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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3-2) - " 십자가의 길 -자유의 길 " / 청년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3-03-09 (목) 07:59 1년전 220  

본문) 사 60:9~14; 빌 3:17~4:1; 요 18:28~40


“자유인으로 사십시오!”(이는 주일예배 파송사 첫마디입니다.) 예배가 끝난 줄 알고 놀라셨죠.

“자유인으로 사십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예배시간에 졸았어도 해방감을 느끼며 한 주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든 각박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유인으로, 자유롭게 사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또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으로 느낀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는데, 삶의 조건상 이런 저런 사슬에 얽매여서 자유롭게 살 수 없는데 자유인으로 살라고 하니 듣기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있어서 전에는 “당당하십시오.”라는 문구를 썼었는데, 지금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당당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산다는 말은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은 적어도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자유는 사람의 권리(인권), 생명의 권리(생명권) 중에서 중요합니다. 신체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거주와 이전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헌법에도 명시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권력으로부터 사람들의 자유가 끊임없이 억압받았고, 그렇게 억압된 자유를 확장시키면서 국민이, 사람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결과가 우리 가운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자유가 억압받거나 제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큰 틀에서 강요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는 때때로 억압당합니다. 생존과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있는 직장이나 학교로부터 우리의 자유는 제한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종교나 교회, 가정을 위해서 우리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희생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자유의지, free will, liberum arbitrium voluntatis)는 일반적으로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합니다. “나에게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말해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자유의지가 있다.” 종교인들도 말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자유의지인데, 빈 대학 교수이자 진화생물학자인 프란츠 부케티츠는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라는 책에서 “자유의지란 진화 과정을 통해 생성된 환상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는 환상이 있을 뿐이다.”라고 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자유가 꼭 필요한데, 현실 속에서 그 자유는 여러 가지 이유로 보장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유가 억압되었다고 느낄 때에 자유를 향한 투쟁을 합니다. 많은 영화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 잘 곳이 마련되어 있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영화들 속에서 아마 자신이 느끼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탈출을 시도하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미제라블”이나 “변호인”이나 “기생충”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 종교라는 제도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속박하고 왜곡시키는 일체의 강제적인 권위와 제도는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제압하고 소수 정치인들의 이기적 권력집중화의 투쟁장소가 되어버린 정치, 경제적 불평등의 온상이 되어버린 현존하는 경제제도, 또한 성직자와 교리가 중심이 되어버려서 그 종교의 본래적 의미와 이상을 상실한 무수한 제도화된 종교들은 관습과 도덕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위선과 억압의 삶을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유롭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억압당하지 않는 자유인입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출애굽과 광야생활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에 관한 고전적인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고자 했습니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집트로부터, 바로 왕으로부터, 종살이의 강제노동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플 때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면서, 자기들에게 자유를 준 모세에게 불평하고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몸은 자유를 얻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노예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유로부터 도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늘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어쩌다 한가로운 시간을 얻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해방과 평등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살기 위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훈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구원은 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 5: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롬 8:21) 하느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도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누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유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양면성입니다. 미국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억압받던 노예에게 쇠사슬을 풀어 헤친 해방의 상징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이민자에게는 차별과 편견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여성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하는 증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흑인들의 인신적인 구속으로 얻어진 백인의 자유를 의미하였고, 유색 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함으로써 앵글로–색슨 민족의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교만함으로도 비춰졌습니다. 또한 인류 절반의 여성들의 희생 위에 얻어진 남성들만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화적 의미와 사회의 억압과 불평등한 현실 사이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현실 사이의 양면성을 띠고 이중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언제까지 이중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인생이라고 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자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둘은 일치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의 개념과 의미에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가 목적(--로부터의 자유)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향한 자유)이라면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그 결과를 부족하지만 누리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만일 (그럴 때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가 완성되어 정치적 자유가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관습이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부터의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러한 자유는 우리의 삶에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1861년 남북전쟁으로 아메리카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을 때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나의 최대 목적은 유니온을 살리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유지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아도 유니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 하겠다. 더러는 해방시키고 더러는 그대로 두어 유니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 하겠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흑인종과 백인종의 사회적·정치적 동등권을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마음도 없고 찬성한 일도 없으며, 흑인에게 투표권이나 배심원이 될 자격을 준다거나 그들에게 공직을 맡게 한다든가, 백인과 결혼하게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마음도 없고 찬성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흑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차이점은 너무나 커서 두 인종이 사회적·정치적 동등권을 유지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인종이 함께 살 수 없지만, 함께 살아야 할 경우라면 반드시 지위의 우열이 구분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백인종에게 부여된 우월권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감한다.” (James Cone, “흑인신학과 흑인의 힘”)


“--로부터의 자유”를 넘어서 “--을 향한 자유”라면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유혹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 나라의 일군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노예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고전 7:22)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벧전 2:16) 요한복음 8:32은 자유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서구절입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31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28-29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잡히고, 묶이고, 가시관과 채찍으로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의 끝에서 예수님은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자유의 길입니다. 비록 잡히고 고난과 죽임을 당했지만, 그 길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길이었기 때문에 자유의 길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분명히 그 곳에서 잡히고 죽임달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한 나라와 진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추구할 희망입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광야로 이끄시고, 아시리아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의미였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에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시민권을 둔 사람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기꺼이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 우리는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로부터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따를 때에 ‘--을 향한 자유’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하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십자가의 고통의 길을 가야하는 일일지라도 모든 사람들과 온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을 가시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으로 사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기꺼이 참여하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유인으로 삽시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김남주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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