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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1) - " 너 사람아! " / 서재경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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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4-1) - " 너 사람아!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9-01-24 (목) 14:34 5년전 3478  

본문) 미 6:6-8, 마 7:13~23, 약 1:16-27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날처럼 변화 많고 복잡한 사회에서, 그래도 안정되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흔히들 ‘중산층’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중산층’이란 그 사회에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계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사회의 중심이 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중산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중산층에 속한 것일까요?

영국에서는 그 사회의 중심이 되는 중산층에 들려면, 몇 가지 기준을 갖추어야 한답니다. 그 첫째는,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공정한 룰을 따라 행한다면, 반칙을 하지 않는다면, 첫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주관,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하고,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야 둘째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셋째는, 약자의 편을 들고 강자들에 맞서느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불의와 불평등, 불법에 의연히 맞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집에 있는 책상 위에 비평지 한 권쯤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 사회의 중산층, 중간 계층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조금 다른 기준을 볼까요?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은 나름대로 특색 있는 기준을 제시했었습니다. 첫째는, 외국어 하나쯤 구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포츠 중 한 가지 정도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악기를 하나 이상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자기만의 요리 하나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는, 봉사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좀 독특한데,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중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이런 조건들을 보면, 프랑스 사람들답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지요? 어떻습니까? 

이런 기준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재어 본다면, 우리가 과연 중산층에 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이런 기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즐겨 실천하는지 하는 문제들, 즉 삶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또 내 생활, 나만의 문제를 넘어 공익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는지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중산층의 조건도 있습니다. 그 첫째는, 가구의 월 소득이 500만 원 이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강남 정도에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형 이상의 자가용을 타고, 넷째는, 1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을 하고, 다섯째는, 현금 자산이 1억 이상이어야 한답니다. 뭐 이정도만 하지요. 좀 기분 나쁘지만 어딘지 이미 알겠지요? 이게 2012년에 제시된 조건이라니까, 요즘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중산층에 속해 있는 것일까요? 기왕이면 우리에게도 중산층에 대한 좀 더 의미 있는 기준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보면, 우리의 중산층 자격은 온통 ‘경제’, ‘돈’ 문제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회를, 우리의 삶을 온통 ‘돈’이 지배하는 모양새입니다. 진정한 삶에 대한 고민은 사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삶은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의 돈만 보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맘몬이 지배하는 사회요, 맘몬을 숭배하는 사회요, 맘몬의 제국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깨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복을 받아서 중산층이 되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미가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은, 도대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언자 미가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특히 아하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요. 아하스 왕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그 시대는 온통 돈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시대, 어딘지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버는 것이 ‘지고의 선’이 되어버린 시대에 돈을 많이 그리고 빨리 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남의 것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것이지요. 권력과 특권을 가지고 약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만큼 쉽고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권력자들은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미 2:2) 거짓과 속임수로 폭력으로 약자들을 약탈한 것입니다. 그렇게 약자를 약탈하는 모습을 미가는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내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3:2-3)고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통치자 아하스 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아무런 신앙도 없는 불신자였을까요? 아닙니다. 아하스 왕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광적인 신앙인입니다. 그가 얼마나 열렬한 신앙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하스가 아기 맏아들을 불태워서 제물로 바친 일입니다.(왕하 16:3) 세상에 자기 아들을 태워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신앙이 있다면, 이보다 더 열렬한 신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하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미처 실행하지는 못했던 그 일, 자기 아들을 제물로 태워 바친 인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민 일입니다. 아하스 왕이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제국의 신전답게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제물을 드리는 크고 화려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그 제단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모형을 세밀하게 그려 가지고 우리야 제사장에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크고 웅장한 새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하나님께 엄청난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하스는 성전 제단을 수축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꾸민 사람입니다. 성전 제단을 크고 웅장하게 꾸민 아하스 왕, 과연 대단한 신앙인 아닙니까? 아하스는 제단을 만들고 나서 우리야 제사장에게 명령했습니다. “아침 번제물과 저녁 곡식 예물, 왕의 번제물과 곡식 예물, 또 이 땅의 모든 백성의 번제물과 곡식 예물과 부어 드리는 예물을, 모두 이 큰 제단에서 드리도록 하고, 번제물과 희생제물의 모든 피를 그 위에 뿌리시오.”(왕하 16:15)

아하스의 이 신앙은 무엇입니까? 엄청난 제물을 드리고,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불태워 드리면서 그가 원하는 것,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자들의 땅을 빼앗고, 백성의 가죽을 벗겨서 자신이 부자가 되는 것,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부려먹으려는 참람한 신성모독이 아닙니까? 이런 게 신앙이라면, 이런 신앙은 차라리 없는 게 좋습니다. 탐욕과 신앙이 협잡하면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됩니다. 우상숭배의 정체는 탐욕에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곧 맘몬 숭배입니다.

 

미가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신앙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려는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미가는 질문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무엇일까요? 제사장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해 줍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는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송아지를 가져가야 하고, 양을 가져가야 하고, 올리브 기름을 가져가야 하고, 곡식 예물을 가져가야 한다. 이 대답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이 해준 대답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도 많이 듣게 되는 대답이지요. 제물은 깨끗해야 하고, 기왕이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 값진 것을 바쳐야 한다면, 가장 귀한 자기 아들이라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미가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것들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1년 된 송아지도, 수천 마리의 양도,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맏아들을 태워 바치는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많은 제물을 바치고 자기 아들까지 살라 바친 자가 누구였지요? 그렇습니다. 미가는 무엇보다도 아하스가 벌이고 있는 참람한 짓거리들을 신랄하게 근원적으로 부정합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전에서 벌어지는 모든 폭력과 약탈을 폭로하고 심판합니다.

다시 미가는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듭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8절) 무슨 말입니까? 대답은 이미,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일이다, 그 말이지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미가의 대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요 신앙인의 조건입니다. 먼저 ‘공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정의를 따라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생각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산다면, 그때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제물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도깨비 방망이도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따라 살게 합니다. ‘정의’가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가르는 첫 번째 시금석입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분명한 시금석이 ‘정의’라면, 참으로 엄중한 기준이지요. 만약 이 기준에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비추어본다면 어떨까요? 어쨌거나 미가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 갈라지는 분명하고 간결한 기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적어도 미가에게 정의 없이, 정의를 피하고서 신앙인이 되는 길을 없습니다.

미가는 ‘정의’와 함께 또 하나의 기준을 말하지요. 그것 또한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굳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이렇게 미가는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으로 정의와 사랑을 제시했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알짬입니다.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산다면, 중산층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진정한 신앙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신앙의 알짬은 이미 잘 알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말 그대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정의와 사랑을 말합니다. 성서가 정의와 사랑을 말한다는 이 사실은 결코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상식입니다. 사실은, 성서뿐이 아니지요. 동서양의 옛 성현들이 그토록 강조한 것이 바로 정의와 사랑 아닙니까? 공자가 仁과 義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심지어 까만 양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깍두기 아저씨들도 ‘차카게 살자’고 사랑과 의리를 말하지 않습니까? 

정의와 사랑은 신앙을 가르는 기준을 넘어 ‘사람’을 가르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사람이면,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는 보편적 인간의 기준이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그토록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정의와 사랑입니다. 사람이 되는 것, 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실천이지요. 아하스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아도,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엄청난 제물을 드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나의 탐욕을 꺾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꺾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이 새 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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