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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4-2) - " 거짓 목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 " / 정재동 목사

관리자 2019-01-24 (목) 14:38 5년전 3491  

본문) 미 6:1~8, 마 7:13~23, 약 1:17~27

 

세 본문 중에 가정 먼저 해명해야 할 부분은 마태복음 7장 15절의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랬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야 하는 이유는, 양의 옷을 입고 나아 오지만 사실은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리를 따라가면 결국 죽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이리가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넓은 문이어서 많은 이들이 그리로 들어가고 좋아하지만, 결국 사망의 길이요, 좁은 길은 험난해서 따르는 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생명의 문입니다. 신명기 30장 15절 이하에서 생명과 사망을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라고 하는 것처럼,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어서 분별이 쉽지 않으므로 잘 분별하여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는 요청입니다.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서중석 교수의 은사 중심의 ‘카리스마적 선교사’라는 이해입니다. 22절에 보면, 그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나타내는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목회를 거짓 목회라고 규정하고, 결과를 사망의 길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강력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의 길은 넓은 길이고, 죽음의 길이며,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목회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내용이 전혀 공유되지 않은 그들만의 은사 중심의 카리스마적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짓 목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목회가 갈라지고 구분됩니다.

 

오해 없이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의 목회와 현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례자 요한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으로 결론 났음을 선언하고, 그분의 운동과 말씀이 ‘복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크게 말하면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축약하면 신약성경이고, 그것을 더 집중하면, 오늘 본문이 포함돼있는 범주의 산상수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본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예수 그리스도가 전개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본질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목회는 당연히 그 내용을 강령으로 하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사 중심의 카리스마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귀신 축출과 권능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짓 목회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어쩌면 마태복음을 잉태한 마태 공동체의 상황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뒷전이 되고, 은사 중심의 목회가 주류가 되어서 그 상황을 반영하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금식을 하고 성령에 이끌려 여러 가지 시험을 넘어서실 때, 가장 중심에 섰던 것이 바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적을 일으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든 것의 중심에 말씀을 세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흥분하는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강령이 정확하게 관철되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중에 오늘 주신 말씀은 7장 뒷부분입니다. 예수께서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단락짓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하나님 나라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 중세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 철퇴를 맞았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중세 가톨릭교회가 내부개혁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3년 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가장 많이 외친 것이 바로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권위 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인데,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것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면서 말씀의 문자 주의에 빠져 말씀을 우상화하는 이들도 있고, 그 우상화의 뒷면에 나와 다른 이들을 배타하고 정죄하는 또 다른 율법주의와 하는 경향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말씀 중심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강령처럼, 지금까지와 다른 목회 패러다임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는 목회를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발휘했는데.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너희가 하는 목회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여주여 하지만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의 동일성, 일치성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내 목회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는 아닙니다. 

 

한국교회에는 메가급 처치가 많습니다. 지역에 뿌리내린 교회가 아니라, 전국에 있는 교인들을 우리 교회로만 끌어모으려는데 집중합니다. 우리교회가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교회가 은사가 많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지역의 교회가 아닌 우리교회로만 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 외에는 다 남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 교회, 남의 교회만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끼리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한국전쟁 이후로 이런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지역 이름 대신에 전체를 담아내기 위한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남의 교회야 죽든 말든, 거대한 차로 싹쓸이해 담아와야 직성이 풀리는 은사 중심의 목회는 이미 ‘말씀이 사라진’ 거짓 교회입니다. 형제교회와 아픔을 나누지 않고, 어려움을 나누지 않고, 나의 성장만을 꿈꾸는 극도의 이기주의 형태의 교회를 참 교회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길은 매우 쉽습니다. 덩치 큰 교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나누고 자기를 해체해 가는 노력이 없는 한, 즉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은사 중심으로 비대해지는 한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성장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곪아가고 사망의 길로 갑니다. 최근 30년간 성장을 내세우고 외쳐왔지만, 오히려 세상과 멀어지게 된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짓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 6장 1절에도 보면, 제일 먼저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 신앙의 강령이 되고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외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정작 내 이름을 내고 내 자녀 이름을 내고 우리 가족이 우선되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가 6절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 무슨 예물로 예배를 드릴까만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8절 말씀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오직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 명령은 제쳐두고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예물의 종류와 숫자만 계산하고 있다는 것은 거짓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많은 교인으로 나아갈까, 얼마나 큰 교회를 이룰까로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뒤로 밀렸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이루되 그것으로 자녀에게 ‘세습’도 하고, 때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서슴지 않고, 그것으로 재물도 탐내고, 그것으로 권력과 명예를 삼기도 합니다. 말씀이 없는 은사야말로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한국교회를 통해서, 성서 시대의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합니다. 그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존재 자체가 말씀으로 변혁되지 않고 달라지지 않으면, 그 열매를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눈동자 앞에 서 있음을 깨닫고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깊은 데로 그물을 내려야 하듯이 말씀의 깊이에 뿌리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스스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라(22절),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거울을 보고 자기의 더러움을 씻지 않는 사람과 같다(23, 2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여 듣고, 스스로 말하기와 성내는 것은 느리게 하라(19절), 그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20절)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중심적 ‘은사 중심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괴물 공동체를 양산합니다. 성경도 자기중심으로 끌어다 도구처럼 쓰고, 교인들도, 교회도 모두 도구에 불과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어 사망의 길로 치닫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고 26절처럼,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핵심이 아닙니까? 세 가지 본문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임을 강조하고, 그 말씀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서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말씀공동체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화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자기 부정과 낮아지심이 성탄이요, 주님의 현현의 본질입니다. 주현절 넷째 주일, 우리는 지금 주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좁은 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넓은 길로 가고 싶은 유혹도 많습니다. 기적과 이사를 통해 교회를 키워보고 싶은 욕망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 존재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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