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 9:15~23 행 26:1~23 요 9:1~11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다가 죄수의 신분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깁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유대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 즉 메시야를 이미 보내 주셨음을 증언합니다.
지금의 바울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르는 증인으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겠다.”(행26:16~18)
예수께서 바울을 부르신 목적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갑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언제 출발하고 언제 머물러야 하는지 모릅니다.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이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왜 자주자주 옮겨 가는지, 또는 오랜 날들 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구름의 움직임을 여호와의 명령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진하고 머물러 진을 치기를 반복합니다.
오늘 주신 신명기서의 짧은 본문에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라는 문장이 7번 반복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라고 할 때의 ‘따라(על-פי)’는 ‘앞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19절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라는 문장에서 ‘지키다(שמר)’가 가지는 의미는 보호, 관찰, 주의, 책임, 감시, 보관, 축하, 자제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이 보호하시며 당신의 책임 안에 두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세와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머물고 진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인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보통의 유대인들, 그리고 역시 유대인인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을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볼 수 없는 육체적인 맹인과,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태어나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세상의 구원주로 오신 목적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처음 눈을 뜨고 사물을 알아보게 된 사람은 변화된 자신의 현재를 깨닫습니다.
바울은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세계를 전달할 사명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내신 예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면 하늘의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십자가를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빛의 세계에서 눈을 뜬 사람은 이전과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평시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하셨듯이,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의 눈이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면서부터 볼 수 없는 이를 고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육체의 눈을 뜬 사람이 누리게 하셨듯이, 우리는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참된 빛이십니다. 참된 빛의 세계에서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집중합니다. 자기에게 집중한다는 것이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으로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죄로부터 멀어지는 데에 마음을 모읍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죄를 찾고 정죄하는 일은 멈춥니다. 구원의 세계를 향해 있는 빛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아가거나 머물기를 반복하며 오직 진리의 빛에 따라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을 따라 자기의 관심과 삶의 목적을 일치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사명을 밝히실 때에 말로만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고는 허리를 굽혀 진흙을 집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실로암의 의미는 성경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보냄을 받았다’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를 통해 온전한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고,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예수께서 빛이신 것을 드러내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나면서부터 볼 수 없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어두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웃들에게 ‘죄인’이라고, ‘부정한 자’라고 모욕적인 언사를 듣던 세상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를 만나 평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어둠과 사탄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빛과 평화의 세계에서 거듭났습니다.
나면서부터 어둠속에 갇혀 있던 맹인이 밝은 빛의 길을 걷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종이며 증인으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한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순종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둠의 세상에 비추신 참된 빛이시며 구원을 이루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는 빛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로 이루시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구의 죄인가?”에 관심하기보다는 ‘어떻게 부활의 빛을 따라 걸을까’ 하는 것과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어떻게 부활과 구원의 진리를 보여줄 수 있을지’에 관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