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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3-1) - " 별난 사람 예수님 " / 총회선교주일 / 이혜숙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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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3-1) - " 별난 사람 예수님 " / 총회선교주일 / 이혜숙 목사

관리자 2024-06-07 (금) 15:03 1개월전 249  

본문) 2:14~23, 고전 1:18~25, 14:15~24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14:1)

안식일임에도 예수께서는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니 초청받은 사람 중에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어서 잔치를 베풀려거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초청하라.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갚음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상황과 대화가 오간 후에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 그러니 예수께서 오늘 본문인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은 참 무례한 사람입니다.

잔치를 베푸는 사람은 이미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초청장을 받고 오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일이 되어서 종들을 보내 초청에 응한 사람을 직접 모셔오도록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종이 주인에게 전달을 하니 주인은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사람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리 하였는데도 빈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 오기로 약속하고 정작 날짜가 되어서는 가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이 본문에서처럼 세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큰 잔치(δειπνον)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인의 공식적인 저녁식사를 말합니다. 안식일의 저녁식사는 서로 믿을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로서 피차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들끼리 갖는 교제의 자리입니다.

많은 경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보아왔습니다. 갈릴리에서는 동네 밖 산의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도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를 바리새인들은 저 자를 어떻게 하자라고 모의를 시작합니다. 그런 예수를 바리새인의 지도자가 안식일 만찬에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자기들 끼리 모이는 자리인 안식일 만찬에 초대하기에 예수는 색다른 인물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참 별스런 사람이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의 행적은 나무랄 데 없는 기묘한 인물입니다.

 

그런 별스런 사람, 예수가 십자가를 졌습니다. 순순히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가 진 십자가에 대해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고린도는 아테네와 가까운 곳으로 철학과 예술이 발달한 곳입니다. 현대의 서양철학이 그 당시의 철학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합리적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십자가로 이루는 구원입니다.

철학적으로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제기하지만 바울은 명확하게 해결되는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사람들과 헬라철학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미련한 자의 미련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미련해 보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못 박게 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영생을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바람둥이 같은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바람둥이 같은 여인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고, 당신의 말을 그의 안에 넣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았던지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2:14)고 합니다. 여기서 타이르다는 미혹하다, 유혹하다는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심정을 구구절절 다 말로 표현하면서 감추지 않습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19~20)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았고, 가슴은 과거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며, 볼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싫어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방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기대어 제 살 궁리를 하면서 민족이 멸망당할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럴 때에 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의 남편이 되어 너희를 보호 할 테니 부름에 응답하라고 간곡히 초청하십니다.

큰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이 막상 잔치 시간이 되어 참여할 때가 되었는데, 핑계를 댑니다. 밭을 샀는데 내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소를 열 마리나 샀는데 시험을 해 봐야 일을 시킬 것 아니겠는가? 충분히 수긍이 될 만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것들과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근본을 든든히 하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남편이 되겠다는 선언은 민족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 부담을 지겠다는 것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안타까우면 내가 그를 타일러서, 즉 유혹해서라도 거친들, 광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던 곳,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던 곳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들과 결혼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광야로 불러 우리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은 참 기묘한 사람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비유에서 말한 길 가에서 불려 온 사람 중 하나이고, 산울타리 가에서 모아들여진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것 등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이상하고 놀랍다, 기묘(奇妙)하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기묘하다는 말을 퀴어(queer)하다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퀴어는 사전적으로 <기묘한, 수상한, 기분이 개운치 않은, 별난, 가치 없는, 별난>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는 눈초리와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고, 부정적인 관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지난 61일에는 서울에서 특별한 퀴어축제가 열렸습니다.

가톨릭 성직자와, 불교의 승려들이 퀴어들에게 축복식을 열었습니다. 각 종교의 신자들도 마련된 축복예문을 가지고 축복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성도들의 극렬한 반대시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편에 퀴어들을 축복하는 기독교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기독교 목회자들은 퀴어들 뿐 아니라 퀴어에게 축복식을 해 주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감리교회에서 출교당한 이동환목사와 연대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기묘하고 수상하게 보였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식일 율법을 어기면서라도 하나님의 본 뜻을 행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유대교의 율법에 얽매여, 세리와 창기와 귀신들린 자와 나병에 걸렸거나 앞을 볼 수 없거나 걷지 못하고, 손이 말라붙은 사람들 외에 이방인들을 부정하다며 멀리하고 외면하였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유대인들과 유대인의 지도자 바리새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퀴어한 사람으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백성이 아니었던 자를 백성으로 삼으시고는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감춰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보고 듣기에 불편한 행동과 말을 합니다. 퀴어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찾아와서 퀴어반대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 퀴어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돌에 맞을까 두려워하듯이 자신의 기묘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교회 밖에 그대로 세워두고 그들의 눈물과 한숨을 모른 척 해야만 할까요?

 

오늘은 우리 교단에서 선교주일로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도록 강요하거나 말살한 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나의 나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온 모든 생명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유익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자기의 신념과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까지도 품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합시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단은 1953610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하여 새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올해 우리 교단총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평화, 선교 공동체>를 선언하고 실천하자고 했습니다. 생명을 해치는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생명과 평화를 떠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영과 진리로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협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한 누구나 평화를 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예배이며 하늘의 축제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기묘한 자, 수상한 자, 별난 사람으로 여겨졌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죄인을 구속하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후 1:25)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세속적 유익함을 따라 가던 발걸음을 돌리고, 인간적 신념과 전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하심 안에 머물러 봅시다.

유대교 전통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또한 철학적 지식과 지혜로 무장한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수상쩍고, 별나고, 기묘하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말씀을 품고 보혜사 성령님의 지혜를 따라 생명, 평화, 선교의 공동체로 세워지는 우리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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