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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1-1) - " 성령으로 세우는 하나님 나라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9-06-14 (금) 15:51 4년전 3048  

본문) 신30:15-20/ 갈5:16-26/ 막4:1-20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첫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창조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곳에 한 동산을 구별(창설/ 창2:8)하셔서 그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善惡果)를 두시고(창2:9)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창2:16) 오직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17절)”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통치되고 다스려지는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이 ‘왕’처럼 다스리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유’와 서로를 존중해주는 ‘평화’의 하나님 나라는 선악과 금지의 ‘계명’이 지켜질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선악과를 자기 것으로 소유함으로 참람하게도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선과 악인지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과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으며 첫 하나님의 나라 에덴동산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에 드리워진 아담의 그림자

 

시간이 갑자기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역사의 시원에 있었던 아담의 불행한 그림자가 우리 시대의 앞마당에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증언해야 할 한 목회자가 갑자기 나타나 자칭 1,200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회장의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요지는 대통령 하야였습니다. 그는 금년 안에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으면 현대통령이 재임하는 3년 안에 이 대한민국은 아예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현 대통령과 청와대를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인사들이(검찰, 경찰, 기무사, 국정원, 군대, 법원, 언론, 심지어 우파시민단체까지)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는 종북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원자력발전소해체, 소득 주도 경제성장. 4대강 보 해체, 최저임금' 등 현 정권이 진행하는 모든 일을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는 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인가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개그 콘서트처럼 너무 엉뚱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고 전혀 사실에 부합되지도 않으며 근거도 없는 말을 어떻게 저리도 당당하고 확고하게 사실처럼 말할 수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한국교회와 많은 목회자들의 민낯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기도 했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말하고 있었고,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선악을 분별하는 자의 자리에 올라서서 이놈은 빨갱이, 저놈은 주사파, 이들은 종북주의자, 저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예단하고 확신했으며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는 왜 그들이 주사파인지, 왜 그들이 종북주의자인지를 설명하지도 않았고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증거 하고 주장하는 바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증명해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말씀을 통해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사입니다. 내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전 이해를 걷어내고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드러내어 그 말씀대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 맞게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는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의 위기입니다.

말씀으로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신30:15-20)

 

가나안 땅에 세워질 이스라엘왕국은 무너진 첫 하나님의 나라(에덴동산)를 회복하기 위해 ‘가나안 땅’에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창조의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듯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구별된 영토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이 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준수하는 나라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Commandment)”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 네게 복을 주실 것”(16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17절)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19-20절)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욕대로 세상의 유혹을 따라 살다가 망했고 다시 애굽의 노예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아!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요 구약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불행은 자원의 고갈이나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타락한 마음(막4:1-20)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계명대로 살지 못하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받아들여 결실을 거두게 되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타락한 마음 밭 때문입니다.

 

파종할 때가 되어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농부는 그냥 임의대로 이리저리 뿌린 것 같습니다. 매우 서툴러 보이고 무계획적이며 미숙해 보입니다. 길에도, 흙이 얇게 깔린 돌짝밭에도 가시덤불 위에도 뿌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농부는 아무리 미숙해도 저렇게 무턱대고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파종법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밭을 갈고 흙을 곱게 하여 이랑을 만들고 그곳에 파종합니다. 길이나 돌짝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겨우내 묵었던 거칠고 메마른 땅, 곡초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굳어진 땅, 황량한 광야 같은 곳에 먼저 씨를 이리저리 파종해 놓은 다음에 그 뒤를 따라 쟁기로 밭을 갈고 돌을 고르고 가시덤불을 베어버리고 옥토를 만듭니다. 그래서 길가에도, 돌짝밭에도, 가시덤불 있는 곳에도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마치 겨우내 버려진 땅 같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발걸음에 굳어진 땅, 흙 밑에 돌들이 깔려있어 뿌리내리기 어려운 땅, 곡식의 싹을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시덤불이 무성한 땅 같습니다. 한번 전도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뿌리내릴 만한 마음이 없어요!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것 같지 않습니다. 1)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굳어진 땅입니다. 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입니다.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니 나도 가고 오늘도 내일도 가다 보니 그곳이 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은 오랫동안에 걸쳐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구가 평평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동쪽으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니까, 해가 돌고 밤에 별들이 움직이니까 지구가 중심이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조상들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세상 두 쪽 나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천동설은 불변의 진리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아니다! 하늘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도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오는 1633년 유명한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굳어버린 고정관념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2) 돌짝밭 같은 마음입니다. 얕은 흙속에 큰 바위나 돌들이 있어서 싹은 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납니다. 그런데 흙 아래에 큰 바위나 돌이 있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드려서 믿음의 싹이 나지만 “자기”가 강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씨앗 안에 있는 코딱지만 한 영양분으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자신의 노력과 경건으로 율법을 성취하려고 했어요! “자기 아집”이 강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만 뿌리를 내려 땅으로부터 에너지를 빨아올려 자라게 됩니다. 3)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싹이 자랐지만 “염려, 욕심, 유혹”의 가시덤불이 기운을 가로막아 죽게 합니다. 아!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염려, 욕심, 유혹”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옛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같은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싹을 틔우는 성령(갈5:19-21/ 막4:20)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옥토 같은 마음만이 하나님 나라의 씨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옥토 같은 마음입니까? 타락하지 않은 마음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로워진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농부는 황량한 땅에 씨를 뿌린 후에 씨 뿌려진 그곳을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뽑아내어 옥토를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옥토가 된 그곳에 뿌려진 씨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힙니다. 중요한 것은 농부의 손길이 닿는 곳이 옥토가 되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의 씨,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고 그 말씀을 듣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쟁기질과 손길이 닿아 경작된 마음만 옥토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받아들여 싹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의 쟁기질과 손길이 닿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성령의 돌보심”입니다. 밭은 밭을 경작할 수 없습니다. 밭은 스스로 옥토가 되지 않습니다. 길가와 같이 굳어진 밭, 돌짝밭,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한 밭이 스스로 저절로 옥토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농부의 손길이 가야 합니다. 성령의 보습이 우리 마음을 만져주셔야 옥토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길가 같은 굳어진 고정관념을 갈아엎으십니다. 율법주의적 고정관념에 고착되어있었던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이방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돌짝밭 같은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던 요한 웨슬리가 조지아 선교실패 후 성령의 능력을 받고 오직 하늘의 능력으로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시덤불 같은 육신의 정욕을 이기게 하십니다. 젊은 시절을 육신의 정욕가운데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날 그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으로 롬13:11절의 말씀을 찾아 읽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타락한 우리 마음을 그의 보습으로 옥토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악한 세상을 무너뜨리고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농부의 수고에 비해 허실이 많고 장차 쟁기로 갈아엎어질 옥토에 들어가는 씨보다는 그렇지 않는 곳(새들에게 먹힐 길가나 햇볕에 말라죽는 돌짝밭, 가시덤불에 기운이 막혀 죽을 곳)에 뿌려지는 씨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과연 가을에 약간의 곡식이라도 거둘 수는 있을까요? 수고에 비해서 얻는 것은 너무 초라한 것은 아닐까요? 온 땅이 길처럼 굳어져있고 얇은 흙 밑에는 큰 돌들이 깔려있는 이스라엘의 박토에서, 그리고 비가 잘 오기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무성한 땅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갈아엎고 손질을 한다고 과연 얼마의 결실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산술적으로 말하면 뿌린 것에 비하면 거둘 수 있는 것은 그것의 겨우 1/4밖에는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쟁기와 보습으로 갈아엎은 옥토에 뿌려진 씨는 뿌린 것의 1/4밖에 거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어 노랗게 익은 수확의 물결로 온 땅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씨를 이 땅에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땀 흘려 씨 뿌리는 우리의 수고에 비해 항상 부족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철없는 한 목사처럼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을 손에 쥐고 세상을 흔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농부처럼 씨 뿌리는 일을 계속하며 실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곳에는 항상 성령의 은총이 함께하셔서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러 한국에 건너온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는 뿌린 수고만큼 반응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실망하는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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