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17:8-16, 행 6:1-7, 막 6:30-44
제시된 세 본문을 읽으면서 믿음에 관하여 다시한번 깊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밖의 말씀이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고 하면서 에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모세 거쳐 다윗과 사무엘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언급하지 않는 선지자들의 일을 다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였는데, 엘리야로 말하자면 믿음의 산증인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닐까를 생각하면서 본문을 살펴봅니다.
우선 믿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하였으니, 믿음은 눈에 보여지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장에 눈앞에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가지고 내가 믿었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믿기 이전에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소망할 때, 그것은 육적인 경험과 판단을 넘어서는 불확실한 것이요 미지의 것이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자는 내가 바라는 것이 당장에 보이지 않음에도 장차 보게 될 미래의 실상을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았고 그것을 증거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이 가장 깊게 우상숭배의 늪에 빠졌던 아합 왕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과 결혼하여 수도인 사마리아 성에 바알 신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알을 위한 제단을 쌓고 예배하였습니다.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우상이 들어왔던 것인데, 아합은 그를 척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알숭배에 앞장 섰던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엘리야는 아합 왕을 찾아가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뭄을 선포합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지 가뭄이 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숭배의 징벌로 가뭄을 선포하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도록 합니다. 엘리야는 까마귀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어오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버텼으나, 계속된 가뭄으로 시냇물마저 말라버리니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 성의 과부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시돈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이세벨의 친정었습니다. 이세벨의 아버지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땅 시돈과 그리고 그곳의 과부에게로 가서 몸을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어느 모로 보아도 마음 편히 피할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까마귀들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향하였습니다. 사르밧 성문에 이를 때에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한 과부를 만나게 되니,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면서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말합니다. 엘리야의 청을 들은 과부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통에 남은 곡식 가루를 가지고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 나뭇가지를 줏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아들은 이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에 얼마나 혹독한 가뭄이 지속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을 날을 기다리겠다는 과부의 말을 듣고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네 말대로 마지막 떡을 만들되 나를 위해 먼저 만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뭄을 그치게 하는 날까지 네 집에 곡식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담대하게 아니, 상식을 벗어난 무례한 요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가뭄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가뭄을 선포했고, 이 가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에 비로 변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의 경험으로, 엘리야는 지면에 비가 내릴 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 후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얻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먼저 엘리야의 상황에서 믿음을 살펴봅시다. 나는 과연 시돈 땅과 사르밧의 과부에게로 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지막 떡을 남겨 놓은 과부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이 떡을 나눌 때에 양식이 갈하지 아니하고 넘칠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설교를 작성하는 저 역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라”(마 17:20)고 하신 말씀이 가슴을 두드립니다. 믿음은 종말적인 것이요, 마지막 남은 것조차도 아낌없이 투신하는 전적인 것이기에 감히, “나 믿노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믿음조차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자체가 작고 보잘것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작고 미미한 것에서도 가능성을 찾고 소망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르밧의 과부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와 함께 나눌 때, 하나님께서 가뭄이 그치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왕상 17:15) 양식이 갈하지 않는 이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끼의 양식이 혹독한 가뭄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이적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분량은 한 끼 양식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복음서의 마태복음의 말씀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그리고 날이 저물어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저들의 어려운 상황을 아셨기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니, 이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 = 노동자 하루 품삯) 어치의 떡을 어떻게 사다 먹일 수 있겠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라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하니,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 무리에게 나누어 주니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행구절인 요한복음 6:9은 오병이어가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에서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오병이어, 다시말해 한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은 기적의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한 알의 겨자씨에 불과한 작은 믿음이었지만, 그 믿음은 내 것을 다 내어놓는 전적인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히 오천 명 앞에 오병이어를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큰 믿음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음식을 공궤하는 구제의 일로 인하여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성령충만한 설교로 삼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모이기에 힘썼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열두 사도는 먹고 마시는 접대에 빠져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사람을 세워 안수하고 그들에게 봉사의 사역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하였습니다.(행 6:4)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행 6:7)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르밧 성의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마지막 음식을 내어놓으니 가뭄이 그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어린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던 오병이어를 내어놓았더니 오천명을 배불리 먹고이고도 열두바구니가 남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눈앞의 구제에 매이지 않고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행 6:4) 다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의 현실에서 가능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2)이니, 믿음을 소유한 자는 육의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고 장차 주어질 미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발행한 길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통의 가루가 마르지 않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의 역사 그리고 오천명의 양식이 해결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크고 놀랍고 기름진 것이 아니라, 한 끼의 양식과 오병이어가 담긴 도시락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지만 마지막 것을 내어놓는 종말적이고도 전적인 헌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르밧 과부를 풍성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하늘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