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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4-1) - " 아무 죄 없는 자들의 죽음 " / 문홍근 목사

관리자 2020-03-20 (금) 14:35 4년전 1385  

본문) 59:1-3.9-20, 딤전 1:12-17, 19:1-16

 

1) 순교자주일

오늘은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 제101회 총회에서 제정한 순교자주일입니다. 20169월에 모인 총회는 사순절 넷째주일을 순교자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1978년 인도 방갈로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순교자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자산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 결의에 따라 우리 교단도 순교자들의 아름다운 신앙 유산을 이어받자는 취지로 사순절 넷째주일을 순교자주일로 정하고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순교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합니다. ‘적색순교’(red martyrdom)백색 순교’(white martyrdom) 그리고 녹색순교(green martyrdom)입니다. 적색순교는 스데반처럼 피를 흘리는 순교를 말합니다. 백색순교는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철저한 금욕주의를 지켜나가는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순교를 말합니다. 녹색순교는 전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은 스데반처럼 적색순교의 상황은 몇몇 특수한 선교 현장을 제외하고 그리 흔치 않습니다. 또 백색순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정리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직업과 가정을 가지고 사회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녹색순교의 길입니다.

녹색순교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맘몬이라는 거대한 가치관과 권세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순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적인 이 시대를 거슬러 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2) 죄 없는 자의 죽음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체포되신 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가야바의 집을 거쳐서 총독 빌라도의 관정에까지 끌려왔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같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풀어주려고 했습니다만 유대인들이 강하게 거부하여 예수님을 다시 총독의 관정으로 불러다가 채찍질을 했습니다. 총독의 부하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는 의미로 왕들이 입는 붉은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놀리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군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님에게 군병들이 침을 뱉고 꿇어 엎드려 절하며 희롱을 했다고 했습니다.(27:29-30, 15:19-20)

예수님은 이 수모를 다 겪으시며 끌려 다니셨습니다. 아무 항변도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당하기만 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얼마든지 조롱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 수 있었지만 그 수모를 다 참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들의 죄 용서와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자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썼지만 유대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라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는 빌라도를 향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이를 놓으면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하며 빌라도를 압박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오로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하기 원했고 그래서 가이사 곧 로마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날 저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저들에게 내 주었습니다.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는 정의가 없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라며 어처구니없는 발뺌을 합니다.(27:24)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서 소신 없는 권력자의 이중성을 봅니다. 권력을 손에 가진 자들은 양심과 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도록 판결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권려의 야합한 힘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아무 죄 없는 자의 죽음이었습니다.

 

3) 정의가 사라진 세상 - 이사야의 정의의 외침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 59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정의가 사라진 세상을 질타하는 메시지를 외칩니다.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59:3) 저들의 손에 힘없는 착한 사람들의 피가 묻어 있음을 책망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힌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정의란 바로 죄 없는 자가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으로 몰려 처벌 받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구약 본문 9절에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라고 외칩니다. 14절에서는 정의가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도다.”라고 합니다. 힘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정직한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강하게 설교하는 것은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일입니다.

순교자적 신앙을 갖고 불의한 힘을 가진 자들을 향해 대드는 것입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불의한 독재체제에 맞서서 권력자들의 잘못을 질타하는 설교를 할 때 감옥에 끌려갈 것을 각오하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과거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우다 감옥으로 끌려갔습니까? 고난을 각오하고 정의를 외치는 것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15절 이하에서 정의의 하나님이 보응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15, 18) 악에 맞서서 순교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강한 신앙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순교자들에게는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무서운 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4) 초대교회 순교자들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박해자였습니다. 스테반이 순교를 당할 때 그도 살기등등해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나중에 스테반의 순교에 대하여 증거하기도 합니다.(22:20) 변화된 바울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많은 복음의 일꾼들을 길렀습니다. 디모데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를 목회자로 만들고 그를 위해 많은 신앙적 권고들을 했습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과거 교회를 박해한 포악한 사람이었지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했다”(14)고 고백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에게 그런 귀한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고 고백하며 순교자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형을 받음으로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죄도 없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도 불의한 헤롯에 의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이후 초대교회에서도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음의 의인들이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 없이 순교를 당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주후 60년 나다바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상숭배자들에게 사지가 찢겨서 순교를 당해 죽었고, 누가는 그리스에서 제사장들에게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수없이 많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무 죄 없는 자들의 순교는 헛된 죽음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일으켜 세운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고 교회를 바로 세운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역사에 빛나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죄악과 타협하지 않고 의연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즐거워하라‘(5:12)고 말씀하십니다.

 

5) 맺음

우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적색순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도승이 되어 수도원으로 가는 백색순교도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세상을 따르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순교자들의 뒤를 따라 살아가는 녹색순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것이 순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면서 자기부인(自己否認)의 삶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올곧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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