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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2) - " 사랑이 이긴다 : 애덤 스미스는 틀렸다! " / 제주 4.3기념주일 / 최병학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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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5-2) - " 사랑이 이긴다 : 애덤 스미스는 틀렸다! " / 제주 4.3기념주일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2-04-01 (금) 09:47 2년전 376  

본문) 신 6:1-15 요일 3:11-24 요 13:31-35


1. 무나니스트와 죄수의 딜레마


‘무나니스트(‘무난하다’와 ‘~ist’의 합성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가지도, 동시에 뒤처지지도 않는 무난함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 대학생들의 삶의 목표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경쟁을 거쳐 살아 왔고, 마침내 대학에 들어와서도 또 취업 때문에 경쟁해야 되는 그러한 삶 속에서 단지 평범하게 노력해 평범한 삶을 살다 평범하게 죽는 것이 꿈이 된 것입니다. 군에서 “딱, 중간만 하라!”는 말의 레트로(retro, 재유행)입니다. 


X세대(1965∼1980년생)에 속하는 저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 ‘다름’을 추구했었습니다. 다름은 타인보다 뛰어난 우수성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했고,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X세대의 자녀세대인 요즘 MZ세대는 노력해서 얻은 ‘다름’으로 우수해져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뒤처지면 안돼, 튀면 안돼, 애써도 안돼!”를 몸으로 경험했기에, 관계에 있어서도 믿음과 사랑이 없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고슴도치증후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시로 인해 서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왜 협력과 배려가 아니라, 경쟁과 이기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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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나니스트로 자라는 요즘 세대>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통용되는 말 가운데, “경쟁시장에서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사회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만들 수 있다.”라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죠?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물건의 가격과 품질은 적절하게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00년간 경제학의 진리로 통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영화 <뷰티플 마인드>(2001)의 주인공인 천재수학자 존 내쉬(1928-2015)가 등장하면서 이 이론은 무너집니다. 내쉬는 ‘비협력 게임(Non-cooperative Games)’이라는 박사 논문(이 논문으로 수학자가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됩니다만)을 통해 스미스를 반박합니다. 


영화에서는 존 내쉬(러셀 크로우 분)가 파티에서 친구들과 한 예쁜 여학생을 지켜보다가 이 이론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내쉬의 말에 의하면, 여러 명의 남자가 각자가 원하는 대로 가장 예쁜 한 명의 여성에게 대쉬하여 경쟁하는 것보다, 골고루 다른 여성에게로 가는 것이 전체에 만족을 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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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쉬(러셀 크로우 분)


아무튼 내쉬가 구축한 비협력 게임이론은 ‘죄수의 딜레마’ 모형을 기본으로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의리냐, 배신이냐’의 문제인데, 죄수 2명이 서로를 믿고 끝까지 입을 다물면 모두 징역 6개월을 살게 되지만, 한 사람은 배신하고 다른 한 사람이 입을 다물면 배신한 사람은 석방되고 의리를 지킨 사람은 10년을 살게 되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둘 다 배신해도 10년을 살게 됩니다.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무엇이 두 사람에게 최선의 방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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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


애덤 스미스의 이론대로라면 두 사람 모두 자기 이익의 극단인 배신을 하면 이익이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두 사람 모두에게 손실로 나타난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내쉬는 “애덤 스미스가 틀렸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결국 배신의 게임을 유발하고, 배신의 게임은 사회의 총 효용을 높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게임을 한 번해보면 두 사람 모두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고 입을 닫았다면(협력을 선택했다면) 6개월 형만 받았을 텐테,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해서 10년형을 받았을까?’라는 후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협력을 선택했을 때, 나는 여전히 배신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자, 그럼 이러한 딜레마를 조금 더 진행해 볼까요? 컴퓨터로 ‘죄수의 딜레마 대회’를 열어 봅시다. 


실제로 1980년에 미시간 대학 정치학과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가 이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경제학자, 수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등 각 분야 게임이론 전문가들이 14개의 전략을 가지고 참여했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팃포탯(Tit-for-Tat) 전략을 구사한 팀이 승리했습니다. 그럼 팃포탯 전략이란 무엇인가요? 영어로 ‘tit’은 ‘가볍게 툭 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tat’ 역시 비슷한 의미로, ‘가볍게 때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팃포탯 전략은 ‘상대가 먼저 툭 치면 나도 맞받아서 툭 친다’는 전략입니다. 그리고 이 전략의 핵심은 네 가지 입니다.  


“1. 나의 출발은 언제나 협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나는 첫판 때 무조건 협력(범죄 사실을 묻지 않는다)으로 시작한다.

2. 상대가 이전 판에서 나를 배신했다면, 나는 다음 판에서 반드시 배신으로 보복한다. 첫 판에서 나는 협동을 선택했는데 상대가 배신을 택해 이익을 누렸다면, 두 번째 판에서 나는 반드시 배신을 선택함으로써 상대를 응징한다. 

3. 상대가 이전 판에 협동을 선택했다면, 나는 반드시 다음 판에서 협동으로 보상한다. 팃포탯 전략은 과거를 묻는 감정적인 전략이 아니다. 과거에 상대가 99판을 배신했더라도 직전 판에서 협동을 선택하면 나도 다음 판에서 반드시 협력을 택한다. 

4. 태가 팃포탯 전략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이 전략은 상대에게 배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협력을 선호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의 인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당신이 배신하면 나도 배신으로 응징한다. 대신 당신이 협력하면 나도 반드시 협력으로 보상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상대는 결국 배신보다 협력이 자기에게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학과 경제학, 그리고 게임이론으로 설명했지만, 결국 이것은 사랑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2.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신약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요 14-16장)’의 서론 부분(요 13:31-35)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특수 본문이 고별설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 5-7장)’와 더불어 2대 설교가 고별설교입니다. 구약 말씀 신명기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준 고별 설교입니다. 아무튼 요한복음의 고별설교는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이 고별설교를 가리켜 신학자들은 ‘복음서 신학적 정점’, ‘혹은 복음서 신학의 핵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종교 문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읽다보면 변화무쌍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세족식, 13:1-20) 겸손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고별 설교 앞과 뒷 부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까? 주님을 배신하려는 가룟 유다의 계획이 진행되고(21-30), 닭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베드로의 부인(36-38)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배신과 부인 사이에 고별 설교 서론이 위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별설교 서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새 계명’입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유다가 배신하려고 나간 뒤에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요 13:31-32)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영광’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수난 부분과 영광 부분이 부활 전후로 나누어집니다. 십자가 수난 이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수난 받는 사람의 아들(인자)’과 ‘영광 받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결합함으로 수난과 영광이라는 두 개의 경험을 하나로 결합함으로. 곧 수난과 영광을 결합함으로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현재의 고난이 미래의 영광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영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요 13:33)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걸까요?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닥쳐올 고난의 상황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 곧 메시야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의 기간을 살아가는 고난 받는 메시야적 교회 공동체의 상황(이것은 유다와 베드로 같은 배신과 부인이 난무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만) 속에서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생활 지침을 사랑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서신서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사랑하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3-24) 


먼저, 사랑이 믿음에 근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믿음은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삶,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요일 3:11-12)


무슨 말씀입니까? 악한 자에게 속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악하면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볼까요?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3-15)


이제 역으로 미움 받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미움 받는다고 같이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눅 6:27)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그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망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요일 3:16)”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이러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해 줍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 17-20)


그리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그런데 만약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도 질투하신다고 구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본문 말씀을 볼까요?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신 6:12-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시어 복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을 베푸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사 멸절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신 6:1-3) 


나아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그렇게 되면, 땅의 축복, 아름다운 물건과 집의 축복, 목 마르지 아니하는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나무의 열매를 통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신 6:10-11) 


다시 게임이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배신하면 나도 배신으로 응징한다. 대신 당신이 협력하면 나도 반드시 협력으로 보상한다.”라는 팃포탯 전략은 배신보다 협력이 유리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나니스트로 무난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또 시기와 질투로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귀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주 4.3 기념주일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입니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54년까지 7년 여에 걸쳐 당시 도민 인구의 11% 가량에 해당하는 2만5000~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같은 민족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제주 4.3사건은 군사정권 동안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며 금기시되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부의 공식 사과와  희생자 보상이 이뤄졌지만, 제주는 아직도 그 고통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덤 스미스는 틀렸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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