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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2) - " 만민의 깃발 " / 김은승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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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2-2) - " 만민의 깃발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9-01-11 (금) 16:18 5년전 3392  

본문) 이사야 11:10-13, 고린도전서 3:1-9, 마가복음 9:38-50

불교 전통 속에 있는 우리나라는 종교를 막론하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이 말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 부처에게 귀의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효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해도 천국에 간다고 가르쳐서, 사람들은 늘 이 말을 읖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덕을 쌓아야 극락에 간다고 생각하는데, 이 말을 읊는 것만으로도 극락에 간다고 했다면 잘못된 가르침이 틀림없습니다.

원효스님이 학식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중생들을 이렇게 가르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백성들에게 불경의 어려운 말들을 가르치기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삶에 적용시키기도 어려웠습니다. 그저 주문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서 조금이라도 부처의 자비심을 생각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아무리 정성스레 불공을 드려도 실제 삶에서 자비를 베풀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는 사람들은 마치 달은 보지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달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원효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를 외치면서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종종 신문지면을 장식합니다. 예수님은 부처와 달리 정의의 신이라서 그런 걸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면서 서로 비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불교와 기독교를 서로 견주면서 기독교의 행태에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과연 기독교인들이 휘두르는 정의의 칼자루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비신자들이 먼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불교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과연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의 잘못된 신앙행태가 한 사람이라도 걸려넘어지게 한다면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온전히 간직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싹은 구원자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겠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가문에서부터 구원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메시야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른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대로 판결하지 않고 공정하고 의로운 판결을 내립니다. 마치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것처럼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자기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 싹을 만민의 깃발로 세우셔서, 그 깃발을 찾아서 모여들게 하십니다. 강한 손을 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모아들이시는 분은 하나님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러면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를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만민의 깃발이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 깃발을 기호라고 번역했는데, 상징, 징표라는 뜻입니다.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징표로서 기능합니다.

어떤 나라에 불의가 만연하고 공정한 재판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 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짓밟힌 것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의 나라에서 억울한 종살이를 하는 것과 하등 다를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들어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치시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땅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인간답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민의 깃발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메시야가 나서 마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듯 그 땅을 통치합니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다른 형태의 폭력이 아닙니다. 폭력과 불의를 원천적으로 없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에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이어 13절에서는 그 때에는 에브라임의 증오가 사라지고, 유다의 적개심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미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펼쳐질 때에 그 땅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땅이라 평가 받습니다. 그리고 떠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향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 통치의 표징으로 오신 것입니다. ‘겉치레 제사는 이제 필요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 사랑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38년 된 병자도 일어서게 할 것이다. 아니 사랑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한다. 더이상 죄인과 의인 운운하며 서로를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모든 사람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신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깃발입니다. 그래서 그 깃발을 보고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사람들, 형식적으로만 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길은 예수님의 존재가 표징으로서 알려주는 것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하신 말씀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 소중해졌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로마서4:13)” 하셨다고 해서 그저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말만 할 뿐, 예수님이 징표로서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재산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고개를 떨구고 돌아섰던 것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재산이나 명예, 자기 자존심, 자기 가치를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아직은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은 어리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어리다는 것을 알면 성숙하기 위해 노력하면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린 사람을 배려하고, 어린 사람은 성숙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성숙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적 문제를 진리인양 평가의 잣대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 오직 사랑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믿음의 방식이 오직 한 가지 뿐인 것은 아닙니다. 때리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같은 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다정한 말 뿐만 아니라 따끔한 훈계나 때로는 침묵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방법이 한 가지 뿐이겠습니까? 내 생각과 다르면 다 적이겠습니까? 자기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은 일이겠으나,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만큼 자기를 열어놓는 일이 중요합니다.

유대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참관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히만을 평가하기를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두둔하는 말이 아닙니다. 안됐지만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집사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 또한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3:3)” 라고 바울 사도가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누구나 신앙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을텐데, 그렇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견주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고 불만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가복음 9:42). 예수님께서 참으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잘못된 신앙행태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저버리게 된다면 그 책임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다시 한 번 하나님 다스림의 표징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지 살펴보십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38)’ 저들이 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되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 하시면서 허용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에게는 귀신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의 아픔이 더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소금 비유를 드셨습니다. 50절 말씀에서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하셨습니다. 결국 평화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요 일치입니다. 우리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외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춤으로 이루어내는 평화와 화목입니다. 우리가 이 표징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아니 깃발을 꺾어서 감추어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잘못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깃발이 서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깃발은 사람들을 호도하는 거짓 깃발입니다. 만민이 보고서 찾아오게 하는 깃발로 세워진 그리스도 예수는 한 없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인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을 소리치는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성도는 이미 축복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는 사랑과 평화가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밀알교회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느끼는 그 힘과 생명력이 축복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평화를 이루고 화목하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 통치의 깃발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칼을 내려놓게 하신 예수님이신 것도 기억하십시오. 비판하고 정죄하는 정의의 칼은 하나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형제를 변호하고 감싸주고 같이 어깨동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의 깃발을 세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말씀이 너무 무겁다는 평가를 종종 듣습니다. 같이 말씀을 듣는 자로서 저역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울며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통회하며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웃으면서 다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 사랑의 능력이 이 한 주간도 여러분께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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