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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9-1) - " 역사 속에 피어난 꽃 " / 평화통일주일 / 이영재 목사

관리자 2019-08-09 (금) 12:49 3개월전 283  

본문) 롬12:9-21, 레19:9-18, 눅 6:32-38

 

시편기자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탄식을 할 때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의 참담한 심경이 드러납니다. 오늘 광복절을 당하여 일제 강점기 36년에서 벗어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면서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했던 참담한 사건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한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관동학살과 같은 쟁점들이 오늘날 한일 간에 큰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전범의 넋을 기리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전쟁범죄 사건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큰 슬픔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근자에 우리나라의 대법원이 징용배상을 위한 개인청구의 건이 유효하다고 판결한 데 대하여 일본의 아베정권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사과하기는커녕 식민지 배상은 이미 1965년에 양국 간의 국제조약으로 해결되었다고 강변하면서 경제전쟁을 선포하고 우리정권을 압박하고 나섰습니다. 55년 전에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협정은 불평등조약이었으며 사실상 온 국민이 반대했던 잘못된 조약이었습니다. 박정희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국민의 반대를 진압한 가운데 3억원의 보상금을 받는 수치스러운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사건을 기려서 우리는 “6.3항쟁”이라고 부르며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 교회들 가운데 오히려 대통령이 아베에게 사과하라는 엉뚱한 망발을 해대는 자들도 있습니다. 촛불정권을 반대하여 박근혜를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자들 중에 기독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부 대형교회들의 신도들과 한기총의 무리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온갖 거짓말로 가짜 뉴스를 지어내어 선량한 교회의 신도들에게 퍼뜨리고 있기에 기독인으로 인정해 줄 수가 없습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떼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자들입니다. 

적잖은 교인들이 그들이 벌이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가짜 뉴스에 선동을 당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기도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경계하는 한편, 한미일 삼각동맹을 더욱 강고히 하여 확고한 안보 위에서 북한독재정권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 냉전시대에 이승만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유신정권이 내세웠던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낡은 주장입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에 남북한 정상이 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었습니다. 이것은 한반도의 번영을 내다보는 미래를 향한 역사적 거보였습니다. 모두들 6.15공동선언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기독교 인사들만이 반대를 외치면서 냉전시대의 대립과 반목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선동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광복절에도 지역마다 보수대연합을 구축하여 현 촛불정권을 규탄하고 차별금지법 반대하며 동성애 혐오를 교회 안에 조장하며 북한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벌이는 보수대연합 운동은 대한애국당과 같은 정당과 결부하여 정권탈환운동으로까지 비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벌이는 광복절 연합집회에 결코 동조하거나 참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 안에 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적 중산층으로 약진한 계층의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성실과 근면으로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와 가정을 중심으로 절약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기독인들이 농촌에는 지주로 성장하였고, 도시에서는 상공인으로나 지식인으로 진출했습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과 한국에서 일어나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권익을 외치는 모든 사회주의적 운동을 탄압하였을 때 우리 기독교 인사들도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고 그들의 고난을 묵인하였습니다. 일제 하의 한국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사상과 정책에 대하여 거부하지 않고 동조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방 후에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서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유화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기업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친일의 이력이 있으니 책임을 묻는 북한정권을 감당하지 못하여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북한에 두고 온 토지와 재산에 대하여 소송을 걸어놓고 북한정권이 망하는 날만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6.15공동선언은 재산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무서운 재난으로 여겨졌습니다. 북한에서 남하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연유로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대며 남북 간의 평화를 반대하고, 북미간의 대화와 종전협정 선언을 결사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사의 은원관계에 매여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일제 잔재가 오늘날 길거리의 시위 현장에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교단 총회의 평화통일위원회는 이러한 사정을 분석하면서 북한에 두고 온 부동산의 사유권을 포기하자는 신앙인의 운동을 펼치는 일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을 거듭 거듭 권면하고 가르칩니다. 레위기 19장을 보면 ‘나는 여호와다’라는 짧은 말씀이 16회나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는 여호와다”는 히브리어로 <아니 아도나이 אֲנִי יְהוָה>라고 읽습니다. 이 짧은 문구는 레위기에만 해도 52회, 오경 전체에는 81회나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오경 이외의 책들에는 118나 반복됩니다. 특히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에스겔서에 85회로 가장 많이 나오고, 이사야서에는 22회나 반복됩니다. “나는 여호와다”는 선언이 이처럼 많이 반복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치열하게 묻고 대답하는 책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성경의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19장은 야훼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이라는 진리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사법적 정의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라는 사회윤리가 선포되고 이어서 그 사회 구성원 개인은 각기 자기 이웃을 자기의 혈육을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개인윤리가 선포됩니다. 우리나라를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 가려면 이 두 가지 원리를 익히고 가르치는 교육과정 속에서 온 국민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라는 말씀이 레위기 19장 17-18절에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명령을 모든 교회가 우선으로 실천한다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기적이 욕심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기적인 욕심들이 서로 부딪히면 갈등하고 대립하게 되며 교회 내에 분란과 싸움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교회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가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큰 주제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은 하나님 사랑을 보편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레위기 19장은 이웃 사랑의 책임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서 5-7장에 기록된 대로 산상설교를 베푸시는 가운데 이러한 사랑의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서 6장의 말씀은 평지설교입니다. 평지에서 베푸신 말씀이란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17절을 보면 “평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ἐπὶ τόπου πεδινοῦ) 계셨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지 말고 너희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말씀은 눅6:35의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십니다. “꾸어주라”는 말은 물질로써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원한을 달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인에 한 술 더 떠서 물질을 되받을 생각 말고 거저 주라고 하시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헤롯정권과 로마제국,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체제 하에서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는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들이 평화를 누리는 길은 내면의 평화를 우선 회복하라는 방법적 가르침입니다. 내면의 평화 없이는 사회적 개혁이 의미가 없습니다. 개혁이란 과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끈질기게 수행해야 할 장기적 과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사랑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까닭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같은 이치로서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용서를 해 주어라”라고 용서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원리를 가르쳐 주시면서 또 다시 이상한 말씀을 더 붙입니다. 용서의 증표로서 물질을 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눅6:38).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를 해야 그 원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평지설교에서 원수의 사과와 회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과도 하지 않는 원수에게 용서를 해주고 물질까지 도와주라고 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로마제국이 독립을 요구하는 유대민족을 학살했으며 이방인 에돔사람 헤롯을 왕좌에 앉히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버젓이 세리들을 통하여 세금을 수탈해 가고 수많은 실업자들이 부랑자가 되어 헤매고 다닙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삶의 터전을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판국에 원수를 사랑하되 흔들어 넘치도록 주기까지 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원수가 준 고통으로 피해자는 망하기 마련입니다. 물질 피해 뿐만 아니라 심령의 피해까지 당하여 마침내 스스로를 무너집니다. 억울한 마음, 분한 마음은 치명적으로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그 한을 풀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종교들에서는 한을 푸는 살풀이와 같은 의식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살 길을 전혀 다르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모든 인간의 은원관계를 사랑으로 녹여버리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탄식한 것은 역사를 지어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이기적이며 폭력을 휘두르며 경쟁하는 사회 체제를 짓고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탄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조차 수도 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며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에서부터 구원이 나와야 할 터인데 예루살렘도 속속들이 죄로 물들어 세상의 여느 도성과 마찬가지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온 사방이 죄로 물들어 캄캄한 세상을 어떻게 구원받은 존재로서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해법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고도 곧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배신의 죄를 범했습니다(출32:1-6).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들어 새 출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목숨을 건 중보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계약을 체결하도록 이끌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시내산 위로 모세를 부르시고 두 번째 돌판에 첫번째 기록하신 그대로 말씀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어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이스라엘의 회개와 사과가 있어야 하나님의 용서를 이끌어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아직 자세히 모릅니다. 그들은 다만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내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탄식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만으로(출33:6)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시고 새 계약을 체결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은 이러한 용서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일곱 가지로 나누어 알려주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6-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시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곧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십니다. 원수를 바라보고 한풀이를 하려는 동안에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계속 좌절만 겪게 되고 마침내 인생을 망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누구나 그 무엇이든지 생육하고 번성하며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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