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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9-1) - " 나를 따라오려거든 " / 이병일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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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9-1) - " 나를 따라오려거든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19-02-28 (목) 11:31 5년전 3430  
본문) 잠 3:1~12; 골 1:24~29; 마 16:21~28  

 

지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한 단어처럼 부릅니다. ‘예수’ 하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기 위해서 처음 제자들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단어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와 자기의 고백을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게 고백하지 말고, 마음속에 왜? 그렇게 할까 하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의 진실성은 고백 그자체로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삶으로, 마음은 몸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주권과 권능을 구사한 예수님은 역시 사람의 아들로서 잃어버린 사람됨을 대신하여 버림을 당하고 넘겨져 죽임을 당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로써 그는 사람됨을 상실한 민중들의 삶과 유대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됨의 대리자가 됩니다. 사람됨의 회복을 대신하여 그는 비인간화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 사람됨을 대신한 사람의 아들의 끝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베드로가 따로 불러서[προσλαμβάνω] 꾸짖었습니다[ἐπιτιμάω]. 그러자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꾸짖다는 “힐책하다, 징계하다, 비난하다, 강하게 경고하다, 엄하게 명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귀신을 축출할 때나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따라다니던 예수님의 결정적인 말에 항변하며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지만, 그리스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거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수님과 다르게 이해한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도 자기가 좋을 때는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다 할 것처럼 의기투합하지만 막상 현실의 위험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 의기는 약해지고, 때로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현실에서 자기의 희생이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예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꾸짖고, 예수님의 의지를 바꾸어 나의 의지를 앞세우려 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게 된 행동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알았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잘 이해했다면 꾸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꾸짖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은 것처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말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배척하고 버린 것이 아니라 “내 뒤로 돌아와라” “내 뒤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의 길은 반드시 가야 할 과정으로 못 박고 그에 따라 제자들이 서야 할 위치, 곧 예수님의 “뒤로 돌아와서 따를 것”을 당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단적으로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 그것은 “참 나”를 찾는 일입니다. 거짓된 나의 모습, 처세술에 능해진 나의 모습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삶을 나누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볼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처럼 정면으로 반박하며 예수님을 꾸짖었던 베드로를 타이르며 제자로 받아들인 예수님의 모습에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만이라도 자기 몫의 분량만큼이라도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싸움들의 대부분은 자기의 몫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일이 그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몫을 감당하려 한다면 갈등과 싸움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질 때에 우리는 때때로 힘에 겨워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하려했던 일들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단편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도 그 신앙이나 삶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이웃종교인들보다 더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생명을 죽이는데, 어떤 사람은 전쟁을 반대하고 생명을 사랑하자고 합니다. 

 

같은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라도 생각이 다른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믿음은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르면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다르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바르게 고백하고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고 예수님이 꾸었던 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때에 예수님을 올바로 고백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은 그의 삶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죽음을 죽음으로 대변한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 새로운 삶이 탄생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걸어가는 길은 또 하나의 억압의 세력으로 변질하게 되는 메시아 왕국의 권력을 쟁취하는 길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하늘에서 떨어질 새 시대의 표적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걸어가는 길은 그가 억압적 제도와 악한 숨결을 내뿜는 삶의 구조 속에서 빼앗긴 사람됨을 대신하여 옛 시대의 고문, 살상을 넘어 마침내 부활로 승리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사람됨의 완성을 보지 못한 인간의 역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여전히 자기 개방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는 모험입니다. 동시에 비인간화의 세력과 그 악한 숨결이 이루고 있는 삶의 구조 속에서 박제화된 교회를 개혁하는 일입니다. 또한 과감하게 예수님의 뒤로 물러서서 스스로의 안정과 특권을 포기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기 변혁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은 주현절아홉째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려는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수요일(6일)은 성회수요일이고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인민들이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듯이, 예수님이 빈들에서 40일을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자신의 공생애를 준비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몸과 마음으로 그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따르기로 결단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몸으로 마음으로 가르치신 모든 일들을 배우고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까지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지식을 의지하고 나의 지혜를 내세워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꾸짖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언 3:6) 지금 내게 다가온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귀여운 아들에게 내리시는 훈계이며 책망이며 꾸짖음임을 깨닫고 기꺼이 감당합시다. 그 고난을 이겨낸 사람에게 있어서 고난은 입에 쓴 보약과 같이 그를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골로새서 1:24)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고난은 징벌이나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함께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살기로 결단한 우리들이 할 일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회수요일인 6일은 경칩(驚蟄)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초목의 싹이 돋고 동면하던 동물이 깨어나며, 겨우내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벌레들도 꿈틀거리는 절기입니다. 얼었던 땅을 두드리는 비 소리에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놀라서 깨어난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사순절의 시작일과 경칩이 같은 날입니다. 이웃과 이 땅의 일에 무관심하던 잠에서 깨어납시다. 지금 이 순간순간이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 갈 미래를 위해서 중대하고 심각한 때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의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행동합시다. 

 

겨울동안 잠을 자며 쉬던 뭇 생명들이 경이로운 비 소리에 깨어나서 새롭게 주어진 삶에 경탄하듯이, 눈 녹은 계곡 물소리에 버들가지가 놀라서 깨어나고, 봄바람에 땅 속에서 꿈꾸던 씨앗이 놀라서 싹을 틔우듯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읍시다. 낡은 껍데기와 묵은 습성을 벗어버리고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또다시 놀라며 감격하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놀라움으로 가득 채우며 삽시다.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변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희생입니다. 교회든 사회는 나 자신이 그 구성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를 죽이지 않고 나를 희생하지 않고는 어떠한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자존심이나 나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새로운 것도 추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기도했듯이, 우리에게도 지치고 힘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실망하지 맙시다. 

 

“한 중년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그만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 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에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너무 섭섭하고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다음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닌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버스 운전기사가 이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주고 아줌마가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 주니까요.’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힘들 때,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도 이루기 힘든 일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갔다고.’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원망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 뒤에서 우리를 추동하며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보며 ‘보이지 않는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그 속에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신앙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사순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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