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2:14-16, 행 21:39–22:16, 막 10:46-52
저는 눈이 아주 밝은 편이었습니다. 두 눈의 시력이 모두 2.0에 이르렀지요. 뭐 자랑은 아니지만, 사격 실력은 선수급이었습니다. 뭐든 다 정확히 본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그런데 중년에 접어드는 어느 날, 제 생각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4차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지요. 그런데 길 저편에 반가운 사람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아주 친한 친군데 수십 년 동안 못 보았던 친구입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손을 들고 웃어주었더니, 그 친구도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아니, 웃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마자 그 친구를 향해 튕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두 발짝 앞에 두고 저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게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전혀 낯선 사람이었지요. 얼마나 저 혼자 뻘쭘하고 당황하고 민망했는지요. 내 두 눈에 분명히, 확실히, 정확히, 내 친구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제 눈이 노안이 된 것입니다. 제 눈이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내가 본 것이 다 맞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내가 들은 것이 정확하다고 우기지 말자,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말자. 정말 절실히 깨달았지요. 나는 내가 본 만큼만 보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보다 못 보는 게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예루살렘이 들어가시게 되지요. 그런데 그 길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라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지요. 아마 그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눈이 먼 거지였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길가에 나앉은 사람이지요. 그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여정의 마지막 목표가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이 그 종착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선 직전에 먼저 여리고에 가셨습니다. 여리고는 어떤 곳일까요? 출애굽 사건 때에,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함락시켰던 곳이지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를 기점으로 가나안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여리고에 들르셨다가, 거기서 제자들과 큰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여정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정말 긴박하고 참으로 중차대한 시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때에, 그것도 눈이 먼 거지가 예수님을 부르며 자기를 봐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거 예수님의 길을 훼방하는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그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좀 조용히 해라,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지금은 너 같은 눈먼 거지가 끼어들 때가 아니다, 그런 얘기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굽히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사람, 참 딱한 사람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자기 같은 거지가 다가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분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은 나라를 구할 사람이요, 민족을 구할 사람이요, 세상을 구원할 사람입니다. 지금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열두 제자에 둘러싸여, 큰 무리를 거느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업을 이루려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역사적인 시점에 겨우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달라니, 그것도 눈도 성치 않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를 좀 봐 달라니 이런 딱한 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철딱서니 없는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사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번쩍 들어다가 바깥에 내팽개쳐 버려야 옳지 않겠습니까? 누구 말마따나, 그깟 병사 하나 물에 빠졌다고 사령관을 흔들면 나라는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눈먼 거지 한 사람을 위해서 예루살렘 행진을, 하나님 나라의 행군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가, 눈먼 거지의 부르짖음에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자기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왔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그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디매오라는 사람의 아들, 눈먼 거지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멈추시고, 그 눈먼 거지를 만나주셨고, 다시 볼 수 있게 되를 바라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멀었던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사물만 보게 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곧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그저 한 눈먼 거지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놀라운 기적 이야기만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사건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른바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줄곧 예수님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해 주셨지요.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영광의 길이 아니리 수난의 길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고, 자기들도 그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을까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도무지 그 고난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도무지 한사코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길을 가로막고 안 된다고 윽박지르다가, 예수님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 막바지에 다시 한번, 세 번째로, 제자들을 곁에 가까이 불러서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세 번’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정도 말씀하셨으면, 이제는 아무리 청맹과니 제자들일지라도 알아들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알아들었을까요? 알아들었겠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인자를 이방인에게 넘길 것이고, 이방인들은 사형을 선고하고,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제자들은 무슨 짓을 합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따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를 좌우에 앉혀 달라고, 인사청탁을 합니다. 그걸 열 제자가 알고 분개하지요. 이게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알려줘도 도무지 모를까요? 그렇게 보여줘도 한사코 못 보는 것일까요?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들의 욕심만 보고 있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사람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보여줄 길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눈멀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반해,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이 눈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절실하게 보고 싶어 했고, 간절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씀일까요? 어쩌면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 “똑바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서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백성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백성이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고 탄식하지요.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에서도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눈먼 나의 백성’을 인도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눈멀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력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이 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이 밝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실제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기들의 욕심에 차지 않는 하나님은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보여주는’ 하나님을 열광하며 섬깁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면서, 한 가지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42장 17절 말씀입니다. “깎아 만든 우상을 믿는 자와 부어 만든 우상을 보고 ‘우리들의 신들이십니다’ 하고 말하는 자들은, 크게 수치를 당하고 물러갈 것이다.” 여기서 깎아 만든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신입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자기들이 탐하는 것을 형상화한 우상이지요. 우상의 특징은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상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허망한 욕심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우상을 신이라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맹신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우상을 신이라고 믿는 자들보다는 차라리 ‘눈먼 나의 백성’을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차라리 눈먼 자들에게, 아니, 눈먼 것을 아는 자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암흑을 광명으로 바꾸시고, 거친 곳을 평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망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눈이 먼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눈이 밝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눈을 떠서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다시,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율법의 문자에 눈멀어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지요. 그런데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만났을 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멀고서야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눈먼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믿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탐욕에 눈멀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청맹과니 맹신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가 눈을 떠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빛을 따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