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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5-1) - " 기도함으로 힘을 냅시다. " / 김영봉 목사

관리자 2019-02-01 (금) 15:18 5년전 3305  

​본문) 23:23~32 8:1~5 12:49~59

독일에서 한국사람이 주차를 잘못했습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주차위반 벌금을 물었습니다. 기분이 나빠서 누가 신고했나 알아봤더니 이웃에서 가깝게 지내는 할머니가 신고를 했습니다. 독일문화는 가깝게 지내는 것하고 신고를 하는 것하고 별개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재수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하지만 독일사람들은 내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벌금을 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간에 신고해도 원수가 지지 않습니다. 내가 법을 지키는데 다른 사람이 안지키면 응징하는 문화입니다. 내가 법을 지킴으로서 나도 법의 혜택과 보호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조심하라는 충고가 유행할 정도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할 일이 없으니까 창문에 턱 괴고 바라보면서 신고를 합니다. 전화기까지 옆에 놓고 신고합니다. 친분보다도 법을 우선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난무한 유다 왕국에 예레미야가 독일의 할머니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전 불법이 성행하던 시기에 활동하다가 망국의 비운을 겪은 선지자입니다. 당시 거짓선지자들은 악행을 일삼으며 거짓맹세하고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 못하는 신들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가증히 행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7:9-11).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은밀한 행실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들추어 내십니다. 백성들은 거짓선지자들의 거짓말 때문에 거의 마술을 믿듯이 성전에서 예배만 열심히 드리면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는 잘못된 안전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거짓된 희망을 깨부숩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망한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차라리 항복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을 들은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나라의 평화를 구하기는 커녕 망국의 저주를 한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예언자들과 그들의 혀를 통해 나온 거짓 예언들을 태워버리는 맹렬한 불같이 임했습니다. 고관들과 백성들이 안도하고 있는 거짓 평화, 거짓된 안정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이 임했습니다. 나라는 망해가는 전조가 넘쳐나고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다가 백성들의 증오로 고난을 당해야 하는 예레미야의 심정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가정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인 대가족 제도는 가부장 중심으로, 여필종부와 부부유별, 부자유친, 장유유서라는 철두철미한 위계질서를 중시했습니다. 이런 종적 인간관계가 사회 전반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성차별과 자녀에게 맹종을 요구하는 부작용이 드러났고 부부 사이에는 부부 일체감 대신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켜왔으며 갑질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왜곡되고 변형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고 예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바울은 인관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세 가지 인간관계를 통해서 즉 부부, 부자, 상전과 종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상호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의 배경에서 볼 때 굉장히 혁명적입니다. 신약성경 외에 고대 어느 윤리에서 부부, 부자, 주종에게 동등하게 서로 서로순종하라는 교훈이 있겠습니까?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예수께서는 죄로 변형된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새술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일 정도로 새술을 담아낼 탄력성을 잃어버린 낡은 부대였습니다. 이 낡은 가죽부대인 세상에 예수님이 들어가면 평화가 아니라 불이 되어 태워버리거나 날카로운 검이 되어 찢어버립니다. 이 낡은 가죽부대인 가정에 예수님이 들어가면 새가정으로 탈바꿈되는 진통이 일어납니다. 마태복음에서는내가 온 것은 가족간에 불화하게 하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5-36)고 하셨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12:51-53)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가정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길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핍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핍박의 대상자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아낙네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 때에도 성도들은 주님께 더욱 더 기도함으로 결국 가정 전체를 복음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뮤직박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1990년 작).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아버지 라즐로는 변호사로 성공한 딸 앤(제시카 랭 분)과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치 전범이었다는 고발이 법원으로부터 날아들었습니다. 통지서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때 경찰이었던 라즐로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였으며, 이를 속인 것은 이민법 위반이므로 추방될 것이며 헝가리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라즐로는 무죄를 주장합니다. 아버지의 결백을 확신하는 딸 앤은 변호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법정에서 제시된 모든 증거를 반박함으로써 무죄 판결을 이끌어냅니다. 그 후 앤은 우연히 아버지 친구 졸탄의 사진을 보게 되는데, 그가 잔혹하게 유태인을 죽이고 기념사진을 찍은 경찰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앤이 졸탄의 물건을 찾아와 열어 보니 낡은 뮤직박스가 들어 있었는데 그 뮤직박스를 열자 음악과 함께 천천히 태엽이 감기면서 아버지가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입증하는 흑백 사진들이 나타났습니다. 앤은 진실을 밝히자고 호소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외면합니다. 번민에 빠진 앤은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던 날, 특별수사대 앞으로 증거 사진들과 함께 진실을 밝히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영화는 정의가 가족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보다 더 큰 가치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변호하는 것이 옳지만 아버지가 진실을 은폐하고 정의를 외면할 때는 아버지를 거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가 이런 의미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10:32)

 

그리스도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종으로서 우리를 지도하며 다스리십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으로 포장을 하면서 맹종을 요구하는 일체의 권위주의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훈계는 많이 하면서 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 복종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곳에 예수께서는 불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진정한 사랑과 정의를 세우려면 그저 모든 것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기존의 관습을 깰 수도 권위에 도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윗사람을 존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피차에 진짜 섬김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더 크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불 같은 말씀, 바위를 쳐서 깨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을 전하다가 동족으로부터 미움 받고 고난당하는 예레미야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얼마나 기도했을까? 불의한 가정에 복음의 가치를 먼저 받아들인 성도들이 핍박 중에 주님만 의지하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 하나님께선 과연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다가 당하는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가 과연 효력이 있을까?

 

계시록 말씀을 보면 성도의 기도는 갖가지 향기로 천사의 손에 받들려 하나님의 보좌 앞 금제단에 올려집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진 다음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억울함엔 대적들을 향한 심판으로, 간절함엔 시원함으로, 의심에는 확답으로, 미완의 소망엔 완벽한 성취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열납된 성도의 기도는 지상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결국엔 구원과 평화와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을 불태우고 위장된 평화를 깨뜨리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려는 성도의 삶에는 맞부딪침으로 인한 갈등과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기도함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므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릴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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