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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11-2) - " 참 겸손 - 차별하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19-08-22 (목) 09:35 4년전 3001  

본문) 사 57:14-19 약 2:1-12 눅 14:1-11

 

1. 교회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주일

 

오늘은 성령강림후 열한째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삼위일체 교회력의 마지막, 곧 한해의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주 부터는 새로운 절기인 창조절기가 시작됩니다. 창조절(Creation)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창조와 해방의 사역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다음주 세 본문 말씀은 천지 창조의 말씀 등으로 시작되며, 이러한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부터 새로운 절기가, 곧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성령의 뜨거움과 같은 무더위가 한풀 꺽이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피조물들이 마음껏 푸르름을 안고 살아가는 가을이 이제 창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러한 가을바람의 시원함과 같이 우리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열한번의 성령강림절기를 지내오는 동안, 이 땅에 성령께서 임하신 후 교회 공동체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참 지혜로, 참 사랑으로, 참 자유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의 말씀은 참 겸손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겸손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구약의 말씀은 겸손한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서신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복음서의 말씀은 참된 겸손의 방법인 자기를 낮추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2. 겸손한 자,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시며

 

오늘 구약의 말씀은 제 3이사야, 곧 바벨론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56장부터 마지막 66장까지입니다. 동시대의 예언자 중에 학개, 스가랴가 있습니다. 이들은 무너진 이스라엘 성벽과 성전 재건을 지지하고, 촉구했지만, 제 3이사야는 입장이 달랐습니다. 성전건축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3이사야는 시대를 뛰어넘는 예언자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66장 21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1).” 여기서 ‘그 가운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사 66:18)입니다. 열방가운데 특별한 민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대신, 다른 민족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뭇나라에 전파하도록(사 66:19) 하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500여년이 지난 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고향 나사렛에서 선포한 말씀도 제 3이사야서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사 61:1-2)

 

제 3이사야는 이스라엘만의 회복이 아니라, 가난한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의 선포입니다(레 25:10-17). 그리고 희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빚이 탕감되고 노예가 해방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때입니다. 이렇게 제 3이사야서는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예수님의 보편적 사랑과 해방의 사역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 말씀인 57장 말씀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영적 간음행위를 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회개하는 자에 대한 축복의 선언이죠.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은 이스라엘에 때로는 책망과 심판으로도 펼쳐지지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들은, 소생시키신다는 것입니다(사 57:1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사 57:20-21). 본문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4-15)

 

왜 그렇게 하시나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사 57:16-18a)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쳐주실 주실 뿐 아니라, 고침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사 57:18b).” 그리고 결론을 선포합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들을 소생시키시고, 평강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늘 회개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그런데 겸손한 마음은 오늘 서신서 말씀에 의하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의 실상을 파헤치고, ‘행함 있는 믿음’에 관해 소개합니다. 그리고 행함 있는 믿음의 핵심이 바로 형제를 차별하지 않는 것, 그리고 바른 신앙은 행함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믿음과 행함의 완벽한 일치와 조화를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약 2:1-4)

 

그러나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약 2:6-7)”

 

따라서 이웃 사랑과 차별 금지에 관해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지난 2019년 8월 12일 방영된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 생존자>가 ‘차별금지법’을 다루었죠? 이 드라마는 대통령과 국무위원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테러로 희생되고, 환경부 장관인 주인공 박무진(지진희 분) 장관만이 살아 남아, 지정 생존자, 곧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 테러의 배후를 캐고, 또 국정을 안정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기반으로 차기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무진 대행의 첫 공식 일정이 영화감독 노주영(서영화 분)의 국제 영화제 수상을 축하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영화감독인 노주영 감독이 커밍아웃을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때마침 수석보좌관 회의에 올라온 차별금지법안! ‘인종, 학력, 연령이나 장애, 출신지역이나 출신국가, 성 정체성’ 등으로 그 누구도 차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해선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유엔(UN)에서 지난 10년간 한국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지만, 기독교계가 동성애 지지 법안이라고 막고 있어서, 지난 모든 정부가 부담스러워했던 법안이었습니다. 비서진들 역시 차기 정권으로 이월하자고 했지만, 박무진 대행은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할 평등권이라며 법령안 준비를 지시합니다. 그러자 언론은 박무진 대행이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보도하고, SNS와 포털사이트엔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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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테러범들과 공모자인 국방장관 오영석(이준혁 분)은 기자회견을 열어 차별금지법 입법 철회를 촉구하며 유림과 종교단체를 자극했습니다. 지금껏 맞서 이긴 정치인이 없다는 이들 단체들은 박무진 대행의 조기 퇴진 성명서를 내고,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박무진 대행은 그제야 유엔의 권고에도 법제정이 되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찬성,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라고 말했던 정책실장 한주승(허준호 분)의 경고가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박무진 대행의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영석 국방장관은 40%에 가까운 지지율로 독보적 1위를 차지했으나, 박무진 대행은 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볼까요? 대부분 이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짓 정보로, 또 모르고 반대를 합니다. 차별금지법은 ‘개인의 인권 보호를 위해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입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여러 형태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왔습니다. 가령, 미국의 <시민권리법>(1866)과 <개정교육법>(1972), 영국의 <인종관계법>(1965)과 <성차별법>(1975), 캐나다의 <인권법>(1977), 오스트리아의 <균등대우법>(1979) 등. 또한 유엔에서도 지속적으로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제정 권고를 해왔습니다. 따라서 법무부에서 2007년 입법예고를 한 이래, 3차에 걸쳐 발의되었으나, 종교단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거나, 현재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대한민국 학생인권조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조례는 학생의 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학생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대한민국 각 교육청들의 조례입니다. 경기도에서 2010년 제정되어 경기도 교육청이 2010년 10월 5일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광주 교육청, 2012년 서울 교육청, 2013년에는 전라북도 교육청이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2018-2019년에는 경남교육청이 제정을 시도했지만, 기독교계를 주축으로 한 반대 세력들에 의해 결국 좌절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차별금지법은 <헌법>의 평등이념에 따라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의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이나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분, 성적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는 법률입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2014)과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2016)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반대하는 이유는 이 금지법에 나오는 ‘성적지향’ 이라는 한 단어 때문입니다. 개인의 성적지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말인데, 이를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간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로 왜곡해서 해석합니다. 학생인권조례도 마찬가지입니다. 2012년에 제정된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내용을 살펴볼까요?

 

제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입니다.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 상황, 안정,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제28조(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입니다. “① 교육감, 학교의 설립자·경영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빈곤 학생, 장애 학생, 한부모가정 학생, 다문화가정 학생, 외국인 학생, 운동선수, 성소수자, 근로 학생 등 소수자 학생(이하 “소수자 학생”이라 한다)이 그 특성에 따라 요청되는 권리를 적정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여기에 나오는, ‘성소수자’라는 표현 때문에 일부 개신교계에서는 동성애를 조장하는 조례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소수자’ 개념에는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등도 포함됩니다. 아무튼 현재 대한민국에 청소년 성소수자가 살아가는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자살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별금지법을, 또한 학생인권조례를 개신교인들이 반대합니다.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7계명) 살인하면(6계명)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약 2:10-11) 

 

무슨 말인가요? 동성애에 반대하여 동성애를 하지 않아도(10계명에는 없음), 거짓말하면(9계명)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볼까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5계명)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도(4계명) 도둑질하면(8계명)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우리는 심판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자입니다. 따라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유의 율법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의 율법입니다. 사람을 혐오하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동성애가 다른 계명, 혹은 법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나요? 그렇지 않죠? 그럼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할까요? 그들은 어떤 신앙, 혹은 신념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할까요? 복음서의 말씀이 그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4.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실, 누가복음 본문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안식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복부에 물이 차서 몸이 붓는 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 14:1-6)

 

인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계명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땅에 차별은 끊임없습니다. 나와 다른 타자를, 혹은 나와 다른 것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차별을 금지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때로는 피부색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이기 때문에, 얼굴 생김새 때문에, 몸무게 때문에 차별 받아온 세상입니다. 

 

학벌 때문에도 차별을 받습니다. 사는 지역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결혼 유무도 차별의 대상이고, 자녀 유무도 차별의 대상입니다. 모든 것이 다 차별의 대상입니다.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차‘이’가 차‘별’이 되니, 사람 사이가 갈라서는 ‘이-별’이 된 것입니다.) 또한 직업의 차이, 혹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의 차이는 앞으로의 삶 전체에 차별을 받게 되는 시작이 됩니다. 그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차별을 받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눅 14:7-9)

 

우리 모두는 최소 어떠한 한 영역에서는 반드시 차별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고, 존귀한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를 소개합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 

 

그렇습니다. 겸손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고, 겸손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다름은 성별, 나이, 인종,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의 신체조건을 넘어 종교, 사상이나 정치적 의견과 성적지향의 차이까지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다름 앞에서, 차이 앞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촛불혁명으로 완성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의견이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존경받으려면 밖에 나가 떠들지 말고, 잠잠히, 교회 안에서 모든 차별 받는 자를 위해 끝자리에 앉아 기도하면! 밤을 새워 기도하면! 눈물 흘려 기도하면! 저는 그들을 존경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리에서, 방송에서, 대화 가운데, 나와 다른 차이에 관해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거짓 정보(가짜 뉴스, 특히 거짓말을 퍼뜨리는 유튜브 등)에 빠져, 생명을 해하고 죽이는 혐오와 배타성에 관해서는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로 대항할 것입니다. 겸손은 나약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신앙과 신념에서 반대할까를 물었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이런 교만이 그들을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늘 우리 인간의 죄 된 본성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와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고, 끝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5. 새벽을 구하는 기도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영성작가 켄 가이어의 ‘새벽을 구하는 기도’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는 법과 밤을 지새는 법과 새벽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누구의 말인지는 몰라도 이 말을 인해 감사합니다.

기도하오니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어둠 속에 벌벌 떨면서도 밤을 지새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밤을 지나 본 적 없는 사람이 던지는 멋있는 낙관론 없이도 

새벽을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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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차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우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날을 기다리며 밤을 지새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임할 것을 믿으며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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