물음표가 붙는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이지만 우리가 편리한 신앙생활에 쉽게 편승하고 기쁘게 적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과 쉽고 편리한 방식은 같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우리들 각 자의 깊은 곳으로부터 죄를 살피고 그 죄를 회개하는 곳에서만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 성령님만 계시면 사실 다 된다.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 받고 그 빈 내 영혼의 공간에 성령님을 모시어 들이자. 새로운 삶과 새로운 역사, 새로운 환경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설교 후 기도 :

주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코로나라는 재앙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의 자세와 문명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으면 인류는 자연의 역습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고 있습니다. 무한한 욕망을 추구해온 우리의 삶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또한 생각하지도 못했던 신앙 환경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우리가 너무 쉽게 적응하고 신앙생활도 편리함에 편승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피게 하소서. 회개와 용서를 통한 빈 우리들 영혼에 성령께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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