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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6-1) - " 끝까지 견딘다 " / 이순태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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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6-1) - " 끝까지 견딘다 "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19-07-19 (금) 11:29 4년전 3148  

본문) 암 5:18-24, 계 2:8-11, 막 13:1-13

 

1. ① 아모스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던 사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로 정하신 날이다. 그 날이 되면,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절대적인 주권을 발휘하여 세상을 통치하며 심판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을 고대하였다. 왜냐하면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멸망시키고 이제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실 것이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즉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게 빛의 날이 아니라, 어두움과 절망의 날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반전이 생겼을까? 왜 구원과 승리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었을까?

아모스서를 살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번제와 소제를 바쳤다. 화목제도 드렸다.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도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 그런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지 않으시겠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모스서에서 그 원인을 둘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배의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마음, 정성, 뜻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모스 8:5절을 보면, 그들은 월삭이 언제 지나갈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갈까? 안달이 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월삭이나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배드리는 날은 자신들의 일을 못하는 날, 수입을 막는 날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전에 몸은 참석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즉 예배에 진정성이 담겨 있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예배와 일상 생활이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예배가 형식화되어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들이었다. 성전에다 제물 바치면 그것으로 의무는 끝났다 라면서 사치, 향락에 빠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어떻게 멋들어지게 세상을 살아갈까 이런 생각만 하였다. 특히 귀족들, 부자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로 어려운 자들을 돕는, 진짜 멋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강한 자는 약한 자들을 섬기고,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원리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셨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다. 세상 직장과 사업장을 주셨고, 교회 안에서 직분을 주셨다. 그런데 이 책임을 망각하고 자기 허영만을 만족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외쳤다.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가타부타해?” 바로 이런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어두움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아무리 그럴 듯한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 받지 않으신다. 세상 정의에는 무관심한 예배,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누가복음 11:4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의 예식으로 다 된 것이 결코 아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배우고, 세상에 나아가 그 말씀을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받으신다. 

 

2. ①구약시대 ‘여호와의 날’ 개념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세상 심판자로 다시 오실 재림의 날로 받아들여졌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가시데, 동행한 제자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새번역). 예수님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500년 전에 봉헌된 건물들을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외형을 화려하게 덧입혀 보수하였다. 성전이라는 권위와 더불어,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압도당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형적인 찬란함에 감명 받지 않으시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셨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떻게 성전이 무너진단 말인가?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다니... 성전이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세상 끝장이 아닌가? 

제자들의 당혹감은 자연스레 세상 종말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때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 징조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② 첫째, 거짓 메시야가 등장한다/ 막 13: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예수를 자칭하는 거짓 메시야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요즘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자칭 하나님이라는 사람들이 열 명이 넘는다. 사람들이 뭔가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니까, 온갖 조명이나 기계를 조작해서, 혹은 초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이 신적인 존재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나타난다. 

둘째, 세계 곳곳에 전쟁과 분란이 일어난다/ 막 13:8절 상반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이곳 저곳에 난리와 소란이 있고, 전쟁이 터진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민족 간에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된다. 

셋째,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막 13:8절 하반절,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거대한 자연 재해가 사람들을 두렵게 할 것이다. 한 번의 지진으로 수천, 수만 명이 일시에 죽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재난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넷째의 징조는, 예수 믿는 자가 핍박을 받는다/ 사탄은 자기의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온갖 발악을 한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는 자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만든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려면 사탄은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 믿음을 방해한다. 그래서 복음 때문에 막 13:12절의 말씀처럼 된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언제까지 이런 난리와 재난, 핍박이 지속될까? 성경은 그에 대해 결코 정확한 시기를 못박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한 암시를 주신 것은 있다. 그것은 복음이 모든 나라에 전파된 이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이 이르기까지 우리 믿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복음 덕택에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끝이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죽음, 순교를 의미한다.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견디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약속이다. 

 

​3.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을 아멘으로 받고 그렇게 살아간 교회 하나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머나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간략히 나온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교회, 책망과 칭찬을 함께 받는 교회, 또는 칭찬만 받는 교회들이 나온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격려만 받았다. 어떻게 그런 평가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을까? 

서머나는 지금의 ‘이즈밀’(Izmir)인데, 터키에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과거 사도 시대에도 서머나는 에베소에 맞먹는 큰 도시였는데,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바로 그곳에 자리잡은 서머나 교회는 당시 환난과 궁핍에 처해 있었다. 복음 때문에 곤경에 처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9절에 의하면 실제로는 ‘부요한 자’라는 평을 듣는다. 왜 그럴까? 주님이 서머나 교회의 형편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 인생이 아무리 환난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그 환난이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주인되신 주님이 그것을 알아주신다면 견딜 수 있는 것 아닌가? 주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우리는 찬양할 수 있다.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찬송 438장). 

특히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모욕적인 비방을 받아야 했다.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서머나 교인들을 비방했을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 자신들이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 안되겠다 싶어 의도적으로 비방을 하고 모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서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누구도 꺾을 수는 없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누구를 부러워하겠는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터인데...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권면은 필요했다. 요한계시록 2:10절을 보니 ‘장차 받을 고난’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고난의 기간은 10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10일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인 표현이다. 이 예언대로 주후 156년 2월 2일에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폴리캅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절한 폴리캅과 성도들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이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86년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인자로 대하셨오.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총독이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 고 말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말했다.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라고 위협하였다. 이에 폴리캅은 “총독이시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그는 순교를 했다. 

서머나 교회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고난을 잘 견디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종말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0절에 죽도록 충성하면 주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는가? “생명의 관.” 그리고 11절에는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누구나 지나가야 하는 죽음, 첫째 사망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생 천국이다. 우리가 참으로 천국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의 돈과 권력에 목말라 할 까닭이 없다. 예수 믿는다고 다 순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럴 각오로, 순교적인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 오실 그때까지! 그럴 때 그날은 어두움이 아니라 참 빛이 될 것이다. 그날에 우리도 주님처럼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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