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겔 47:1-12, 행 3:1-10, 막 1:29-39
1) 거대한 죽임의 문명(文明)을 넘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하는 것들을 짓밟고 죽여야 하는 거대한 죽임의 문명이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이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강자(强者) 논리에 묶여있습니다. 힘이 없는 존재들은 힘을 가진 것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는 비정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는 정의(正義)도 없고, 평화(平和)도 없고, 생명(生命)의 조화(調和)도 없습니다. 지옥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금 이 죽임의 문명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결국 이 세상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는 이 죽임 문명을 넘어서는 대안문명(代案文明)을 만들어 내야만하는 문명사적(文明史的) 전환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위기를 겪었고, 심각한 기후 위기를 겪고 있으면서도 자각(自覺)이 없는 인류를 어떻게 우리가 호모 싸피엔스(Homo Sapience)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금년 여름 과거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엄청난 폭염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에어컨을 켜고, 한없는 화석연료를 태우며 바캉스를 즐기러 가는 자동차의 끝없는 행렬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두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류는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이제 여기서 멈추어야합니다. 죽임의 문명과 작별하고 생명의 문화 곧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 희망을 꿈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세 본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 곧 ‘살림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물 환상을 본 에스겔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8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정복되고, 많은 포로를 끌고 갔을 때 끌려간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의 그발강가에 정착하여 살던 중 주전 59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특별히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환상을 많이 보고 예언하여 절망 중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고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에스겔은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 하나가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있는 하나님의 큰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에 관한 말씀은 당시 패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질 것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또 오늘 에스겔서 본문 47장의 환상은성전 동쪽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물이 흘러가며 갈수록 물 깊이가 점점 더해져 천 척(약 500미터)을 나아가 재어보니 발목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더 나아가 재어보니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더 나아가 재어보니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더 나아가 재어보니 헤엄칠 만큼 많은 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닿는 곳곳에서 생명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물이 닿는 강가의 좌우편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나고, 또 죽었던 바닷물이 다시 살아나 거기 각종 고기들이 많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물이 흘러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강 좌우편에 있는 과실나무에서는 과실이 끊어지지 않고 나며 달마다 새 과일이 나는데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사귀는 약재로 쓰이게 되는데 이는 그 물이 성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에스겔은 선포했습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닿는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 살림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생명을 살리는 물이 성소의 문지방에서 솟아나온 것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여기서 이 성소에서 솟아나온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고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의 물 환상은 창세기 2장에 있는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창2:10)과 요한계시록 22장에 있는 생명수 강(계22:1-2)과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본문 12절의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본 환상에서 그 생명수 강물이 어린양의 보좌부터 나온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환상에서의 생명수 강물은 곧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하)고 하셨습니다. 결국 에스겔이 본 환상의 의미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닿는 곳곳에서 죽어가는 것들이 살아나고 죄와 어둠에 갇힌 세상이 밝은 빛을 보며, 죽어가는 생명들이 회복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탐욕이 지배하는 현대의 죽임의 문명 속에서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파멸과 죽임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기적 욕망이 아닌 자기희생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이 죽임의 문명의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데 예수님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밀알정신’ 곧 ‘자기희생 정신’이 우리 죽임의 문명을 극복할 확실한 대안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 살림정신은 지금의 악한 탐욕의 시대를 거스릅니다.
3) 각종 병을 고치신 생명의 주 예수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이어 몰려든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과 귀신들려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회복시키시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고쳐서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생명을 살리시는 사역은 바로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 오늘 말씀은 이런 예수님의 사역 배경에는 예수님의 겸손하신 기도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신 가운데서도 새벽 날이 밝기 전에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낮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각종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저녁 혹은 새벽 시간에는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영적인 능력이 예수님의 사역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겸손하게 기도하심으로 생명의 능력을 확보하신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시고 병든 자들을 온전하게 고치는 생명살림의 역사를 계속해서 만드셨습니다.
4) 베드로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
서신서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을 체험한 후 사도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래 그런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체험한 후 성령 받고 나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그런 능력이 사도들의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시간을 정해놓고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제 구시(오후 3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동쪽 문인 ‘미문(美門)’에서 늘 구걸하던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구걸할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 장애인은 즉시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사람이 고침 받은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장애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을 치유한 것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생명의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를 위해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도 주목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는 시간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그 이름의 능력이 사람을 고쳐 온전하게 했습니다.
5) 맺음
지금의 탐욕이 지배하는 죽임 문명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이 죽음의 어둠을 걷어낼 새 희망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우리에게도 한 알 썩어지는 밀알처럼 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생명살림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 생명을 받아 살고, 생명의 능력을 받아 이 세상을 살려가는 생명지기로 살아가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