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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4-1) - " 세상을 이겼다? " / 청년주일, 총회순교자기념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1-03-09 (화) 09:32 3년전 705  

본문) 사 63:1-6, 롬 8:18-27, 요 16:25-33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네 민중들의 생사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저 세상에서도 계속 연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삶의 계속을 추구하는 것이겠죠. 그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때로는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구원의 대상임과 동시에 심판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6)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12:47)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9:39)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12:31) 

예수님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을 위한 빛이고,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보낸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두움과 거짓에 쌓여 있는 세상과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한 자로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고 애씁니다(18:9). 예수님에게 악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창조물이며, 사랑과 구원의 대상입니다. 세상이 하느님에 반항하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요한복음 13:31-16:33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행한 고별연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기가 떠나간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연설은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데, 예수님은 기쁨과 평화를 약속하면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 속에서 너희는 근심에 잠겨 있지만,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20절). 또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지만 용기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3절). 이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에서 세상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적대적입니다. 따라서 오늘 날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좋은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별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과 그 주변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만 그러한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나 세상은 오히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교회에서만 인위적으로 억지로 구분하고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세상을 이긴다고 하면서 자기의 교리나 논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세상으로 몰아붙이면서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적대시 했던 그 세상 속에는 공산주의(빨갱이), 이단, 뉴에이지, 정치적 경쟁자, 심지어 우리의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은 누구 혹은 무엇이며, 이긴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입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깁니까? 예수님은 로마 권력과 유대의 성전 지배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아버지께로 감’(13:1; 17:13), ‘십자가에 올리움’(12:32), ‘영광을 받는’(17:1-26) 사건으로 진술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죄’가 드러나고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일로 증언합니다(16:8-11).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했는데, 도리어 세상이 죄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이 자신들의 고집과 거짓된 교설로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그토록 보려고 추구했던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자신을 보는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실패이며,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의나 신의 이름으로 불의한 자를 심판하고 죽입니다. 이사야 63장에서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는 것처럼 세상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겨 준 온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저주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10:11-16).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길을 거부하는 세상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어두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8:9). 

불의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수없이 자신을 배반하고 거역했던 이스라엘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하느님의 사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고, 참 평화를 주기 위해 일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에 의해 로마에 밀고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이며 패배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을 이긴 자’라고 증언합니다(16:3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가지면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박해와 시련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고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심판하며, 세상을 이긴 승리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믿게 된 사람들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쫓아다닌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따름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을 뜻합니다(13:36-38; 21:19). 그러나 바로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그 길이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며, 모든 사람을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승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고 했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으로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따르며, 사랑의 행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참 평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3:16; 20:31).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뿐 아니라 당시 유대 지역과 실질적으로 분단되었던 갈릴리 사마리아에서 활동했으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세례요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요 2:22; 4:39-42,53; 9:35-39; 12:11,19,20-23). 이 점에서 유대주의자들이 편협한 교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출교시킨 것과 달리, 예수님의 승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을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러한 하나됨의 시작이고 근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예수님은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는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21절). 해산의 고통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인이 해산을 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았을 때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나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은 것은 단순한 열매를 거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이는 결과물로써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오히려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지만 그 아이를 비로소 사람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희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양육하고 자라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해산한 여인의 기쁨이며 평화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고 견디면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수많은 요인들을 이기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진통을 참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덜 쓰고 덜 입어야 합니다. 더 크고 넓게는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시간을 아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본문에서 피조물들이 세상을 구원할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19절).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때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라고 표현하듯이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은 ‘목을 뽑아 바라보다’는 뜻으로 학수고대(鶴首苦待; 학의 머리처럼 길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기다리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연히 희랍어의 άποκαραδοκία도 머리(καρα)와 주시하다(δοκεύω)로 된 합성어로서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잘못된 종교, 거짓 사상”에 굴복하여 신음하고 있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얻은 것처럼 소망으로도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 소망은 미래적인 것에 대한 기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과거에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시간적 역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인하여 믿음의 현실성이나 실천력이 약화되고 믿음이 단지 심리적 변화나 의존적 지향을 뜻하는 것처럼 오해된 데 대하여 믿음의 온전한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랄 때에, 자녀들에 대한 꿈이나 자기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그 바람이나 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꿈의 목적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된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선이어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과 하느님의 뜻을 나누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소원의 성취는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현실을 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이유-근거는 우리 모두가 협력하여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간절히 바랄 때에 오늘도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며 탄식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사람만의 구원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이 정당한 생명권을 누리며 살게 되는 해방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마음의 탄식과 몸의 간구가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기면서도 구원해야 하는 세상은 누구 혹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 세상은 교회 밖의 세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나 생각(철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이 교회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요? 과연 교회에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를 두고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고 합당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고려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도 그 세상에 속해 있고 바로 그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예수님에 의해서 극복되어지고 포용되어야 하는 세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아서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기 위해 온 예수님은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며 세상이 만들어 놓은 거짓 이데올로기와 법과 교리를 깨뜨리며 그 자신의 평화를 세상에 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처럼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내어 쫓거나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하느님을 알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온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만든 율법과 교리와 진리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과 예수님이 보여준 것처럼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지역의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율법도 알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으로 부각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예수님이 자신의 온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립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랑의 행위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차별의 벽을 깨뜨리고 하나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된 유대교의 율법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규를 깨뜨리며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의 대상이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와 기쁨을 위해서 극복하고 이겨야 할 대상 중에서 가장 큰 대상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예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33절). 그런데 우리는 내 안에서의 평화, 나만의 평화를 더 추구합니다. 예수 안에서의 평화와 나만의 평화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평화는 나뿐만 아니라 남의 평화도 함께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을 이기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이루면서 누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이기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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