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0:1~18, 겔34:11-16, 히13:7-10, 20-21
1. 우리 교단 신학교 근처에는 송암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 교회에는 기원형 목사님이라는 존경받는 선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하실 때, 교인 중에 신장이 약하여 1, 2개월 내에 죽을 수 있다고 하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의사의 말을 듣고 절망에 빠져 낙심중에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사람이었고 친척도 없었습니다. 누가 돌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절망과 낙심 중에 있는 이 청년의 상황을 기목사님은 아셨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제직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기도하러 간다고 광고하고, 세밀한 피검사를 했습니다. 혹시 그 청년에게 신장을 떼어줄 수 있는 몸인지 적성 여부를 한 것입니다. 검사 결과 신장 이식이 가능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2. 목사님은 큰 고민을 하셨을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사모님과 상의했고, 결국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신장을 형제를 위하여 하나를 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교회 당회에 알렸습니다. 당연히 장로님들은 이식해 준 후 약해진 건강으로 목회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만류했지만, 굽히지 않고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도리어 교인들에게 그 청년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3. 기원형 목사님은 그가 평생 설교한 것 보다, 자신의 교인을 위하여 자신의 신장을 떼어준 것 자체만으로도 더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송암교회 교인들은 걸어다니는 은혜 walking grace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선한 목자라는 본문이 나오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원형목사님이 그려집니다.
4. 저는 제 명함이 있습니다. 남원제일교회 담임목사라고 기록된 명함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나, 제 연락처가 필요하신 분에게는 명함을 드립니다. 명함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그러나 이 명함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제가 남원제일교회 목회자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제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어떤 교양이나 인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제 성품을 기록하지도, 기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제 삶에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 양을 위한 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6. 명함은 내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소개하고, 알리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삶을 사셨는가를 한 명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7.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주님이라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알고 있는 만큼 신뢰가 되고, 관계가 성숙되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바르게, 깊이 알아야 그 믿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 구원자인가를 알려주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 비유를 드셨는데, 선한 목자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일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당시 이스라엘 땅, 유대인들에게 선한 목자라고 하면 마음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중에 목축업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목자는 가장 정감이 어린 상징이었습니다.
9. 단순한 선한 목자라고 하지 않고, 양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린 다윗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울에게 찾아갔던 다윗은 자기가 어떻게 아버지의 양을 위해 생명을 걸었던 목자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10.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삼상 17:34,35) 자기의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힘없는 새끼를 움켜서 도망가면, 목숨을 걸고 쫓아가서 새끼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11. 사자든지, 어미 곰이든지 새끼 곰이든지 존재 자체가 위험하고 감히 인간이 덤비기 어려운 동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물고 가면, 쫓아가서 곰과 격투를 하여, 새끼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아껴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의 생명을 사랑할 때에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12. 양들의 목숨은 철저하게 목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골짜기에 서 있어야 하기에 언제나 위협을 받았고, 그때마다 목자들이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양에게는 뿔도 없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발목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습니다. 시력이 약하여 멀리 보지도 못합니다. 천성적인 연약함이 양의 특징입니다.
13. 그런 약한 양이기에 목자의 보호 아래 놓여 있을 때 안전하게 됩니다. 양에 대한 목자의 사랑, 책임감 있고, 막대와 지팡이가 있어서 양들은 존재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목자들은 그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며 지키려고 합니다. 이 양들과 목자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14.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내놓고 버리면서까지도 양을 위해 싸우는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번이나 반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15.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랑이 없이는 목숨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목숨을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 이 깊고 거룩한 사랑을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서 읽게 됩니다. 전쟁에서 패하여,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쳐있는 삶을, 무기력한 삶을, 미래가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과 같았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7.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내 양의 목자가 되어, 흩어졌던 양들을 찾아, 건져내고, 본토, 하나님의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진 꼴을 먹일 것이다.”라고 희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18.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여 징벌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되고 있다는 선포이자, 사랑 고백입니다.
19. 선하신 목자와 같은 하나님은, 목자가 양을 잃어버리면 산과 들을 찾아 헤매며 애타게 양을 찾듯이, 바벨론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심한 징벌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몸과 마음이 상한 자가 있으면 불쌍히 여겨 싸매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몸과 마음이 나약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하게 하시며, 그러나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무너뜨리신다고 말씀합니다.
20.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구현되는 역사’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바로 에스겔 선지자가 전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신 것입니다.
21.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의 삶을 살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교만과 탐욕으로 인하여 빈곤한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참 자유함이 없고, 산 희망을 가지지 못하여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영혼이 없던 성전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정치 지도자들, 탐욕에 물들어 있던 부자들로 인해서 지쳐있었던 병든 사람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하시고 외치셨습니다.
22. 그런 무기력과 절망 그리고 고통 속에 사람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좁은 문을 통하여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을 따라와야 참 삶이고 희망이 있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우리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생명, 인간이 만들 수 없고 줄 수 없는 생명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3.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은 끝내는 죄인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처절한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십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24.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고백을 전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양들의 큰 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셨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시는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도 변함없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 귀한 은혜가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