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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1-2) - " 성령을 따르는 삶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19-06-15 (토) 10:09 4년전 3117  

본문 : 갈 5:16~26   신 30:15~20  막 4:1~20

 

1. 충돌하는 두 세계

 

사람이나 세상을 어떤 유형(Type)으로 규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람이나 어떤 현상을 그렇게 단선적으로 규정하면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형별 설명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단순하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답이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니까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유형별 설명의 극단적 형태가 이분법이다. 딱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니 얼마나 명백한가, 반면에 얼마나 단순화의 위험 부담도 클 것인가? 그러나 초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으로는 매우 유용한 방식인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서도 이런 이분법적 설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빛과 어둠, 양과 염소,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의 표현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때 유용하고 편리하다. 종교적 진리는 삶과 역사의 깊고도 넓은 과제들을 총괄하기에 사실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종교(宗敎)의 종(宗) 가장 높은 것을 뜻한다. 세상 어떤 가르침보다도 심오한 것이 종교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설명하자니 어렵고, 가능하면 쉽게 설명하자니 내용을 단순화시키게 되고, 그래서 이분법적 설명을 차용하게 된다. 

 

오늘 성서 일과에 따른 세 본문의 말씀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과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는 삶으로 양분했다. 애급을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지도자 모세는 눈물의 고별 설교를 한다. 마지막 당부의 핵심은 앞으로 생명(복)의 미래와 죽음(화)의 미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결단하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도 씨 뿌린 목적에 맞게 풍성한 결실을 한 씨앗과 여러 가지 이유로 결실하지 못하고 중단된 경우로 대별하고 있다. 

 

성경의 세 본문에 공통으로 흐르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복)이 충만하여 인생과 역사에 결실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우리 앞에 행복한 인생과 불행한 인생이 놓여 있는데, 하나님은 자녀들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계신다. 

 

 

2. 공포로 막아본 육체의 욕심 

 

시대와 상황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면 행복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는 단언이다. 이것을 믿고 산 사람과 이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은 파국에 이른 사람의 경험을 오랜 시간과 역사를 통해 기록하여 후대의 이정표로 삼은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은 왜 매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도의 말씀을 강조하셨을까? 웬만한 내용들은 학습효과를 통해 후대의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매 시대 사람들마다 이전의 선배들이 지은 것과 같은 죄악에 빠졌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 생명의 길보다는 죽음의 길에 서는 것, 풍성한 결실보다 빈껍데기 삶으로 이끄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 인간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관점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기질을 원죄라고 할 수 있다. 

 

500년 전까지 기독교 세계를 주창한 유럽 교회는 당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 풍성한 결실의 인생을 살라고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지옥의 형벌에 대한 공포였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 되돌릴 수도 없고 중단할 수도 없는 잔혹하고 끔찍하면서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응했다. 서양 중세 천년은 지옥에 대한 공포 위에 건설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서양 중세 말기인 13~1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자연 재해, 그 중에서도 유럽 인구의 70~80%를 죽음으로 몰아간 페스트의 창궐은 모두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죽음에로 내몰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두려움의 믿음이다. 공포가 깊을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두려움이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중세 교회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 공포를 심어주려고 했다. 공포야말로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맹이 다수인 사람들에게 이 공포를 잘 전달하기 위해 거대한 성당마다 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지옥의 참혹함을 표현했다. 특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당의 정문 위에다가 주로 최후의 심판을 조각하여 두려움을 자아냈다. 

 

얼마 전에 대형 화마로 전 세계인의 안타까움을 자아낸 파리 노트르담 성당은 서양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이다. 그 주 출입구에는 최후의 심판 부조가 새겨져 있다. 왼쪽의 천국을 향하는 사람들과 오른쪽의 지옥으로 체포되어 가는 사람들을 함께 새겨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공포를 통한 신앙의 주입이다. 이 공포가 서양 중세 천년을 지탱해온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세계적인 예술 영화감독인 러시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년)의 대표작은 ‘안드레이 루블레프(1969년)’다. 실존인물인 러시아의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레프(1360년~1430년 경)를 그린 3시간 20분짜리 흑백영화는 정말 끔찍하게 아름답다. 서양 중세가 끝나갈 무렵 러시아 최고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내면을 통해 무너지는 서양 중세와 새롭게 대두되는 근대의 풍경을 그린 영화다.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당시 모스크바 주교로부터 성당 내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달라고 의뢰받는다. 그러나 그는 두 달 동안이나 붓을 들지 못하고 고뇌한다. 그리고는 그림을 그려야 할 캔버스인 성당 안의 하얀 회벽에 물감을 뿌려버린다. 최후의 심판 지옥 장면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오래된 전통을 부정하는 것, 당연히 지옥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협박하여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게 하는 그림이 그려져야 할 자리에 검은 물감을 뿌려서 부정해 버리는 것, 새로운 시대 근대 - 중세 천년의 역사를 끝내는 근대는 여기서 시작하고 있다. 공포에 의한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지금 우리들이 호흡하며 살고 있는 근대의 출발점이다.

 

 

3. 겁을 상실한 현대에 복음은

 

서양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된 지 벌써 50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세계는 정말 너무 빠르게 너무 광범위하게 변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으며 당연히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저 하늘 끝에 올라가 봐도 천국은 없으며, 저 땅 속 깊이 파 들어가 봐도 지옥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결론은 최후의 심판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인간이 못할 짓은 없다. 하늘을 파괴하고 땅을 짓밟으며, 동물의 내장에 장기를 재배했다가 떼어서 사람에게 이식한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짓이라도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왜냐하면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500년 전까지는 인간이 너무 두려움에 억눌려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그래서 안드레이 루블레프 같은 양심적인 지성인들은 더 이상 공포를 자아내는 일을 중단하였다. 인간이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지 500년이 지난 지금 세상과 인간은 완전히 반대로 변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에 떨던 인간에서 어떤 것으로부터도 심판받지 않는 존재로, 결코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 곧 스스로 신으로 변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새 시대의 인간에게 나타난 가장 뚜렷한 특징은 육체의 욕심을 아무 두려움 없이 무한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는 꼭 인간의 신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탐욕과 쾌락 전반을 말한다. 인간의 탐욕과 쾌락의 증대를 위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모든 것을 사고 판다. 심지어 인간까지 매매한다. 인간과 역사에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여기에 대해 오늘 주님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며 성령을 거스르는 삶은 우리가 원하는 행복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 숙고해야 한다. 지난 한 주간의 삶에서 나는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았는가? 성령을 따르는 삶인가, 아니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인가? 직장 다니면서 어떻게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느냐는 항변을 주님은 수용하실 것 같다. 직장에서는 내가 내 마음대로 못하니까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에서는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 진심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500년 전 서양 중세 시대로 돌아가 지옥의 공포를 다시 되찾으면 되는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게 어렵다. 우리 육체의 욕심은 너무나 강렬하고 우리 주변의 환경은 갈수록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는 반면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산 결과의 두려움은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렇고 우리 자신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육체의 욕심을 제어할 수가 없다. 정말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자. 절박한 심정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기도하자. 구원과 생명과 풍성한 은총의 삶과 역사를 누리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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