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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2) - " 열림과 풀림의 은혜 " / 평화통일주일 / 이태영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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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12-2) - " 열림과 풀림의 은혜 " / 평화통일주일 / 이태영 목사

관리자 2024-08-09 (금) 21:44 4개월전 318  

본문) 막 7:31-37, 롬 10:5-17, 사 42:18-43:7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막 7:31)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막 7:31)고 말씀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둘 다 지중해의 해변 도시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지배하에 비교적 번성하던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이 죄 많은 곳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눅 10:13)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로와 시돈도 죄가 많은 도시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가복음은 그곳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막 3:10). 특히 두로와 시돈은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부르짖은 곳이기도 합니다(막 3:11). 오늘의 본문 바로 전에는 두로지방에서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엎드려 예수님의 자비를 구하고 치유를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막 7:24-30).

예수님께서 통과하셨다는 데가볼리 지방도 로마제국의 강력한 지배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10개 도시의 연맹을 뜻하는 이 지역을 예수님께서 ‘통과’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권세와 그 권세하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직면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통과하셨다는 말에 사용된 ‘메소스’는 ‘가운데’ 또는 ‘중앙’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 (막 7:32)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이르신 후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안수해 주시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대체로 어릴 때 귀를 먹게 되면 말을 더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듣기 때문입니다. 귀로 여러 번 듣고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청각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병자는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듬는다는 합니다. 어릴 때 열병에 걸려 체온이 심하게 올라가면 눈이 멀기도 하고 귀가 먹기도 하고, 심지어 몸이 뒤틀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추측을 해 보면 이 사람은 어린이 시절에 어떤 병에 걸려 귀가 먹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말도 어눌해지고 더듬게 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병자의 상태를 통해 이들이 겪는 고통과 절망이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오랜 시간을 통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막 7:33 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모두 보는 곳에서 치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사람들과 분리시키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라고 했는데, 여기에 쓰인 단어는 “아포람바노”입니다. “아포”는 ‘분리’를 뜻하는 말이고, “람바노”는 ‘받다, 취하다’는 뜻하는 말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무리와 분리해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로 하여금 이제 자신이 평생 의지했고 의존했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가 단독자로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셨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막 7:33 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병자와 하나가 되신 것을 증언합니다. 손가락을 이 병자의 양쪽 귀 속으로 넣으심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귀를 뜻하는 말 “우스”는 문자적으로 신체의 일부를 말하기도 하지만, ‘듣는 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마 13:15,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예수님의 손가락이 이 병자의 귀 속에 들어갈 때, 예수님의 손가락 끝이 이 병자의 마음에 닿았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져주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잠자던 그의 마음과 영혼이 새롭게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또다시 병자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침은 예수님의 진액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일부입니다. 예수님의 침이 병자의 혀에 닿음으로써 예수님과 병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혀는 문자적으로 신체의 일부를 말하지만, ‘언어’ 또는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행 2: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심으로써 그는 예수님 안에서 혀와 말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막 7:34 상)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우러르다’는 말은 ‘어디 어디를 향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도 귀하지만, 본문에 우러른다는 말에 사용된 단어 “에이스”는 조금 더 그 뜻이 강합니다. “어디 어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셨다고 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 속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과 그 탄식을 함께 나누셨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탄식하다’(스테나조)이라는 말 속에는 ‘깊은 숨을 쉬다’, ‘한숨을 쉬다’, ‘슬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깊은 숨’은 영혼의 숨을 말합니다. 이 ‘깊은 숨’ 속에는 이 병자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과 한숨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속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이 깊은 숨을 내쉬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 병자의 한숨과 예수님의 한숨이 하나님 앞에서 일체가 되었습니다.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막 7:34 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시고는 이 병자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열린다’는 말 ‘아노이고’ 앞에 ‘완전히’라는 뜻을 가진 ‘디아’가 합쳐짐으로써 “완전히 열리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열려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열릴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측한 말씀도 아닙니다. “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열리기를 바란다”는 기원의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는 완전히 열려라”고 하신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측면이 있습니다. 명령의 말씀이라면 “열어라”고 해야 합니다. 문을 열라고 할 때 “열어라” 이렇게 명령하지, “열려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열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동의 형태로 말씀하셨습니다. “열어라”와 “열려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열어라”는 이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여는 것을 말합니다. 너 스스로 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려라”는 다릅니다. “열려라”는 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너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여시는데 너는 하나님의 여심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주관자가 되셔서 너를 지금 여시려고 하는데 하나님께 너를 내어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려라”는 말씀은 “너를 하나님께 드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막 7:35 상)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 맺힌 것이 풀렸습니다. 이 본문에서 ‘열렸다’는 말과 ‘풀렸다’는 말은 모두 수동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셨고, 아니고 하나님께서 혀를 풀어주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열림”과 “풀림”은 구원의 징표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징표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징표입니다. 

‘열다’(아노이고)는 문(마 7:7, 눅 11:9), 눈(마 9:30, 요 9:14), 귀(막 7:35), 입(마 13:35, 눅 1:64), 무덤(마 27:52) 등이 열릴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심지어 ‘하늘이 열린다’(눅 3:21)고 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이) 펴지다’(계 5:3, 4)는 뜻에도 사용됩니다. 스테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실 때, 돌이 무서워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보세요,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옆에 계십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에 기록된 증언입니다. 

‘풀다’(뤼오)는 감옥에서 석방되는 것, 차꼬에서 풀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신앙적으로는 온갖 굴레와 죄에서 해방되고 벗어나는 것(미 16:19, 18:18, 눅 13:16)을 뜻합니다. 장벽이 무너지는 것(엡 2:14)을 의미하기도 하며, 죽음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것(요 11:44)을 뜻하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누군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의 입이 열리고, 그의 마음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 10:9)이라고 할 때, “시인하다”(호몰로게오)는 말 속에는 ‘고백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백하고 선포하며 찬양하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것이 열려야 합니다. 입과 마음도 열리고, 영혼도 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강조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듣다’는 말 속에는 ‘깨닫다’(마 13:14)는 뜻도 있습니다. “들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참되고 영원한 깨달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뜻입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사 42:18)

이사야 예언자도 ‘들음’과 ‘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42:19) 특히 이사야 예언자는 눈을 뜨고 보지 않으려 하며,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인간의 죄 된 성품을 꾸짖습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사 42:20)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이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 미치지 못한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 42:25) 이렇게 질책을 하면서도 이사야는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사 43:1-2)


오늘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귀를 열고, 우리의 입을 열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열리지만, 거역하면 그대로 닫혀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주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는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영혼이 열리고, 우리의 삶이 열릴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려야 우리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리는 은혜가 허락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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