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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10-1) - " 신앙의 핵심 가치, 자유와 사랑 " / 최부옥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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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10-1) - " 신앙의 핵심 가치, 자유와 사랑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9-08-16 (금) 13:00 4년전 2992  

본문 – 갈5:1-15, 출31:12-17, 마12:9-14

 

일본의 아베 정권이 우리에게 안겨 준 선물이 생각밖에 큰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경제제재와 공격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일로 인하여 우리 내부 안에 있던 그 동안의 숱한 은폐되었던 어둠의 현상들이 그들의 공세와 우리의 대응의 모습을 통하여, 여과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동안 묻혀서 우리의 주체 세력처럼 보였던 친일(親日)세력들이 여과 없이 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큰 성과인 듯합니다. 심판과 응징할 대상이 노출된 것이니까요! 

 

우선은 일본과 우리 한국의 차이와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잃어버리고 묻혀있던 우리의 어두운 역사들을 다시 새롭게 보게 해 주고 있어서 좋습니다. 가해 세력의 뻔뻔함에 놀라고, 예전과 달리 당당하고 의젓하게 대응하는 우리 국민의 성숙한 수준에 놀랍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차이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도 보입니다. 저들은 지도자의 힘이 절대적인데 비하여, 우리는 국민의 힘이 절대적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멋진 대결장입니다. 

 

이 씨름은 제법 오래 갈듯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전체 체질에 큰 변화와 갱신을 안겨다 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참 대적자들이 누군지, 우리가 왜 평화통일이 그토록 중요한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얼마나 키-맨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온 국민과 함께 다시 찾아보고 생각하는 국민체질 변화의 모맨텀이 주어진 듯합니다. 어제 문대통령의 광복절 제74주년 축사에서 밝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에로의 나아갈 기회가 지금 열리고 있다고 보입니다. ‘우리의 단합된 역량이 어떻게 결집될 것이냐’만 남은 듯합니다. 

 

이러한 세기적 변화의 모습은 오늘 세 본문에 나타난 현장의 흐름 속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의 등장과 그로 인하여 시작된 새로운 차원의 인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출현은, 기존의 유대교 중심의 강고한 보수적 틀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새 인류 구원을 향한 거룩한 싸움들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그의 제자들은 그에 대한 말씀과 삶을 전하고 펼치는 일에 대한 헌신으로 큰 싸움판을 벌렸습니다. 

 

물론 그 반대세력들은, 요즈음의 우리 내부의 결렬한 저항처럼 거칠고 강했으나, 그러나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시작된 새 역사의 도도한 흐름까지는 그들이 막을 수 없음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신앙의 확실한 핵심 가치는 둘이었습니다.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하는 일과 할례(割禮)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것들은 그들에게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외면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의 그룹에서 배제 당하는 일이요 민족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을 다시 봅시다. 안식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가 돋보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대대의 표징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내 보이시고, 세상 모든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귀하게 선택하시고 특별하게 상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13절). 

 

둘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대대로 맺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16절).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 된 자들은 안식일 준수로 하나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거부하는 것은 곧 배제되는 것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이 안식일 제정의 틀의 근거는 하나님의 엿새간의 천지 창조와 칠일 째의 쉼(휴식)에서 나왔습니다(17절). 

 

할례(割禮)도 들여다봅시다. 오늘 갈라디아 교회가 극심하게 홍역을 치렀던 그 할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회당에 가서 제사장으로부터 성기의 표피를 절단하는 지금의 포경수술과 같은 것으로서, 그 첫 시도는 이스라엘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을 낳기 직전인 99세에 처음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도 부모의 품에서 그 성결예식에 참여하셨다고 전하였습니다(눅2:21-24).)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사내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일종의 우리 기독교의 유아 세례와 같았습니다. 혹,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려고 할 때에도, 이 몸으로 받는 할례는 피할 수 없이 해결 받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안식일 준수와 할례는 이스라엘을 결속시키는 강한 이념이요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었으며, 일종의 교리요 온 백성이 절대로 준수할 행동지침이 되었습니다. 특히 할례는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이 준수해야할 율법 전체인 613가지의 계율 중에서도 최고의 핵심이라는 수순의 가치를 발휘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에서 제외된 이방인이냐 선민 유대인이냐를 차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니, 구원의 지표처럼 인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핵심가치, 안식일과 할례가 정말 그들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긍정적(肯定的)인 역할을 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 전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무서운 정체성이 되었고 신앙의 핵심가치로 존속하면서, 그들이 오랫동안 나라 잃은 설음과 시련 속에 처할 때에도 서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든든히 결속시키며 살아남게 한, 주춧돌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교조화(敎條化)되고 이념화되면서,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만민의 것으로 삼으려고 덤비기 시작하면서, 거기에서 파생된 부정적(否定的)인 문제들은 예상 밖에 심각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의 절대성에 붙잡혀 그것으로 세상 모든 구원론을 획일적으로 조율하려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고집스러워졌고 교만해졌으며 상대를 얕잡아보고 정죄하는 집단으로 변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는 그들이 세계인들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현상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연대(連帶)가 불가능하여서, 스스로 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고립되고 패쇄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어갔고, 예수 이후,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갈 때에는, 그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정체성은 아예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몰고 온 변화된 구원의 새 차원을 전혀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교회 공동체에 살며시 들어와 ‘할례 복음’을 전파하면서 구원관을 교란시키는 ‘트러블 메이커’(거짓 교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 문제들이 오늘 서신서인 갈라디아와 복음서에 나옵니다. 

당시의 할례 문제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의 개혁(改革)종교 세력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가 세상에 나와서 온 세상 만민의 구원공동체 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때, 가장 크게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유대교의 할례였습니다. 유대교도들은 이미 할례를 받으면서, 그들은 이미 자기들은 ‘구원 받은 존재들’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할례자들은 몸에 구원의 증표를 가진 대단한 엘리트 집단이며 존재들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적 가벼움(?)을 압도할 상대적 확실성을 자기들은 이미 보유한 듯한 행세를 교회 안에서 과시한 것입니다. 그 바람에 일부 믿음이 약한 이들이 현혹되어 할례를 받기도 했습니다(3절). 

 

사도 바울이 격렬하게 문제의 인물들로 지적했던 그들은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한 자’(7절)요, ‘온 덩이에 퍼진 적은 누룩같은 자’(9절)이며, ‘그들을 요동하게 하는 자’(10절)였고, ‘그들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12절)이었습니다. 이게 혼란스러웠던 갈라디아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 교회에게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택할 것이냐, 율법에 매인 종살이를 다시 택할 것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이 인간들이 겪는 율법의 한계를 일거(一擧)에 해결하기 위하심이었고, 그런 613가지나 되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는데-, 왜 그 사실을 알고도 또 다시 그 율법의 굴레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냐 라며 성도들을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율법과 할례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끊어지는 것임을 알라고까지 강하게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4절). 

 

바울은 최후로 율법과 복음에 얽힌 모든 구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할 신앙적 대안(代案)을 제시하였습니다(5-6절). ‘그리스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냐 무할례냐가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러면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율법의 완성이 어디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게 이루어졌나니’(14절). 바울 사도의 이 입장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예수님의 아우)도 최고의 법으로 공인하였던 것이기도 했습니다(약2:8참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또 바울이 전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일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서로 사랑하는 일’은 모세의 전체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모든 복음의 새 계명들 모두를 통전(通典)한 구원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이 지적에는, 우리가 받을 구원이 할례라는 한 번의 육체적 정결행위로 확보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 보다는 구원 받은 백성들답게 의와 선을 좇아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만 가능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으로 믿음의 자리에 참여하여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들에게는, 애써 할례를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 보다는 더욱 구원의 핵심이 되는 과제인, ‘오직 사랑으로 힘써 서로 종노릇하며 사는 것이 구원의 본질에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구원에는 핏줄이나 혈통의 의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와 함께 그 안에서 사랑의 헌신된 자로 살아가는 일이 가장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의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주어진 복음의 자유를 가지고, 자기 만족을 충족시키려고 몰두하지 말고(13절), 오직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일에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 개인의 이기주의 실현을 위한 면허증이 아닙니다.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라고 허락된 십자가의 선물도 아닙니다. 

 

언젠가 감동적인 이야기 한 편이 <사랑밭 새벽편지>에 오른 적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정년퇴직한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언젠가부터 ‘연금이나 퇴직금도 있을텐데, 뭐 저렇게까지 일하고 사시나’라는 눈총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연을 알고 보니, 그의 노동은 그의 고독한 친구를 위해 3년간의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말기 암으로 올해를 넘기기 어렵다는 친구의 병원비를 위해 휴일 없이 청소부로 일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는, ‘물론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내 힘으로 친구 하나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요. 세상은 바로 이런 분이 있어서, 아직도 망하지 아니하고 있잖나 싶습니다. 

 

결국 주어진 시간과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은 이들이 있는가하면, 이 음악선생님처럼 어려운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자신의 육체를 헌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까지 결정할 터이니까요-!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려는 일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주일이나 안식일이나 할례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생명을 건강하게 온전하게 지켜내려는 영적 시스템일 뿐입니다. 그것에 저해되는 억압과 굴레로서의 안식일과 할례는 다시 새로운 지표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주님의 ‘한 마리 어린 양’의 비유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일은 생명 살리는 일에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선행을 구현하는 일을 무시하는 안식일은 참 안식일 정신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 일이 결코 안식일 정신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교리나 전통은 언제나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새 시대와 새 의무가 부여된 것이어야만 하기에, 늘 새롭게 재해석되어야만 합니다. 교회가 받은 복음 안에는 그러한 영적 자유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을 문자적으로만 절대화시키면, 그 문구가 담고 있는 진정한 힘은 곧 잃게 될 뿐입니다. 사욕을 위한 시도가 아니라, 모두가 사랑으로 시행할 수 있기 위한 재해석은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교회의 자유이며 사랑의 능력입니다. 우리 다함께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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