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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4-1) - " 우리가 죄인입니다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3-03-17 (금) 07:52 11개월전 176  

본문) 사 59:1-3,9-20; 딤전 1:12-17; 요 19:1-16



1. 실마리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직접 영상을 통해 보면서 정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시리즈 모두가 충격적이지만, 압권은 역시 JMS 관련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천지부터 통일교까지>1) 란 책에서 허호익 교수는, 정명석이 통일교에서 활동하다가 1975년 문선명의 사명이 끝나고 자신의 사명이 시작됐다고 공언하며 현재의 이른바 ‘기독교복음선교회’를 조직해서 활동했음을 확인합니다. 정명석의 주요교리들, 특히 다음에 소개하는 타락론에서 통일교 <원리강론>에 나오는 피가름 교리를 모방한 흔적을 찾아냅니다.


“하와는 아담과 성행위를 함으로써(육적 타락: 하와가 타락 후 아담과 부부관계를 맺음으로) 사단의 피를 전했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선의 혈통을 번식시키지 못하고 사단의 악의 혈통을 번식시켰다. 인간의 더러운 피를 깨끗이 하는 데는 피가름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영혼만 구원하셨기에 육신을 구원할 재림주가 다시 오신다.” 문선명이 재림주의 자리를 차지하며 통일교 집단도 초창기 이런 ‘피가름’ 교리를 바탕으로 이른바 이화여대 혼음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교수와 강사 4명이 파면되고, 재학생 14명이 퇴학 처분되었으며, 문선명은 구속되었습니다. 이런 연속선상에서 보면 정명석 성범죄는 교리적 뿌리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통일교, JMS, 신천지 등 사교 집단에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또는 ‘재림주’를 ‘분명하게 보이는’ 그들이 일컫는 ‘선생님’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문선명, 정명석, 이만희 등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추종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며, 성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착취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기야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막말을 해도 ‘목사님’이라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2. 금육재


 

오늘 말씀 제목을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정했습니다. 주어진 본문 이사야 59장의 내용을 따온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이 제목에서 마음속으로 어떤 내용을 떠올리시는가요? 십계명의 어떤 조항을 어긴 것들이 생각나는가요?


앞서 이단 사이비들에서 보이는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구체적으로 죄다’라며 보이는 죄를 언급하는 일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수없이 등장합니다. 특히 죄를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시켜 목록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금육재’(禁肉齋)라고 해서 모든 금요일 고기와 고기국을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또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는 ‘금식재’(禁食齋)라고 해서 아침은 먹지 않고 낮 한끼는 충분히 먹은 다음, 저녁은 요기 정도만 하도록 했습니다. 성장기 어린이나 노인은 예외였습니다만, 이를 어기면 하나님 앞에 잘못으로 여겼습니다. 1962년부터 65년까지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이런 규정이 자발적 권장 사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그런데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대부분 숙련된 기술도 없는 가난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싼 임금을 받으며 시끄럽고 냄새나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하루 14~16시간씩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현실은 대부분 교회에서 또 신자들에게 하나님 앞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 앞에 떳떳한 일입니까? 하기야 주 69시간 근무제를 제기한 정부도 있습니다. 하루 11.5시간씩 6일을 근무하면 69시간입니다. 그래도 ‘주 120시간’에서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근거로 깔뱅(Jean Cauvin Calvin, 1509-1564)이 자본주의의 원조(元祖)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는 물질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이자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공동의 부를 혼자서 독차지하거나 가로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갈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가로채고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이 세상에서 빈곤을 일으키는 잘못된 법과 구조를 그대로 두거나 방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잘못된 사회구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2)


 

감리교회의 출범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도 1760년, ‘돈의 사용’이라는 설교에서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라.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희생해 돈을 벌어서는 안되며, 우리의 건강을 희생해 돈을 벌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3)


나아가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교회가 어떤 문제제기를 했던가요? 금육재를 어기는 일과 노예제도와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일, 어느 쪽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일까요?


 

3. 낙태반대, 동성애반대


 

또 하나의 예입니다. 얼마 전부터는 한국 교회들 상당수가 온통 동성애 반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심지어 예장통합 대전노회에서는 <동성애는 죄인가>4) 란 책을 썼다고 은퇴교수를 목사직 제명까지 했습니다.


그전에는 미국에서 극렬한 ‘낙태반대운동’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지만 이른바 생명권(pro-life)과 선택권(pro-choice) 논쟁 과정에서, 낙태반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 선 전직 목사 폴 힐(Paul Hill, 1954-2003)이 1994년에 낙태 시술을 했다며 단총으로 의사와 경호원을 살해하였다가 2003년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5) 그리고 낙태반대는 공화당 지지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이를 본 따서일까요? 통일교는 “우리는 혼전순결운동이다”라며며, 자기네 대학교에 순결학과까지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태아나 임부의 생명은 모두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어나기 전의 생명들에 대해서는 그처럼 민감했지만, 태어난 후의 생명들이 전쟁들로, 그것도 명분없는, 또는 거짓으로 명분을 만들어내어 엄청난 규모의 목숨이 희생되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졌지만,6) 낙태반대운동에 목소리를 높였던 미국 교회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었을까요? 동성애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이중잣대입니다.


 

4. 히잡, 흰옷, 주초


  

2012년 10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반부패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7) 한국에서 “당신 왜 부패했냐?” 하면, “너 빨갱이지?”하는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는 소개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발표 마친 후 한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똑같다. 파키스탄에서는 ‘당신 왜 부패했냐?’ 하면 ‘너 왜 흰 옷을 입지 않았냐?’라고 응수한다”라고 말입니다. 이란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지만,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사형에 처하는 행위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술이나 담배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한국교회가 가톨릭에서 문제되던 금육재나 금식재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주초문제에 대해서는 가톨릭은 대범하고 한국 개신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앞에 죄입니까?


 

5. 죄의 사회적 차원


 

교인들 상당수는 마치 형법의 조항을 어기는 범죄가 교회에서 말하는 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으니 우리도 그 원죄를 타고났다고 교리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떳떳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죄는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이 있습니다. 오늘 제3이사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깨우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이렇게 죄를 자백합니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사 59:9)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사 59:12-15) 여기 나오는 공평, 공의, 성실, 정직... 이런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이 유대교 제의나 정결 규정의 위배들보다 더 결정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히틀러 시대 독일 고백교회의 순교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그의 <윤리학>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8) : ”공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사적인 덕망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런 사람은 도둑질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하지 않는다. 그는 간통하지 않는다. 그는 능력의 한계 안에서 선을 행한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정확히 허용된 범위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에 대해 보지 않고 듣지 않아야만 한다. 세상에서의 책임적 행동으로 혹여 동티나지 않도록 자신의 사적 생활을 보호할 수 있으려면, 자기 기만이라는 대가를 치를 때에만 가능하다.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가 하지 않은 것이 그에게 평화를 주지 못할 것이다. 이 (내적) 불안이 그를 파멸시키거나, 아니면 그는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지만, 대중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9:1-16) 재판은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하지만, 이를 포기한 것 또한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조를 통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예’ 해야 할 때 ‘예’ 하지 못하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아니오’ 하지 못합니다.


앞서 언급한 노예제도와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일도, 전쟁들로 엄청난 규모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부패나 거짓 선전선동도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면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다음 세대를 민주시민으로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일도 우리가 죄인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후세가 누려야 할 자연을 훼손하고 기후위기를 고조시키는 행위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6. 책임의 크기와 죄


 

이처럼 책임의 범위와 그 크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서 25장,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이런 책임의 크기에 비추어, 이미 우리가 행했고 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크기를 계산해 봅시다. 그러면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무한대 분의 몇, 그래서 제로에 불과할 뿐이라는 한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딤전 1:15에서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칭합니다. 비단 그가 예전에 믿는 사람들의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롬 7:18-24에서 그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책임의 크기와 이에 비교한 우리의 실천의 보잘것없음, 여기에서부터 ‘원죄’ 개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지향과 자세,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무한대의 이웃사랑의 책임에 비해 찔끔 실천하고 그저 마음뿐인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7. 매듭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평, 공의, 성실, 정직을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와 지금 세계의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주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거듭나는 사순절기가 되도록 기도하며 행진해 나갑시다.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부활의 승리라는 희망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허호익 외, 신천지부터 통일교까지 (서울, 동연, 2021).


2)  고영근, “칼뱅은 과연 자본주의의 원조인가”, (뉴스앤조이, 2013.06.21.) 참고.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487.


3)  http://www.cbooknews.com/?c=78/88&p=5&uid=3386.


4)  허호익, 동성애는 죄인가: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성찰 (서울, 동연, 2019).


5)  https://en.wikipedia.org/wiki/Paul_Jennings_Hill.


6)  https://namu.wiki/w/베트남%20전쟁/미군 


7)  https://tribune.com.pk/story/454859/promotions-not-prison-‘people-themselves-must-be-the-watchdogs’.


8)  Dietrich Bonhoeffer, Ethics (New York: Macmillan, 1964),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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