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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3-1) - " 기독청년과 시민성 " / 청년주일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6-03-02 (월) 17:08 1시간전 2  

본문) 사 60:9-14; 빌 3:17-4:1; 요 18:28-40 



오늘은 사순절 셋째주일이며,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정한 청년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모여 예배드리는 이 공동체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깨우침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1. 빌립보서


교우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도 옥중서간을 썼습니다. 그가 로마에 1차 구금되어 있을 때인 주후 60년대 초반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서간, 옥중서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유럽 지역 중 처음으로 마게도냐 빌립보에 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고, 그 결과 자색 옷감 상인 루디아가 개종하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에 직접 가서 설교할 수 없었던 그는 대신에 이 옥중서신, 빌립보서를 썼던 것입니다.

 

2. 로마 시민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이른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라고 하는 수신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생활 속에서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테네의 “알지 못하는 신”을 소재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에서도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시민권 논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빌 3:20에 보면 신약 가운데 단 한 번 사용된 시민권이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스어로는 ‘폴리튜마’(πολίτευμα)인데, 이를 개역과 새번역에서는 ‘시민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 시민권 이야기를 사용했을까요?

빌립보는 원래는 인천의 십정동(十井洞)처럼 우물들이 많았던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 ‘샘들’이란 뜻의 크레니데스(Crenides)란 뜻의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마을이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 2세가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 도시를 건설해서 빌립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필리핀이란 나라 이름이 16세기 스페인 탐험가 루이 로페즈 데 빌라로보스(Ruy López de Villalobos)가 당시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다른 식민도시(colonia)들과 달리 이곳 주민들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주어졌고, 그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법률적으로는 재판받을 권리, 고문이나 채찍질 등 가혹행위의 금지, 황제에게 상소할 권리 등이 부여되며, 정치적으로 공무담임권, 경제적으로 재산권과 상업활동의 권리, 군인이 될 수 있는 특권이나 명예, 권위가 부여된 개념입니다. 인권, 현대 사회의 국민의 기본권의 바탕이 여기서부터 나온다고 하겠습니다.


3. 하늘의 시민


교우 여러분이 해외에 나갈 때 어느 나라 여권을 가지고 나가느냐 할 때에는 물론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할 것입니다. 행 22:28에 보면 이처럼 사도 바울 자신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적의 개념으로서 로마 시민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사실 하늘에 속한 사람들, 하늘 시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바입니다.


바로 이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우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위상과 과제에 대해 알려줍니다. 여러분은 이전까지 로마의 시민이라는 점에 엄청난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겠지만, 실은 하늘의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라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었을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라고 강조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특권이나 혜택을 접어두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나오신 그리스도의 겸비와 비움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카이사르가 주님”이라는 로마 제국의 공식 구호 대신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선포로 대치합니다. 힘으로 정복하고 승리하여 신격화하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하는 높은 자리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가 우리가 따르는 진정한 주님이라는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했고 어떤 여권을 가졌느냐, 무슨 권리나 위상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국적의 개념을 넘어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임을 깨달으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구입니다. 


4. 청년의 시민성


우리는 오늘을 청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청년세대의 시민성 결핍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려 한다거나, 표면적인 공정에 매몰되어 실질적인 공감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연대하는 삶을 배척하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고민이 터져 나옵니다. 


기성세대보다 오히려 더 기성화되어 버리고, 세상적인 탐욕에 젖어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벽을 세워 놓고 나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청년세대의 어려움, 벗어나기 힘든 질곡에 대해서 무관심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청년들의 가장 궁극적인 관심, 특히 기독청년들의 가장 본질적인 고민의 지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5. 본회퍼의 옥중서간


최근에 스무 명의 76학번들이 모여 50년 전 입학할 때를 기억하면서, 대학 시절 읽었던 책들을 소재로 <스무 살의 독서노트>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출판기념회도 열었습니다. 물론 여기 독서노트를 올린 사람들도 저 자신을 포함하여 정말 많은 혜택을 입고 살아온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젊었을 때의 고민을 잃지않고, 초지일관 한 평생 같은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또 하나의 공통점입니다. 


운 좋게 저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참된 신앙이란 개인적인 경건을 넘어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책임있는 실천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옥중서간-저항과 복종>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습니다: 노영민 외, 스무 살의 독서노트 (윤출판, 2026), pp. 220f.

 


“진정한 책임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죄악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아무리 심오한 도덕성을 견지하고 사적 덕행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주변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는 갖가지 독재나 부패, 차별과 혐오, 빈곤과 기아, 기후위기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이라면, 이는 무지와 위선일 뿐 진정한 도덕성이라 할 수 없다. 무지나 태만, 침묵 등은 바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체제에 대한 공모, 방조 또는 묵인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범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개인적 차원의 심오한 도덕성이나 신실한 경건만을 주장하는 것은 그냥 위선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민주주의나 정의를 파괴하는 구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나아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때라야 참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책임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본회퍼는 이런 생각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실천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삶을 살고자 했던 노동자의 벗 전태일 열사와 함께, 1980년 5.18 당시 한신대 학생이었던 류동운 열사를 소개했습니다. 


 광주가 집이었던 그는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글을 일기에 남기고 진압을 앞둔 전남도청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계엄군의 총탄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살해당했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단에서 2021년 류동운 열사를 순교자로 추서한 까닭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18장에 보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하늘나라의 시민은 땅에 속한 사람, 즉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용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실적이 아니라 그저 의도로서 심판해 주소서.”(A. 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 중)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의 바탕에 바로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겸비, 그리고 하늘나라에 속한 시민이라는 큰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6. 일어나 빛을 발하라


오늘 구약성서 본문은 이사야 60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1절)로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러한 변화가 우리 기독청년들을 통해 제대로 시작되기를 기대하고 또 소원합니다.

14절에, “너를 괴롭히던 자들의 자손이 몸을 굽히고, 너에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자들이 모두 너의 발 아래 엎드려서, 너를 ‘주님의 도성;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라고 부를 것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전과 같이 우리 기독청년들이 시작하는 변화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증거하는 현실로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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