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사순절(6-1) - " 생명의 싹을 틔워라! " / 종려주일 / 씨뿌림주일 / 최형규 목사 > 사순절

본문 바로가기

사순절 HOME > 설교올리기 > 사순절

[둘째해] 사순절(6-1) - " 생명의 싹을 틔워라! " / 종려주일 / 씨뿌림주일 / 최형규 목사

관리자 2022-04-08 (금) 15:25 2년전 352  

본문) 9:9-12, 2:1-11, 12:12-19


(1) 오늘은 교단 총회가 정한 씨뿌림주일입니다. 농촌 지역에서 씨앗을 뿌림으로 한 해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신앙 안에서 격려하고 축복하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농사라는 한 직업의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을 살리고, 짐승들을 살리는 양식을 풍성히 거두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고백하는 예식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농촌교회이든 도시교회이든 씨뿌림주일은 생명의 소중함과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하는 먹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농토에서 농부의 손길을 통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씨뿌림주일이 사순절 절기, 그 중에서도 종려주일과 거의 맞물려 오기 때문에 절기적인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흠없고 죄없는 생명을 바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사순절이고, 고난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세상 모든 영혼들을 살리시려 오신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과 능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오늘 복음서 본문(12:12-19)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각지에서 찾아온 큰 무리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이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습니다.


(3) 복음서의 기록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에 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움, 부활이 인류를 죄와 사망가운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4) 오늘 본문 요12:15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선지자의 말씀은 스가랴 9:9-12의 내용으로, 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9:9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표현입니다. 그들이 포로생활 중에도 기뻐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이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징표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5) 나귀는 당대에 노새와 말과 함께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나르는 주요 교통수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종류별로 용도와 신분의 차이가 있었는데, 말은 빠르고 멀리 가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가파른 산길이나 짐을 싣고 나르기에는 나귀나 노새가 훨씬 유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노새는 왕족이 주로 이용하는 수단이었고, 나귀는 평민이 타는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 살리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겸손과 공의의 왕의 면모를 나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6) 여기서 겸손하다는 것은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능하지도 무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셨고, 행해야 할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가지의 말씀중 여섯 번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하나님으로서 갖으신 권세와 권한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을 인용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2:6-8)


(7) 하나님께서 오늘 서신서 본문의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2:5)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에 대해 참회하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죄 자체를 없이 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죄의 대가를 지불할 능력과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흠과 죄가 없으시지만,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고,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수 있습니다. 이 구원 사역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주시기까지 낮아지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한 겸손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8:38에서 죽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겸손은 구체적으로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김으로 드러납니다. (2:3)

우리 사회는 경쟁심이나 허영심으로 남보다 자기를 더 높이려고 합니다. 특히 소유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더더욱 경쟁이나 속임수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더 높아지려고 안달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가치가 더 높아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경쟁이나 허영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의 존재 자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2:4)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을 얻는 이들이 있고, 때로는 적극적인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이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백성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돌봄을 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매년 416일이 되면,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보는 가운데 300명 가까운 학생과 성인들이 수장되어야만 했던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족들과 구조관련 후유증을 앓는 이들도 있습니다. 419혁명과 관련하여 여전히 아픔을 간직한 이들과 있고,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일상을 빼앗기거나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잃고 힘들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의 평안과 능력도 하나님께 구하되, 내 주위와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아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이 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감당하신 대속의 십자가 죽음과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예수 제자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는 결단의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