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욜 2:1~11, 살전 5:1~11, 막 4:21~34
종말! 개인적으로는 죽음이고 역사적으로는 세상의 끝을 말합니다. 세상이 끝나는 것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야훼의 날! 성서에서 종말이란 말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끝날(미 4:1), 말일(사 2:2), 후일(단 2:28), 말세(행 2:27; 벧전 1:20) 등이 있습니다. 또한 야훼 하느님과 예수님이 주인이 된다는 의미로 야훼의 날(암 5:18), 주의 날(행 2:20; 살전 5:2), 주 예수의 날(고후 1:14), 그리스도의 날(빌 1:10),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하느님의 날(벧후 3:12) 등이 있습니다. 또한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그날(호 2:16,18,21; 딤후 1:18), 그 때(사 35:5-6), 그 후(욜 2:28), 이 모든 날 마지막(히 1:2) 등으로도 묘사합니다.
그날을 어떻게 말하든 성서에서 세상의 마지막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파국과 멸망을 이야기 하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왕들을 위시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국가의 멸망을 경고하고 하느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의 경고와 요구를 무시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야웨의 날’을 선포하는데, 이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파멸의 날이요, 빛의 날이 아니라 어둠과 불안과 공포의 날입니다.
요엘서에서는 주의 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나팔을 불어라.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유다 땅에 사는 백성아, 모두 떨어라.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은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에 뒤덮이는 날이다.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군대가 온다. 마치 어둠이 산등성이를 넘어오듯이 새까맣게 다가온다. ...... 주님의 날은 놀라운 날, 가장 무서운 날이다. 누가 감히 그 날을 견디어 낼까?”(요엘 2:1-2,11) 구약성서에서 종말은 실제로 국가의 멸망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날이 갑자기 멸망으로 다가온다고 하면서 그날은 극심한 고난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날은 갑자기 도둑같이 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또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면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어떻게 말하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구원과 축복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선포합니다.
예언자들이 구원의 희망을 선포한 것을 예수님은 구체적인 하느님 나라(통치)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하고 공생애의 활동을 통해서 실현하고 보여줍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모습(병을 고치고, 악령을 제어하고, 모든 차별을 없애고, 벽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하신 일)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그의 말과 실천 속에서 현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나라의 절대적 완성이 최종적으로 도래할 내일을 향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이미”와 “아직 아니”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어 우리 가운데 있지만, 그 완성은 아직 아니고 미래의 희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미”와 “아직 아니”를 잇는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재적인 차원과 동시에 미래적인 차원은 우리가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삶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개인적인 결단을 촉구하시며 공동체적인 삶의 관계를 당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두 차원은 현재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시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파괴와 멸망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그날이 지난 후에 신실한 야훼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희망을 함께 선포했습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특히 발달한 종말신앙은 절대자의 역사 개입에 의하여 현재의 세계질서는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종말은 파괴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서에서 말하는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성서적 종말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종말사상으로 희망을 삼는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현실은 아직도 하느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시간적 이중구조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6-11)
* [γρηγορέω] 깨어있다, 주의하다, 주시하다, 정신을 차리다, 경계하다, 방심하지 않다, 신중하다
* [νήφω] 술 취하지 않다, 술을 절제하다, 근신하다, 경계하다, 조심하다, 신중하다, 침착하다
* [παρακαλέω] 간청( 탄원, 애원, 요청, 권고, 훈계, 설득, 격려, 위로)하다, 활기를 주다
* [οἰκοδομέω] 집을 짓다, 건축하다, 세우다, 크게 하다, 덕을 세우다, 유익을 주다, 수선하다, 장식하다, 가르치다, 향상하다, 용기를 얻다, 튼튼하게 하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가 결정됩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 위에 두어서 빛이 드러나고 주위가 밝아지는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과 선포로 감추어 졌던 하느님 나라의 비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본문을 다시 번역하여 읽어 봅시다. “너희가 들은 것을 잘 생각하여라. 너희가 헤아린 헤아림으로 너희를 헤아리게 될 것이요, 너희에게 더하게 될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도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잘 생각하고 깨달아라. 그 말씀을 귀 기울여서 듣고, 다시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씨름해 보라.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뇌할수록 하느님 나라의 비밀은 드러나고 깨달음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만큼 행동하고 씨앗을 잘 키운다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씨앗에 뿌려진 밭의 길 가, 돌 위, 덤불 속처럼 그 씨앗을 빼앗기거나 말라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가진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여서 좋은 흙처럼 열매를 맺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의미를 깨닫고 행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의 상태가 중요한 것처럼,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밭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여느냐 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침상이나 말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드러나도록 하지 않으면 숨겨지지 않고, 알려지게 되도록 하지 않으면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이다.”(21절) 숨겨진 것이라도 때가 되면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졌을지라도 때가 되면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비유 속에 담긴 비밀도 드러나고 알려지게 됩니다. 땅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던 씨앗도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자라면서 볼 수 있게 되듯이 하느님 나라의 비밀(복음)도 때가 되면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나를 통해서,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 무엇이 드러나고 알려지고 있나요. 우리가 간직한 하느님 나라의 비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어떻게 싹이 트고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나요. 우리가 맺은 열매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우리에게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언제 드러나고 알려질까요? 지금 땅 속에서 꿈틀대며 위를 향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그것을 보고 들으면 됩니다. 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고 들을 수 있으면 더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담긴 수많은 사건을 보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지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입력된 것만큼 실행되고 출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의 씨앗입니다. 삶의 매 순간마다 헤아리고, 생각하고, 되새기고, 고민하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서 많이 생각하고 움직일수록 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든지 하느님 나라라고 하든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공동체의 신앙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신앙입니다. 제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을 찾아서 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결과를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곧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메시아 예수님께 “아닙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려고 합니다.”라고 만류하는 것이 아니라, “아멘. 마라나타!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환영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그 날과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 날과 그 때가 언제나이고, 항상 그날과 그 때라는 말입니다.
종말신앙,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내가 어느 생명의 예수(해방자)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메시아적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