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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1) - "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 " / 김은승 목사 (종려주일)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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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6-1) - "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 " / 김은승 목사 (종려주일)

관리자 2020-04-01 (수) 11:18 4년전 1192  

본문) 삼하 7:1-17, 19:11-16, 19:17-22

 

종려주일이 되면 감정이 미묘해집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했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예수님을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처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다가도 곧장 이어지게 될 고난주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종려 가지를 흔들며 맞이했던 군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야속한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저 군중들처럼 쉽게 예수님을 저버리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할 말을 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등돌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배신했던 이들을 다시 찾아와 주시고 불러주신 것을 생각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이 아침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갖가지 삶의 정황 속에서 만났던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해 주신 것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전능하신 분’‘파수꾼’‘왕들의 왕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면 입을 닫습니다. 모른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몸에 새긴 이름이 있는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만났던 하나님도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모른다고 우리 입술의 고백마저 닫힐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패를 붙였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요구하기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달라 했습니다. 원문으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써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만큼 치욕스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는이라는 말을 붙여 넣게 한 것은 한 미친 사람의 궤변으로 만들려는 교묘한 술책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도 달리 표현하자면 이미 쓴 내용은 써버린 것이다. 그러니 변개할 수 없다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쓴 그 내용은 내가 쓴 것이다하는 말로 이해하면 글의 내용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주장하는 말이 됩니다. 결국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개인의 자기 주장이 아니라 대 로마제국의 총독의 입으로 고백된 선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빌라도에게는 사악한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굳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하면서 온 유대인들을 향해 더 이상 너희 왕은 없어! 하고 선언하려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하면 하나님 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이라는 말 한 마디를 의미 있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 예수님이 온 유대 백성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대인들의 이해가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어린 양으로서의 메시아에게까지 미쳤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더라도 유대인들은 후일 십자가에 달린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떠올리면서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군중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만 해도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관원들에게 잡히고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자마자 사람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정의의 칼을 빼어 들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입술을 빌어 죽임 당하는 유대인의 왕을 선포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일을 가리켜 하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요한계시록 3:12]. 하나님의 새 이름을 여러분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이 이름을 찾는 믿음의 여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이름으로 고백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위로라고도 합니다. 고통스러울 때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던 주님은 위로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낙심했을 때 용기를 주셨던 주님은 소망이라는 이름이 알맞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제각기 예수님의 이름을 더해갑니다. 그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을 완성해 갑니다. 그 가운데 다윗을 축복해 주신 하나님은 스스로를 만군의 주라 칭하시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과 자비의 하나님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정의와 자비는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그랬겠지요. 그런데 아이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아이니까요. 그런데 이 때에 부모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벌을 줄 것인지, 아니면 용서해줄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부모가 되든지 자비로운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개념은 이런 선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을 매로 때리듯이 다윗을 징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에 대한 총애를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왕위가 영원히 튼튼히 서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회초리를 든 하나님은 분명 정의의 하나님이시지만 품에서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정의보다도 더 큰 자비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 백성을 한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훨씬 이전에 이미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이름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8:17)” 하셨는데, 간절한 마음은 이미 식어버렸습니다. 만남이 없으니 이름도 없습니다. 내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어서 실망하고 돌아섰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다른 길을 가는 주님을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교회에서마저 세속적 화려함을 추구하는 실태는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은 여전히 실패요, 좌절이요, 조롱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시킬 때입니다. 새 이름을 찾아 나설 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소리치게 하신다 했습니다. 빌라도와 같은 이방인의 입술로도 고백하게 하실 것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고, 또 주님을 만나서, 여러분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주님을 새 이름으로 노래하십시오.여러분의 삶이 복되고 평안할수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마다 이길 힘을 주시고, 인생을 부끄럽지 않게 해 주셨던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의 위를 영원토록 지켜주시겠다 하셨던 그 약속을 기억하시지요? 이제 여러분의 가정과 자손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모르지 않습니다. 세상도 더 이상 모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새 이름을 날마다 더해가는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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