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습 1:14-18, 벧후 3:8-13, 눅 17:20-37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감염자 6억 9천만 명 중 690만(1%)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재러드 다이아몬드(UCLA대 교수)는 최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첫째는 더 강력한 팬데믹의 발생입니다. 미생물은 그것을 퇴치하려는 인간의 기술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고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팬데믹보다 더 심각한 전 세계적인 위기의 도래(到來) 입니다. 전 인류를 파괴할 핵전쟁, 빠르게 진행 중인 기후변화, 4대 필수자원의 고갈(산림, 해양, 담수, 표토表土), 그리고 전 세계에서 만연한 ‘불평등’입니다. 그는 이 불평등으로 인해 “빈곤 국가에서의 질병 확산, 생존을 위한 국제 테러, 막을 수 없는 이민”이 폭증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시작한 것을 아름답게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시작한 일은 끝을 내고 그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 아름다운 우주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타락한 인간과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고 인간과 이 세계를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회복시키시고 재창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계21-22장). 우리는 이 역사의 마지막 위기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처럼 사는 것
우리가 이 위기시대에 가장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오늘을 우리 인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이 타락한 세상의 종말과 함께 이루어질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복음서를 보세요!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데 여호와의 날, 곧 주의 날에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께서 강림하셔서 타락한 이 땅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신다고 하시고, 구약 예언서 본문은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환난과 고통과 패망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9-30)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습1:15-17)
그런데 그 날은 심판과 고통과 환난의 날만이 아닙니다. 그 날은 오히려 하나님께 데려감을 받는 자와 버림을 받는 자로 나누어지고 구별되는 날이요, 그 날은 온 우주와 지구가 새롭게 재창조되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34-35)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그러므로 우리는 전 지구적인 위기와 심판의 날 앞에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교수였던 여 권사님이 노년에 3개월 시한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병원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눈앞에 파란 가을하늘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늘을 보는 날이 몇 날이 될까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집에 오자마자 옷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옷 몇 벌만 남기고 친구들, 교인들, 친척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통장을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드리지 못했던 십일조를 떼어놓고 목사님 식사도 대접하고, 가까운 이웃들을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일,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일에 사용합니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삶의 기쁨과 감격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3개월이 한참 지났어요! 그리고 수년간 아무 일 없고 건강해요. 친구가 그래요. 그동안 너무 퍼주고 산 것 후회되지 않아? “아니야, 내 인생에 이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어! 시한부 병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지!”
다음이 아닌 지금, 환경이 아닌 나를 바꾸는 것
그런데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까요? 주님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매우 가깝고도 빠르게(습1:14) 마치 도둑처럼(벧후3:10), 아무도 모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자의 날 하루”(눅17:22)는 점쟁이처럼 콕 집어서는 알 수 없는 날입니다.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시간은 오늘이요, 유일한 기회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습1:14)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17:22)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올까요? 우리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나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엄청난 변화가 우리 몸에서 매 순간 일어납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28일 만에 다 바뀝니다. 우리 혈액 속에 있는 적혈구는 120일 만에 새 것으로 바뀝니다. 손발은 180일 만에, 뼈와 근육은 200일 만에 새 것으로 변합니다. 1년 전 내 남편은 그 남자가 아니고 1년 전 아내는 그 여자가 아닙니다. 세상도 변하고 강산은 더 빨리 변합니다. 그런데 안 바뀌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자기에게 매어있습니다. 자기라는 이기심의 노예입니다. 항상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이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이지 않으면 미움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붙들리지 않으면 분노의 노예가 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으면 세상에 빠집니다. 말씀에 빠지지 않으면 죄악에 빠집니다. 기도에 빠지지 않으면 세상의 우상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우리마음은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과 이웃에 대한 경탄으로 사는 것
소설가 김홍신이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등반에 도전했답니다. 너무 힘들고 위험해서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앞만 보고 걷습니다. 마지막 날 기진맥진한 중에 한 후배가 큰 소리로 제안했답니다. “저쪽 히말라야 12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빙벽으로 올라갑시다! 그래야 여기 올라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빙벽을 오르는 순간, 히말라야 12봉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그동안 죽을 고생을 한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면서 거대한 감격, 거룩한 “경탄”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온 우주의 역사가운데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 히말라야보다 더 존귀한 자신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경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우리는 히말라야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준비해야만 할까요? 이웃을 향한 거룩한 행실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입니다.(벧후3:11)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룩한 행실은 육신의 정욕과 세상과는 전혀 다른(구별되는) 삶,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희생시키고, 경쟁상대를 이기고 제압하는 삶의 방식으로 삽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은 그와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것은 “사랑”, 즉 우리의 아집을 벗어나 먼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한 부분이 아니고 세상이 존재하는 전부입니다. 세상을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는 존재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경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하나님을 참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참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한 수도원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방문객이 줄어들고 사람들이 점점 수도원을 찾지 않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오는 재정이 줄어들어 수도원 유지가 힘들어졌고, 무엇보다 수도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은 존경받는 경건한 랍비 한 분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경건한 랍비는 묵묵히 수도원장의 말을 경청하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의 수도원에 메시야가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수도원에 메시야가 계시다니!” 그리고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날부터 조용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모든 수도사들이 다른 수도사들을 말할 수 없는 겸손과 존경심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로를 대하는 언어가, 태도가, 행실이 거룩하고 경건하며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 수도원에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헌신이 넘치고 무엇보다 자원하여 수도자들이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조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마지막 위기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