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22:1~8
내 인생의 다메섹
예루살렘 성전에 온 바울을 본 유대인들이 그를 잡아서 성전 밖으로 끌어내는 소란이 일었습니다. 이에 로마 군인이 달려와서 소란을 진정시키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바울을 연행해 가던 중 바울이 로마 군인에게 요청하여 유대인들을 향해 연설합니다. 로마 군인과는 그리스어로 말하던 바울이 유대인에게 말할 때는 히브리어로 말했습니다. 자신이 정통 유대인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유대인이며 길리기아(튀르키예)의 다소에서 났고 자라 유대교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엘리트 유대교 학자였고 율법에도 열정적이라 율법을 어기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투옥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유대교인으로서 율법에 대한 열정을 더욱 실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쿠스)까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울은 놀라운 사건을 체험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인 처벌의 광풍을 일으킨 사울이 먼 거리 시리아에 있는 다메섹까지 박해 원정길을 올랐습니다. 사울의 이런 행위는 그만큼 자신이 기독교 박해가 정당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고 자기 확신을 실천할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메섹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그는 땅에 엎드러집니다. 누구보다도 유대교 율법에 정통했고 열정적이었던 청년 사울, 그 확신과 열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가던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엎어진 사건은 한 개인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인류 역사를 뒤엎은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고,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은 눈을 뜰 수 없었고 돌발적인 현상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기가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증언하는 바울로 변화되는 전환점입니다. 이 전환은 개인을 넘어 인류 역사의 변곡점입니다. 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다른 어떤 위인이나 물질이나 욕망이 아니라 예수인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 때문에 삶의 방향을 전환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유한한 인생을 영원에 잇대어 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엎어짐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오늘 엎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는 행복한 인생이어야 합니다.
2. 로마를 품은 기독교
세기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 예수를 증언하는 자로 변화한 사건의 국가적 확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나 로마나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정반대로 전환했고, 기독교는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세계 역사를 뒤바꿀 수 있었을까요?
오늘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엎어지고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뜨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과정에는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데에도 같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전 7:58~59)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전 8:1)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청년 사울이 있었으며 사울은 스데반의 처형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후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네로 등 로마의 여러 황제가 기독교 신자들을 끔찍하게 박해하면서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자들을 없애고 더는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나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고문받고 죽어가는 기독교인들은 정말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두렵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목숨을 버렸습니다.
누군가를 색출해서 공직에서 해임하고 집에서 쫓아내고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이유는 그 공포와 고통을 통해서 더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렇게 하면 자신의 신앙을 버립니다. 계속 그 신앙을 지키기에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기꺼이 죽어갔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기독교가 무엇이길래 고문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일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 변화된 것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았을 것이고 그때마다 도대체 이들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지, 내가 하는 이 일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인을 잡아다가 경기장의 수많은 군중 앞에서 태워죽이고 사자 밥으로 주었는데 그렇게 죽어가는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모습에 로마 시민이 오히려 충격을 받고 기독교에 관해서 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사건과 박해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죽음 앞에서의 의연한 자세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이익에도 넘어지고 아주 작은 고난에도 쉽게 신앙을 저버리는데, 초대 교회 교인들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신앙을 지닐 수 있을까?
3. 다시 찾을 천국
유리 가가린(1934~1968년)은 인류 최초의 우주인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지구 밖 우주에서 한 말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라고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가린은 구(舊) 소련의 우주비행사였지만 독실한 기독교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싫어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종교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하면서 가가린이 했다고 꾸며낸 말입니다. 어쨌든 오랫동안 인류는 신이 저 신비의 우주 공간 어디에 계실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우주 시대를 통해 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가면서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어왔던 하늘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거 기독교인이 갖고 있었던 천국을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우주 어느 공간에 있든 없든 우리가 지금 죽어도 갈 수 있는 천국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중요한 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전 7:56)
기독교 초기 신자들이 온갖 고초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금 죽어도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순교를 당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으면 질병이나 고문이나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스데반과 초대 교회의 많은 신앙인은 천국 소망을 확신했기에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박해자 사울이나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이 어느 순간 삶의 전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의 유혹과 고난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신앙의 비밀-내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천국이 꼭 우주 어느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내 생명이 영원히 안식한다는 믿음이 약해지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시련에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보수적 교회의 외침이 요즘 시대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2천 년 기독교 신앙이 흐려지면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과학‧물질주의와 니체 이후로 세계는 보이는 세상 하나가 전부지 다른 것은 없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폐기하고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현대인은 극도의 현세주의에 빠져 탐욕과 쾌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것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내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내 생명은 다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분명한 믿음 위에 설 때 우리는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 신앙은 이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복음에서 천국을 되찾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이 믿음이 내 삶의 내용을 변화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