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4:7~26
1. 시대의 전통
구약 성경의 재미있는 이야기 룻기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관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쯤, 유다 지방에 기근이 들어서 나오미는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옆 나라 모압 지방으로 임시로 피난 갔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두 아들과 함께 살다가 두 아들이 룻과 오르바라는 현지 모압 여성을 각각 아내로 맞이해서 10년쯤 살았는데, 그 뒤 아들 둘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 집에는 세 명의 여성 과부만 살게 되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후, 흉년이 들었던 유다 지방에 이제는 풍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풍성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을 떠나 고향 유다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유다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나를 따라 유다로 가지 않아도 된다. 친정인 모압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다. 나오미는 시어머니로서 며느리들을 배려하고 행복하길 원하는 진실한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룻과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들고 크게 울면서 “아닙니다. 우리는 고향인 모압이 아니라 어머님 가시는 곳에 같이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11절에는 나오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룻기 1:11)
옛날 이스라엘에는 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형의 족보에 올려주는 그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내 생명이 자식을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이 죽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었고, 혹시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그 동생들이 죽은 형의 대를 이어줘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관습입니다. 우리는 근친결혼을 법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8촌 이내의 친족끼리는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유전학적으로 굉장히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유럽이나 일본은 친족 결혼을 허용해서 사촌끼리 결혼하는 풍습이 아직도 있습니다. 가장 오랜 기간 유럽을 제패했던 합스부르크 왕가(1273~1918년)는 계속해서 친족 결혼을 했습니다. 아마 권력과 부를 다른 가문과 나누지 않고 계속 이어가려는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유전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에 별로 문제없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친족끼리 오랫동안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계속된 친족 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길고 뾰족한 턱이 유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후대 의학자들은 이것이 친족 결혼의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지금 의학 상식과 문화와는 다른 관습들이 군데군데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와 2~3천 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고, 지리‧정치‧문화적으로 아주 다른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하고 올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겁니다. 신학은 결국 아주 먼 옛날 전혀 다른 배경에서 기록된 성경이 21세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해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율법과 대결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신앙은 구약의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좇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은 필요한 전통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대체할 새로운 법, 새로운 구원의 길을 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력하게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율법이 천 년 이상 이어지면서 율법의 본래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기 때문에,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선언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요지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이제 개인 교사 밑에 있지 않습니다. (갈 3:24~25)
오늘 갈라디아서에서도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개인 교사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이제 더는 율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께서 율법의 본질을 실현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바울이 증언했습니다. 주님 오신 이후로 율법이 아니라 그르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새로운 신앙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통의 율법을 대신하며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입니다.
2.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나디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25*25cm, 2013년
우크라이나의 여성 화가가 성경의 유명한 장면을 아크릴에 그렸다.
나무에 하얀 꽃 만발한 어느 날, 사마리아를 지나던 예수님이 수가 마을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마주 앉았다. 젊은 여인은 곱지만, 밝지는 않다. 그녀의 삶이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쫓아다니지만, 행복은 파랑새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가정이 복잡하고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의 갈증도 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는 바라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제 파랑새를 쫓지 않는다.
햇볕 따가운 오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예수님을 향해 희망을 접은 사마리아 여인은 오히려 차갑게 반응해버렸다. 조금은 뾰로통한 입술로 ‘왜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하시지요?’라고 반문한다.
주님은 여인의 닫힌 마음을 따뜻함으로 열어주신다. 주님의 후광(Aura)을 주황색 계통으로 꾸며 차가운 여인과 대조되는 따뜻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물을 여인에게 건네신다. 가뭄의 시대에 철철 넘치는 물이다. 어떤 기갈에도 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까칠하던 여인도 이 물을 받고자 물통에 손을 대고 있다.
뒤늦게 주님을 알아본 여인은 평소 간직해둔 의문을 묻는다.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산에서 예배하라고 배웠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도 한다, 어떤 것이 맞느냐고! 양자택일의 함정에서 주님은 전통에 깃든 본질을 지적하셨다. 참 예배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우리의 자세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예배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장소나 물적 조건보다 근원적이 요소다.
우리는 전통이라는 형식에 눈길을 빼앗기고, 주님은 그 껍데기가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알맹이를 보셨다. 그리스도인이란 사람과 세상을 주님처럼 그렇게 보는 사람이다.
3. 본질을 찾아내는 것
오래전부터 교회서 선물이나 상품을 교인들에게 수여할 때는 포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물건은 이미 포장이 되어 있는데 그것을 다시 포장하는 것은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기에 교인들에게 선물을 포장하지 않고 준다고 해서 정성이 없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 보전 운동의 차원임을 설명했습니다. 모든 교인이 포장하지 않은 선물에 대해 불쾌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물건을 보면 과대포장이 많아서 문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실제 물건은 크지 않은데 포장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해서 낭비를 조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이지 그것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아닙니다. 내용물보다 껍데기에 더 신경 쓰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율법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형의 후사를 동생들이 책임지는 관습은 피를 나눈 가족이 형제를 위해 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들은 예배의 전통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 담긴 참뜻,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받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핵심입니다.
기독교가 간직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화는 성격에 따라 음악‧미술‧언어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 지닌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하고 이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이 아닙니다. 껍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맹이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알맹이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관심하고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붙잡고 간직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알맹이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가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재능이 많고 성공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말을 잘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바울은 절절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나 자신을 사랑합시다.
먼 데 있는 이웃보다 우리 가까이 있는 내 가족과 친구를 사랑합시다.
같은 교회 교인이 좀 부족해도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사랑합시다.
우리 사회의 어둔 그늘 구석에서 남몰래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사랑합시다.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도 전쟁으로 죽음에 내몰리는 사람들을 사랑합시다.
껍데기에 집착하면 알맹이를 놓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구원의 소식-복음은 한 마디로 사랑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