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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7-2) - " 깊은 고뇌, 단호한 결단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22-02-18 (금) 18:37 2년전 441  

본문수 1:1~9, 고전 10:1~13, 눅 9:57~62


1. 미련의 보편성

1)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두고두고 우리가 되짚어 생각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래 전 옛날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과 역사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롯과 가족이 심판으로부터 극적으로 구원받는 이야기지만 최종 결말은 행복하지 않다. 유황불이 쏟아지는 끔찍하고 두려운 심판으로부터 롯의 가족만 피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지점에서 그만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기 때문이다.

 

살려거든 어서 달아나거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19:17)

 

롯의 아내는 심판에 앞서 천사가 신신당부한 이 말씀을 어기고 급하게 뛰쳐나온 집 쪽을 돌아보았기에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부재로 롯의 가정은 붕괴되었다.

 

2) 성경과 함께 서양 정신의 한 축을 이루는 그리스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스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신인데 그가 악기를 연주하면 사람은 물론 동물과 신들까지 감동에 젖었다고 한다. 그는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는데 그만 부인이 뱀에 물려 죽었다. 부인을 너무 사랑한 오르페우스는 지옥까지 찾아가서 악기를 연주했고 지옥의 신들도 감동하여 그의 부인을 데리고 다시 지상으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단 지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서둘러 지상을 향해 올라가다가 지상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혹시나 뒤에 부인이 잘 따라오고 있나 돌아보았다. 그 순간 부인 에우리디케는 그만 다시 지옥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이것도 새드 엔딩이다. 동양에도 이와 비슷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 겪는 슬픈 운명의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3) 성경의 배경인 이스라엘이나 비기독교적인 그리스나 동양문화 모두 비슷한 교훈을 지닌 이야기를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뒤돌아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동서고금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떠나온 것이나 지나간 과거에 대한 미련, 눈이 뒤에는 없기에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내 뒤통수에 대한 불안이 우리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는 경험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어떤 현상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나이든 세대나 젊은 세대 또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은 이것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뜻이다. 특수한 사건보다 보편적 현상이 무섭고 중요하다. 그것은 곧 오늘의 나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2. 너무 단호하신 주님

1)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았다고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세리와 창녀도 받아주시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까지도 용서하신 예수님, 한없는 사랑과 자비와 넉넉함을 지닌 인격적인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누가 9:59~61)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른 볼일을 보고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장례는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이다. 또 지금 주님을 따르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식구들에게 설명이라도 하고 떠나겠다고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심 많고 자비로운 예수님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 요즘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 있으면 아마 언론에 나고 매장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주님이 가족의 장례나 인사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2) 1982년 한신대 1학년 때, 군부독재의 숨 막히는 억압과 분단의 고통 가운데에서 그 시대를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숨통을 틔워준 노래책 하나가 교정에서 배포되었다, 젊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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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예수 (노래 책 젊은 예수삽화)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가 보통 부르면서 은혜 받는 복음성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책 안쪽에는 연필로 그린 예수님의 제 가지 초상화 세트가 삽입되어 있었다. 그 중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한없이 자애로운 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전통적이고 그리 낯설지 않은 예수님이다. 지금은 이 예수님이 좋은데 80년대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변화를 희구하는 시대였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 분단을 넘어서서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 등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의 변화를 갈구하는 시대였기에, 당시 청년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은 혁명가 예수였다. 긴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고 입은 크게 벌려 피를 토해내는 것 같으며 그 커다란 눈동자는 우리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뜨거운 모습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움찔해지는 단호한 예수님이었다.

 

3) 평상시와는 너무 다르게 부모님 장례도 허락하지 않고 가족들과 이별의 인사도 할 수 없도록 급박하게 몰아치는 주님은 결국 2천년 동안 그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추상같은 말씀을 던지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누가 9:62)

 

지금 예수를 따르고자 결단한 사람은 그 즉시로 모든 것을 단절하고 단호하게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결심은 했는데 다시 미련이 남아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우왕좌왕하는 것은 예수님이 불을 지른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차갑고도 분명한 말씀이다. 기독교 신앙은 때로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교회냐 세상이냐 신앙이냐 물질이냐를 명백하게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3. 비장한 공동체

1) 결정 장애라는 말이 있다. 짜장 먹을까 짬뽕 먹을까 결정을 못한다. 그래도 이런 이를 위해 짬짜면이 나왔으니 심각할 건 없지만, 인생과 역사의 구원을 향한 길에는 양다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반반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할 때까지는 기도하고 숙고하고 의견을 묻는 길고도 깊은 과정이 필요하다. 너무 섣부르게 결정하면 반드시 후회하고 미련을 못 버려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지금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은 서른 살 정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평균연령이 지금보다 훨씬 짧은 당시에 서른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사십대 초중반이다. 지금이야 서른은 청년이지만 당시 서른은 중년이다. 하루가 급한데 주님은 왜 그렇게 나이 다 들어서 결단하셨을까.

니코스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목공소에 날마다 고뇌하는 예수님을 그렸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가족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죄책감, 자신이 정말 메시아가 맞는지 하는 의심 등 예수님은 아마 중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 겪어야 할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날마다 고민하고 씨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결단했다.

예수님이 긴 고뇌의 시간을 마치고 가야 할 길을 결단했을 때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았다. 집을 나가서 광야로 갔고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도 더 이상 개인감정으로 대하지 않았다. 다시 나사렛의 목수, 남편 없이 살아가는 마리아의 아들로 회귀하지 않았다. 다시 죽음의 길을 포기하고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십자가 구원은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될 수 있었다.

 

2) 기독교 신앙은 직진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심판하고 완성하신다. 인간은 태어날 때가 있고 언젠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한다. 출발점이 있고 종착점을 향해 직진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간이다. 불교는 회귀다.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돌고 돈다. 직선이 아니라 원형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다른 존재로 태어나고, 이번 생이 있고 전생이나 다음 생도 있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말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니다.

깊은 고뇌 속에서 결단하되 한번 결단하면 그 다음에는 뒤를 돌아다볼 여유가 없다. 미련도 없다. 그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직진하는 거다. 이것이 기독교적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내 인생 전체를 걸고 가는 삶이 가벼울 수가 없다.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은 안 된다. 내 인격과 내 현재 전체를 거는 묵중한 인생의 게임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하나님이 우리를 납치해 온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셨고 우리가 결단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고난이지만 마침내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믿기에 결단한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는 더 이상 뒤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거야 말로 미련한 짓이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는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선택받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 바라보면서 죽을 힘을 다해 그 길을 가야 한다. 쟁기를 잡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밭도 못 갈고 농사도 엉망진창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도 행복하지 않다. 반대로 쟁기를 잡고 앞에 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 따라 가면 우리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것이다. 이 결단으로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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